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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121화 (121/129)

외전2

제도와 북부가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브레디는 그의 주군께 충언을 올렸다.

“이제 북부도 안정을 찾았으니, 주인마님을 모시고 잠깐 남부 휴양지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로렌디스는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두고 고개를 기울였다. 폐후의 일을 일단락짓고 밀려든 잔업이 수십 가지였다.

하나하나가 기밀사항이었고 외부로 노출되어선 안 된다고 일일이 직접 처리했더니,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좀 여유로워지지 않았습니까?”

“여유야 진작 찾았지.”

“네. 각하께서 잔업을 놓지 못했을 뿐이지요. 마님께서도 큰일을 겪었으니, 이참에 두 분이서 여행이라도 다녀오시길 권해 드립니다.”

브레디는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며 덧붙였다.

“또, 남부에 다녀오는 길에 황제 폐하를 찾아뵈어도 금상첨화이고요. 마침 폐하께서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폐하의 호출입니다.”

브레디는 익숙하게 황제의 서찰을 집무실 탁자에 내려놓았다. 테슬러가 이런 식으로 로렌디스를 호출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두 차례 전서구를 보냈는데, 이번에도 거절하면 제가 난감해집니다.”

로렌디스가 이미 바쁘다고 거절한 것도 무려 두 차례였다. 그래서 브레디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폐하께서 근위대를 보내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속 좁게 그러실 분은 아니시지.”

“그래도요. 너무 북부 안에서만 있으니, 제도에서는 진짜 북부에 큰 변고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잖습니까?”

“떠들다 말 놈들이다. 중앙귀족들 장단 맞춰 주는 건 더 질색이야.”

고민하던 브레디는 소심하게 항변했다.

“제 기억으로는, 각하께서는 누구와도 장단을 맞춰 주신 적 없습니다. 그렇다고 폐하의 비위를 맞춰 주었던 기억조차 없습니다.”

로렌디스는 고개를 들어 제 수하와 눈을 맞췄다. 얘가 미쳤나? 해석하자면 그런 시선이었다.

“이제는 할 말 다 하는군.”

로렌디스도 안다. 어수선했던 게 정리됐던 만큼, 이 시기를 완전히 매듭지을 때가 됐다.

“슬슬 제도에 다녀올 때가 됐지.”

북부도 안정을 되찾은 만큼, 두 주인 내외의 빈자리에 휘청거릴 때는 지났다. 그만큼 잠시 휴양지에 다녀와도 좋긴 한데…….

로렌디스의 고민이 길어지자, 브레디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번에도 거절의 뜻을 전할까요?”

“폐하께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말씀 올려라.”

브레디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참에 폐하께 안부 인사도 전해 드리고, 남부에 들려 주인마님과 안식이라도 취하십시오.”

“북부도 오랜만에 자리를 비울 듯싶으니 준비를 해 두고.”

“네. 각하.”

브레디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로렌디스도 얼추 이때쯤에는 제도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전대 가주님께서는 요즘 뭐 하십니까?”

“남동부로 떠나셨다. 상황 정리되자마자 곧장 휴양길로 오르는데 망설임도 없더군.”

브레디는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두 부자지간이 닮았다더라니 이런 것까지 닮았구나. 폐하께서 복장 터져 하시는 이유가 짐작은 된다.

“요즘 몸은 괜찮으시답니까?”

“데니스가 이야기하길 큰 이상은 없댔으니 괜찮겠지. 폐하께서 황실의료원 주치의를 보내서 진찰하기도 했고.”

물론 기력이 쇠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설원에서 오랜 시간 떠돈 만큼 한기가 쌓이고 또 쌓였다. 그만큼 몸이 약해졌다는 반증일 테지.

“아내도 한 번 데리고 다녀올 때 됐지.”

브레디는 공손히 머리를 수그렸다.

* * *

황궁은 올 때마다 새로웠다. 캐서린은 머리를 단정히 가다듬었다. 미리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시종장이 그들을 마중 나왔다.

“두 분 뵙기가 나날이 힘들어집니다.”

“북부에서 여기까지 나올 일이 뭐 있다고 자주 보겠나? 시종장이 그간 피곤한 일이 많았던 모양이군.”

로렌디스는 시종장의 안색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얼굴이 아주 핼쑥해졌어.”

시종장이 움찔거리더니 뺨을 더듬거렸다. 그래도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는데, 황제를 오랫동안 모신 측근다웠다. 옷을 가다듬은 그는 공손히 몸을 숙이며 길을 옆으로 비켰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일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장은 그들을 황실 중앙집무실로 이끌었다. 문을 열자 업무를 보던 테슬러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테슬러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소식을 듣긴 들었지만, 내 예상보다는 빨리 왔구나. 나는 두어 번은 더 불러야지 네놈이 나를 찾아줄 줄 알았다.”

“고생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테슬러는 예전보다 인상이 더 날카로워졌다. 날카로워진 안색에 피곤함이 깃들어서인지, 거대했던 존재감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그의 눈이 캐서린에게로 향했다.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로렌디스에게 듣길 이젠 괜찮다고 하던데 괜찮은 게 맞느냐?”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잘 나았습니다.”

테슬러는 집무실 탁자를 정돈하더니 맞은편에 앉으라며 소파를 턱짓했다. 대화는 주로 폐후와 관련된 일이었다.

“소펜가는 작위를 회수하고 변방으로 추방했다. 물론, 그쪽에서도 폐후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반발해 왔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말이다.”

소펜가 소식이 들린 건 아주 잠시였다. 그 뒤로는 어디서 뭘 하는지조차 듣기 힘들었다. 정보는 극단적으로 차단됐다. 황실의 솜씨 같았다.

‘이 일을 완전히 묻겠다는 황실의 의지.’

테슬러는 말을 끝맺고 캐서린을 빤히 응시했다. 캐서린은 거기서 로렌디스와 닮은 무언가를 느꼈다.

“그대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것 또한 황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내 죄이다.”

“아닙니다. 누가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 미리 짐작했겠습니까?”

테슬러는 잠시 멈칫하더니 표정을 말끔하게 갈무리했다. 큰 감정변화 없이 대꾸하는 게 노련했다. 그런데 희게 센 머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캐서린은 거기에 시선을 잠시 줬다 금방 거둬 냈다.

“남부에 다녀온다더니 어디로 가 볼 생각이냐?”

“남서부에 별장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잠시 쉬고 올 생각입니다.”

“그쪽이면 지나는 길에 보게 되겠구나. 그래. 알았다. 긴 시간 빼앗을 마음도 없으니 이만 가 봐라.”

테슬러는 말을 짧게 일축하고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얼굴 보여 달라고 몇 번 부르더니, 또 잘 지내는 것 확인했으니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휴가 잘 보내고 오너라. 네가 야만족 일 외에 북부를 비우는 건 실로 오랜만인 듯하니까.”

캐서린은 황궁을 빠져나오며 웅장한 성문을 돌아봤다. 올 때마다 다채로운 일을 겪는 것 같다.

로렌디스는 맞은편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한가? 하긴 요즘 바빠 보이긴 하더라니.

캐서린은 마차 안을 두리번거리다 의자 한쪽에 올려둔 담요를 발견했다. 때마침 담요를 챙겨 주려는데, 로렌디스가 눈을 떴다.

“왜?”

로렌디스는 캐서린과 담요를 번갈아 보더니 괜한 짓을 한다며 혀를 찼다.

“너 덮으라고 하녀가 챙겨 준 걸 내게 덮어 주면, 내가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것 같잖아.”

“누가 당신한테 그런 말을 하겠어요.”

로렌디스가 담요를 보더니 캐서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캐서린은 맞닿는 어깨를 흘끔거리다 작게 웃었다.

긴 머리가 흘러내려서 반대쪽으로 빗어 내리는데, 로렌디스가 목덜미 뒤로 손을 뻗더니 대신 정돈해 주었다.

“그런데 조금 전 나눴던 이야기는 뭐예요?”

“뭐가?”

“남서부 지나는 길에 보게 되겠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셔서요. 로렌디스는 이미 아는 눈치라서 거기서 안 여쭤본 건데…….”

로렌디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작위를 몰수당한 소펜가가 남서부로 추방됐거든. 별장으로 가는 길목에 격리된 터가 있는데, 지나가는 길에 마주칠 수도 있지 싶어서.”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한 번 돌아보더니 아차 싶었는지 덧붙였다.

“굳이 직접 들를 것도 없어서 별장으로 바로 가도 돼.”

고민하던 캐서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일이 일단락됐으니 괜찮다.

소펜가는 남서부에서 황실에서 지정한 영역에 격리됐다. 그 영역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며, 황실에서 파견한 감시인들이 일대를 꾸준히 감시하는 중이었다. 그 영역이 어디인지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지만, 마주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셀레나 양과 할 이야기도 있어요.”

“굳이?”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거든요.”

굳이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한 번은 확인하고 싶다. 로렌디스는 그러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어차피 지나는 길이니까 들르면 될 일이지.”

로렌디스는 별일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 말이라는 건 뭔데?”

“저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건 아니에요.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이에요.”

엇나갔던 미래가 바로 잡혔다는 것.

그것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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