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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122화 (122/129)

외전3

“허름한 곳이네요.”

한때 중앙귀족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이들의 터전이라는 게 오묘했다.

황후와 둘째 황자 세력이 밀려나면서, 소펜가도 중앙세력에서 밀려났다.

물론, 그 이유에 더불어서 야만족과 야합한 황후가 속한 가문이었기에 연좌제를 물은 탓도 컸다.

캐서린이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자,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로브를 눌러 씌웠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쯤, 낯선 사내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곳을 관리하는 관리인이자, 황실에서 파견 보낸 사자였다.

“여기입니다. 그런데 외부에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관리자가 캐서린을 소펜가로 안내했다.

“로렌디스.”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돌아보며 딱 한 가지를 부탁했다.

“셀레나와 둘이서만 대화하고 싶어요.”

“나는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잘 모르겠어.”

“부탁 들어줄 수 있어요?”

로렌디스가 파견 감시인을 돌아보더니 눈짓했다. 그러자 감시인이 난감하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다가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저 안쪽에 미리 안내를 받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용건이 셀레나에게 있는 것을 알고 미리 자리를 마련해 뒀다. 이건 그의 배려였다.

캐서린은 빈 창고를 발견했다. 감시인 몇몇이 창고 문을 지키고 있었다. 저기구나. 캐서린이 몇 걸음 다가서자 창고를 막고 섰던 이들이 길을 비켰다.

“비워 드리거라.”

감시인들이 제 상관의 이야기에 자리를 비웠다.

“소지품이나 그런 건 모두 확인했으니, 혼자서 대화 나눠도 괜찮을 겁니다. 다만 혹시 모르니까, 안에서 이야기가 시끄러워지는 듯 보이면 곧장 진입하겠습니다.”

캐서린은 고개만 작게 끄덕이고 창고 문을 열었다.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자 셀레나가 눈매를 구겼다.

솔직히 캐서린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평민으로 신분이 격하됐으니, 그 처우도 예전과는 다르겠지. 그런데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잘 지냈나요?”

캐서린이 먼저 안부 인사를 물었다. 셀레나가 캐서린을 보며 몸을 떨었다.

“당,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두려워할 거 없어요. 자리 비워 달라 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자리들 비웠겠죠.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요.”

캐서린은 맞은편으로 가서 셀레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허름한 창고더라니, 나무 의자가 삐거덕대며 흔들거렸다.

‘나도 그 짧은 사이에 헬렌의 풍요로운 환경에 적응한 모양이야.’

캐서린은 의자 팔걸이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운을 뗐다.

“남부에 일이 있어서 온 길에 얼굴 보려고 들렀어요.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

셀레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무릎에 올려놓았다. 불안해하는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째서일까요?”

캐서린은 그런 셀레나를 꼼꼼히 살폈다.

“내게 숨기는 게 있나요? 뭘까? 뭘까? 저 흔들리는 시선을 뭘 뜻할까요?”

셀레나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움찔하며 굳어 버린 근육이 지금 그녀의 처지를 말해 줬다.

“소펜가에는 큰 유감 없어요. 야만족과의 소동은 폐후께서 혼자서 벌인 일인 것도 잘 알고요.”

“아아……!”

“소펜가의 몰락은 황위계승권 다툼에서 밀려나고, 폐후의 일로 연좌제를 물었기 때문이에요.”

소펜가에서 둘째 황자를 지지하던 것도 사실이고, 폐후와 같은 길을 걷던 것도 사실이었다.

황위계승권 다툼에서 밀려난 가문은 좌천되는 게 맞다. 야만족 일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결국 중앙정계에서 밀려날 운명이었다.

“다만, 셀레나 양에게 궁금한 게 있어요.”

“……”

“내가 거의 잊었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거든요.”

야만족과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잊혔다. 드문드문 회상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그중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캐서린은 오래전에 묻어 뒀던 기억 하나를 꺼냈다.

“예전에요. 셀레나 양에게서 익숙한 꽃내음을 맡았거든요. 무슨 꽃내음인 줄 알겠……. 라고 물으려는데 표정 보니까 아는 모양이네요?”

“아니에요. 몰라요!”

캐서린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아는 모양이네요.”

캐서린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서 눈을 흘겨 떴다.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가 셀레나를 오롯이 응시했다.

“왜 그랬어요? 내가 셀레나 양에게 딱히 유감 살 일은 없었을 건데요.”

“나는 몰라요!”

“저도 그런 말이나 듣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랍니다.”

캐서린이 일어나서 창고를 나가려 들자, 셀레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흔들리는 시선이 그녀의 불안한 심경을 말해 줬다.

‘나도 너를 몰아붙일 생각까지는 없었건만.’

말 몇 마디에 이 정도로 무너져 내리면 어쩌자는 건가? 캐서린은 나무 의자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댔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셀레나 양? 내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요.”

캐서린은 빠르게 생각을 정정했다. 처음에는 적당히 타일러 보려 했는데, 지금 저 표정을 보니 타이르긴 글렀다. 본론이나 꺼내야겠다.

“사실은 그때 셀레나 양에게서 살사꽃 향을 맡았거든요. 딱히 타박하는 건 아니에요. 확인만 하자는 거죠. 애초에 죽지도 않았고, 이제는 내성이 생겨서 살사꽃을 꽃차로도 즐길 수 있거든요. 나름 향이 좋아요. 쌉싸름하고 달콤하죠.”

캐서린은 찻잔을 손끝으로 표현하며 눈웃음을 싱긋하며 지었다.

“이것도 그냥 꺼내 본 말이니, 무게감 느낄 것 없어요.”

지끈거리는 머리가 그나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저 반응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내가 죽기를 바랐어요?”

“아니야. 아니에요! 나, 나 그런 일까지 휘말릴 마음까지는 없었어요! 황후 폐하께서……! 아니, 선 황후, 아니……!”

“네. 알겠어요. 횡설수설할 것까지는 없었어요.”

캐서린은 깍지 꼈던 손가락을 풀고서 마저 덧붙였다.

“그래서, 확인은 했고요?”

“저는 황후 폐하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게 다였어요. 저도 그쪽을 죽일 마음은 일절 없었다고요! 진심이에요. 심술만 부리려 했어요. 잠깐 거동이나 이동이 힘들 정도만…….”

“그게 위해잖아요. 뭐가 또 위해겠어요?”

죽일 마음은 없었다. 단지, 조금만 심술을 부리려던 것뿐이다. 셀레나 입장은 대충이나마 이해했다.

“셀레나 양은 딱히 잘못한 거 없어요.”

“네?”

“셀레나 양에게 사람을 죽일 담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소펜가가 폐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캐서린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레나 양이 운이 없는 거죠.”

그리고 웃었다.

“그게 당신 운명이고요.”

캐서린은 조금도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다. 애초에 우리가 그럴 만한 인연도 아니고. 캐서린은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나도 확인하러 온 거예요. 셀레나 양이 가벼운 마음으로 확인했듯, 나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확인했으니 이만 가 볼게요.”

캐서린이 창고를 빠져나오는데, 셀레나가 캐서린의 드레스를 붙잡았다. 두 사람이 엉키듯 바닥에 쓰러지자 문밖에 있던 로렌디스가 눈살을 구겼다.

“캐서린.”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어깨를 붙잡아서 먼저 일으켜 세웠다.

“옷 구겨졌어.”

로렌디스는 심드렁한 손짓으로 캐서린의 옷자락을 만졌다. 바닥에 쓰러져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셀레나가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셀레나는 평민들이 입을 법한 헌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행색이 예전보다 더 초라했다. 그 초라한 꼴을 본인이 몰랐을 리 없다. 지금도 넋 나간 눈길이 흔들리고 있잖은가?

“나한테 왜 그래? 황후 폐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지요? 소펜가가 계승권 다툼에서 밀려난 것과 별개로 말이 안 되잖아요?”

셀레나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로렌디스 당신이 말해 봐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돼요! 폐후께서 야만족과…… 으읍! 놔라! 놔!”

야만족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감시인들이 나와서 셀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는다더라니 저렇게 막고 있었나?

“놔줘요.”

캐서린은 감시인 중 하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렇게 억지로 억누르면, 반발심만 더 생기죠. 왜 이런 처지가 됐는지 적당히 설명해 주면 될 일이에요.”

서늘한 한기가 퍼졌다. 여기가 북부가 아닌데도 주변 공기가 가라앉는 건 왜일까? 캐서린은 팔을 뻗어서 셀레나의 턱을 쥐었다.

“폐후와 야만족이 모종의 관계를 맺었는데, 셀레나 양은 그걸 믿지 못하겠다는 거죠? 그런데 어쩐다.”

“뭐, 뭐가요?”

“사실이거든요. 지금 이 현실에 큰 의미를 품지 말아요.”

우리가 그녀를 굳이 납득시킬 이유는 없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된다. 여기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다.

“야만족과 폐후가 결탁한 건 맞아요. 폐후께서 야만족과 같이 있던 모습을 직접 봤거든요. 이 이야기가 밖으로 퍼지면 제국이 시끄러워지니까 함구했을 뿐이죠.”

캐서린은 손아귀에 힘을 줘서 셀레나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소펜가는 운이 없었고.”

“……아아악!”

“휘말렸어요. 그뿐이에요.”

캐서린은 셀레나의 턱을 놓아주었다.

“더 볼 일 남았나요?”

셀레나는 캐서린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떨궜다.

“없는 것으로 알고 이만 가죠.”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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