외전4
“확인하고 싶다던 게 뭐였어?”
마차를 타고 별장으로 이동하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에게 물어왔다.
“확인이라니요?”
“소펜가에 확인할 게 있댔잖아.”
“아아, 그거요? 별거 아니에요.”
소펜가에서 진짜 자신을 죽이려고 했나, 그런 부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진짜로 죽일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완전히 비껴간 과오를 한 번 더 되짚고 싶었고요.”
“말이 추상적이야.”
“이 이상으로 설명할 길이 없거든요.”
죽었던 몸으로 시간을 거슬러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무슨 수로 설명할까. 캐서린이 입술을 가리고 혼자서 웃는데, 로렌디스가 그런 그녀를 빤히 지켜봤다.
“부쩍 웃음이 많아졌어.”
그랬던가?
“많이 웃으면 좋죠.”
캐서린이 막 대꾸하는데 마차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캐서린이 의자 시트를 짚으며 중심을 잡으려는데, 로렌디스가 한 발 더 빨랐다.
“읏!”
캐서린을 그대로 안아서 끌어당겼다. 캐서린이 주춤하며 로렌디스에게 몸을 기대자, 마차가 다시 수월하게 굴러갔다.
“남부로 가는 길목은 길이 험하네요.”
“남부는 이름난 휴양지를 제외하고는 도로 상태가 안 좋거든. 이걸 미리 언질 준다는 게 잊었어.”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그의 옆자리에 앉혔다. 마차가 충분히 넓어서 나란히 앉아도 괜찮았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작은 머리통을 손아귀로 꾹꾹 눌렀다.
“작아.”
몸을 마차에 반쯤 기대서 삐뚜름하게 짓는 그의 표정을 보니까, 괜스레 목덜미에 열이 올랐다.
캐서린은 황급히 붉어진 뺨과 목덜미부터 가렸다. 그의 시선을 피해 봤지만, 곁에서 픽― 하고 가볍게 웃는 소리를 들으니까 다 본 것 같다.
“좀요.”
“내가 뭘? 중심 못 잡아서 넘어질 뻔한 것 잡아 줬잖아.”
타박할 걸 타박하라는 어조에 불만이 가득했다. 저 표정을 보니까 떳떳한 그의 태도를 더 지적하지도 못하겠다.
캐서린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다, 주변 공기가 달라진 걸 확연히 체감했다.
“확실히 남부여서일까요? 북부보다는 따뜻하네요.”
“마음에 들어?”
“공기가 따뜻해요. 마차 창문 열어도 되나요?”
캐서린이 로렌디스를 돌아보면서 묻는데, 로렌디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게 물을 게 아니라는데도.”
캐서린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창문을 열자 따스한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북부는 계절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늘 추운 곳이었다. 그래도, 캐서린은 그곳이 좋았다. 그렇다고 이런 온기가 싫다는 건 아니다.
“따뜻한 것도 좋네요.”
“별장에 도착하면 짐부터 풀지.”
* * *
마차가 남서부의 별장 앞에 도착했다. 익숙한 월계수 문양이 그들을 반겼다. 헬렌가의 재산이라는 뜻이었다.
“손.”
캐서린은 모자를 둘러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로렌디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캐서린을 이끌었다. 별장에서도 미리 소식을 전해 듣고 마중 나온 참이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번거롭게 굴 것 없다는데도 이런다.”
“얼마 만에 남부를 찾아주셨는데요. 들어오십시오.”
남서부에 위치한 별장이어서일까? 확실히 북부에서 본 건물들과는 달랐다. 커튼부터 융단까지 색감이 희고 푸르렀다. 가구도 시원스러운 색감이었다. 흰 테이블과 벽에 붙여 둔 액자들까지,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로웠다.
“정돈한다고 정돈했는데, 두 분께서 잠시 머물기에 충분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경 쓸 것 없으니 하던 일들 봐.”
집사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떠났다. 캐서린은 창문 근처의 소파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남부에는 갑자기 왜 오자고 했어요?”
“북부에서만 거의 지냈잖아. 북부 일도 마무리됐으니 잠시라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좋을 듯 보여서.”
“북부 밖으로 나올 일이 잘 없어서일까요? 약간은 멍해요. 꼭 멀리 여행 나온 기분이에요.”
북부에서 먼 곳은 맞다. 그런데 대륙에서 대륙을 넘나드는 그런 이동은 아니었다. 같은 대륙인데도 이 정도로 기후가 달랐다.
별장 안은 북부보다 개방적인 구조였다. 남부 자체가 워낙 따뜻한 곳인지라 창문이나 이런 부분을 넓게 트고 레이스 커튼을 장식으로 달아 두었다.
흰 레이스가 살랑거릴 때마다 바깥 전경이 시야에서 아른거렸다. 캐서린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가를 더듬거렸다.
“그런 얼빠진 표정은 또 처음이군.”
로렌디스도 소파로 와서 앉았다. 남부의 별장은 이국적인 느낌이 강했다. 북부 자체가 워낙 건물이 크고 폐쇄적인 구조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북부에서 지낸 것도 그렇게 오랜 시간은 아닌데, 제 몸은 벌써 북부에 적응했는가 봐요.”
“그러게.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어디든 잘 적응하는 몸이야.”
그렇다고 막연하게 후덥지근한 곳은 아니었다. 적당한 온기에 맑은 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머릿속이 맑게 갰다.
먹구름 꼈던 하늘이 한순간에 맑아지면 딱 이런 기분일까?
별장 주변은 텅 빈 공터였다. 주변 일대는 색감이 옅은 꽃들이 가득 채웠고, 드문드문 키가 작은 소나무도 보였다.
“옷 갈아입고 나가자.”
로렌디스가 옷가지를 꺼내서 침대에 내려놨다. 캐서린은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나왔다. 신발도 굽이 낮은 샌들이었다.
늘 한 몸처럼 챙겨 다니던 숄이나 담요도 오늘만큼은 벗어 던졌다. 팔을 높게 뻗는데, 어깨가 유난히 가벼웠다.
‘그 차이가 크구나.’
캐서린이 화단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니는데, 로렌디스가 옆으로 다가와서 몸을 수그렸다.
“온천도 있대.”
뜬금없이 나온 이야기에, 캐서린은 몸을 움찔거렸다.
“온천은 북부에도 있잖아요.”
“여기도 있다고. 여기는 실내온천이야.”
로렌디스는 눈매를 좁혔다. 캐서린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걸 로렌디스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캐서린은 온천욕을 크게 즐기지 않는다. 엄밀히는 혼자서는 즐기지만, 같이 즐기는 건 아직 어색했다.
“아직도 내외해? 이제는 내외할 때는 좀 지나지 않았나?”
캐서린은 그의 입술을 두 손으로 막았다. 침대에서 나누는 잠자리는 일상이 됐지만, 아직도 사용인들 시선이나 눈을 의식하는 건 사실이었다.
울먹이는 울음소리를 참기도 몇 번, 로렌디스는 그녀가 울음을 참으며 좀 더 노골적으로 구는 면이 있었다.
캐서린은 사용인들 눈을 의식해서 야외 온천은 즐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웠어도, 조그마한 소음에도 몸이 절로 긴장했다.
“여기는 사용인들도 없으니 됐지.”
“방금은…….”
“저들은 모두 사용인들 거처에서 지낼 거야.”
캐서린은 당혹스럽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눈알 그만 굴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시선을 붙잡으며 이야기했다.
“또 빠져나가려는 거 다 보여.”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너무 대놓고 말씀하니까 그러잖아요. 로렌디스가 이야기했던 사실을 증명하듯, 별장 주변으로 사용인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오후 무렵부터 조용하더라니, 저녁 무렵에는 아예 텅텅 비었다.
“로렌디스.”
마침 로렌디스는 식당에서 가볍게 먹을 샌드위치를 가져와서 캐서린에게 내밀었다. 캐서린은 달걀에 양배추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한 마요네즈 맛이 입안 퍼졌다.
“진짜 온천 하러 가요?”
“싫나?”
“사람이 요즘 너무 늘어진다 싶어서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여유 있어요?”
로렌디스가 심드렁하게 웃었다.
“입에 묻었어.”
캐서린은 입술에 묻은 소스를 닦아 냈다. 그는 별걱정을 다한다며 캐서린을 타박했다.
“북부를 비워도 될지 모르겠어요.”
“잠시는 비워도 돼. 애초에 몇 년 전까지는 주인이 붙어 있지도 않는 영지였어. 우리가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문제가 생길 곳이라면, 지금까지 유지되지도 못했어.”
헬렌은 야만족과의 충돌이 잦은 곳이었다. 역대 북부의 주인들은 시시때때로 설원으로 야만족 토벌을 나가서, 영지를 자주 비웠다.
“온천은 소화시키고 다녀와요.”
캐서린은 긴장을 내려놓았다. 로렌디스가 뒤에서 캐서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시선을 가만히 내리더니 작은 머리통을 꾹꾹 눌렀다.
“머리 헝클어져요.”
“이 작은 머리에 무슨 걱정을 줄줄이 달고 사는지.”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뺨을 살살 간질였다. 캐서린은 그만두라며 그의 손등을 약하게 때렸다. 따끔하게 타박한 건데, 로렌디스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좀 걷지.”
캐서린은 가볍게 식사를 끝내고, 바깥 야광등을 따라 별장 주변을 거닐었다. 저 멀리 온천 건물이 보였다.
“유리 온천이네요.”
온천 시설은 별장 뒤편에 마련해 뒀다. 엄밀히는 별장 내부에 있는데, 주인 내외만 접근하게끔 외부 출입은 철저히 막아뒀다.
“남부에서만 가능한 시설이라서.”
“아아…….”
“북부가 야외 온천으로 유명하다면, 남부는 유리 온천으로 유명하지. 유리 온천 자체를 남부 건축가가 지었는데, 남부 안에서도 단 세 곳뿐이거든. 여기가 그중 하나고.”
로렌디스가 왜 여기서 온천 이야기를 꺼냈는가 했더니, 확실히 북부에서는 보기 힘든 건축 양식이었다.
물론 북부에도 유리온실은 있다. 다만 그건 화단이나 꽃을 가꾸려고 지어 둔 건물이었다.
“어, 여기도 천장에 유리공예를 해 뒀네요?”
“그래서 유명하지.”
“헬렌가 소유 별장이라면, 누가 산 거예요?”
“아버지가 샀어. 나중에 은퇴하거든 여기서 살 거랬는데, 정작 장본인께서는 남동부에서 뭘 하고 계시는지 소식도 없군.”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온천물로 밀어 넣었다.
캐서린은 팔을 허우적대며 물속에 가라앉았다. 그녀가 소심하게 고개를 드는데, 로렌디스가 곧장 따라 들어왔다.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