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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120화 (외전) (120/129)

외전1

아무도 없는 빈 광장에 침묵이 앉았다. 로렌디스는 석상에 몸을 기대고 독주와 술잔을 내려놨다. 술잔을 따르는 손짓은 군더더기 없었고, 독주를 내려놓자 알싸한 술내음이 퍼졌다.

“지겹다 했더니 정말 그렇게 갔군.”

놈이 여기 있었으면 이리 답했을 거다. 지겨운 놈 얼굴 봐서 뭐 좋을 거 있다고 여기 동상까지 세웠느냐고.

“네놈 얼굴도 보기 싫은 적이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로렌디스는 석상에 앉은 먼지를 닦아 냈다.

예전에는 어땠던가? 이놈이 어떤 놈이더라.

솔직히 큰 인상이랄 것도 없었다. 이놈은 제 존재감을 야만인들 속에 숨기고 지냈으니까 더 그랬다.

“여기에 동상을 세운 이래로,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찾는 분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브레디가 묻는 말에 로렌디스는 눈을 감았다.

“내가 못난 놈 얼굴 한 번 더 본다는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그건 아니지만요. 각하, 무슨 말씀을 그리도 살벌하게 하십니까?”

브레디는 억울하다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으로 이야기 꺼냈다가 호되게 혼날 뻔했다.

“시일이 얼마나 지났지?”

“북부가 안정기로 접어든 지 두 달쯤 지났습니다. 영지 내부 어수선한 분위기도 거의 잡혔습니다.”

그 부분은 근래의 북부 분위기만 찬찬히 살펴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시금 평화로워진 북부는 고요하다 못해 권태로웠다.

시시때때로 설원에서 내려와서 귀찮게 굴던 야만인들도 없어졌고, 제국에서 폐후 세력이 갈려 나가면서 북부는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다.

“이만 가지.”

“돌아가십니까?”

로렌디스는 옷을 추슬러 일어났다. 브레디가 옅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성으로 돌아간다.”

늦은 새벽이라고 행인들은 모두 집으로들 갔다. 로렌디스는 일대를 한 번 둘러보고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성도 사용인들은 모두 잠든 지 오래였다. 그는 코트를 벗어서 보좌관에게 건네고 침실로 올라갔다.

침실 문이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이 시간이면 아직 잘 때인데, 왜 여기가 열려 있지? 로렌디스는 문고리를 밀었다. 그러자 텅 빈 침실이 그를 반겼다.

“뭐야, 이 시간에 어디를 간 거야?”

로렌디스는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나왔다.

“거기 아무도 없나?”

“네, 주인님!”

옆방에 있던 하녀가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잠결에 졸다 나왔는지 몽롱한 얼굴에 넋이 나가 있었다.

“부르셨어요, 주인님?”

“아내가 안 보이는데 어디 나갔나?”

“어어, 잠시만요. 안 계시나요? 제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이 시간에 혼자 간 거면, 사용인을 깨우기 싫어서 혼자 움직인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로렌디스는 됐다며 하녀를 물렸다. 혼자서 복도를 걷고 있자니 왠지 캐서린이 ‘거기’에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요즘 캐서린은 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담요로 어깨를 감싸고 창밖을 내다보는데, 창턱에 몸을 기대서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모습이 묘하게 시선을 이끌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어? 외성에 다녀오신 거 아니었어요?”

“거기는 진작 다녀왔지.”

캐서린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당신 나가는 소리에 깼거든요. 잠시 뒤척이다가 잠이 크게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복도에서 바람 좀 쐤어요.”

그도 그럴 게 복도 창문이 열려 있었다. 로렌디스는 그걸 닫는 대신에 맞은편에 똑같이 기댔다. 쌀쌀한 바람이 고스란히 불어닥치는데도, 저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다.

“여기 있으면 사람들 다니는 거 다 보이는데 알아요?”

“성 정문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보이기야 하겠지.”

“저번에 여기서 아빠랑 눈이 마주쳤거든요. 마주 보면서 손을 흔드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하는 거요.”

“뜬금없긴.”

“뜬금없더라도요. 손을 흔들던 그대로 멈춰 버린 것 있죠? 이전 시간과는 다른 무형의 괴리감이 있어요.”

격렬하게 무언가 끓어오르다 다시 잠잠해졌다.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서 손으로 잡지는 못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무언가를 느낄 수는 있었다.

로렌디스는 그녀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목덜미를 두 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이자, 캐서린도 익숙하게 눈을 감았다.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속눈썹이 길게 뻗었다. 그녀는 손가락도 길쭉했는데, 하나하나 세세히 뜯어보면 모든 게 그녀다웠다. 가녀리지만 올곧다.

그는 입술을 그대로 머금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물고 핥았다. 말랑말랑한 입술을 깨물고, 혀로 어르고 달랬다.

로렌디스는 파르르 떨리는 숨을 한입에 다 삼켰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감겼다. 긴 금발을 꼬아서 쥐자, 그녀가 야트막하게 앓으며 목을 젖혔다. 그는 팔을 내려서 얄상한 허리를 한 줌에 쥐었다.

“아파?”

“그건 아니고.”

“나는 네가 앓는 소리가 좋더라. 왠지 괴롭히고 싶어져. 사람이 우는 모습이 취향인 건……. 나도 생각해 보지 못한 영역이었어.”

캐서린은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이야기가 어딨냐며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데, 그 힘이 워낙 미약해서 고양이 앞발로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것 같았다.

그런 힘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가까이 놔두고 품든 해야지.

그는 캐서린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침실로 걸어갔다.

“밤중에 나오는 건 상관 않겠는데 하녀에게는 이야기하고 나와. 내가 자리에 없으면 더더욱.”

침실에 눕히고 몸을 겹치는데, 캐서린이 미약한 몸짓으로 슬금슬금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이미 한 번 했잖아요.”

“그래도 깨어 있잖아.”

“이렇게 계속하면 하루 일과가 힘들어요. 나는 당신처럼 몸을 무쇠로 만든 게 아니에요.”

항변하듯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소심하게 묻혔다. 그는 긴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로렌디스는 굵은 손가락을 내려서 쇄골을 더듬거렸다. 도드라진 빗장뼈와 움푹 파인 골짜기를 지나서 봉긋한 언덕에 닿자, 캐서린이 흔들거리던 시선을 맞춰 왔다.

* * *

이따금 막연한 괴리감이 넘실대며, 그녀를 덮쳐올 때가 있었다. 무언가 강렬하게 휩쓸고 지나갔는데, 막상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현실을 놓고 보니 더 그랬다.

‘마님, 여기 자주 계시네요?’

‘사람들 지나다니는 게 잘 보이거든.’

‘감기 걸리시니 담요라도 꼼꼼히 덮고 계세요.’

넨시는 이런 캐서린을 놓고 뜬금없다며 웃어 주었다. 캐서린은 침대 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로렌디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시트에 몸을 눕히자, 로렌디스가 느릿하게 살결을 어루만졌다.

굵은 손아귀가 허벅지를 더듬거리며 감쌌다. 허벅지 안쪽에 닿은 손이 미끄러지듯 침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얇고 짧은 침의는 안 입느니만 못했다. 손짓 하나로 고스란히 몸을 내어 주게 됐다. 캐서린은 입술을 약하게 깨물고 숨을 삼켰다.

“데니스 교수가 그러길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던데, 내 눈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여.”

데니스는 이미 그녀에게 완치 판정을 내렸다. 너무 빠른 회복에 당황한 건 데니스였다. 캐서린은 오히려 살사초를 먹기 전보다도 더 건강해졌다.

이젠 괜찮다는 데니스 교수의 이야기에도, 로렌디스는 이따금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직도 걱정하는 거겠지.

캐서린이 약하게 반박하려는데 로렌디스의 손이 허벅지 사이를 벌리고 들어왔다.

“로렌디스 천천히요.”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는데, 다리 사이가 움츠러들었다. 로렌디스는 허벅지 안쪽을 손아귀로 눌러서 자리 잡았다.

더운 입김이 아래를 간질였다. 아래가 천천히 젖어 들었다. 아랫배에 익숙한 긴장감이 퍼졌다. 척척하게 젖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하윽!”

캐서린은 목을 빳빳하게 젖히며 베개를 움켜쥐었다. 눈물이 맺혀서 소리 없이 흘렀다. 저릿한 쾌감이 아랫배 깊숙하게 퍼졌다. 밤새도록 시달렸던 내벽이 반응하듯 왈칵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조여들었다.

“아윽, 로, 렌디스…….”

격한 쾌감에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예민한 살점이 꼿꼿하게 서고, 캐서린은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러고 얼마간 시달렸다.

얼마나 시달렸던가?

그녀는 의식을 놓고 밀려드는 감각에 허우적거렸다. 해가 뜰 무렵에야 캐서린은 침대에서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또다시 날이 밝았다. 그녀가 몸을 느릿하게 일으키는데, 로렌디스가 곁에서 그녀를 염려했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지.”

캐서린은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그게 그쪽 입에서 나올 이야기예요?

“제임스 박사가 신신당부해 놓고 휴가지로 떠났잖아. 정상적인 아가씨가 아니라고 눈 크게 뜨고 감시하라고.”

이 부분은 캐서린도 억울했다.

제임스는 짐가방 챙겨서 휴가지로 떠나면서, 불안했는지 진료동의 이곳저곳에 관여했다.

‘이 자식들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이 돌머리들아! 네놈들 머리는 새대가리야! 이 자식들은 가르쳐도 새대가리라서 다 잊나! 이런 놈을 뭘 믿고 맡기냐? 아이고, 아이고! 그냥 아프면 앓고 죽어야지.’

캐서린은 기억을 떠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진료동에서 한동안 곡소리가 들렸는데, 데니스가 주섬주섬 찾아와서 저놈 좀 말려 달라 호소할 정도였다.

“더 자 둬.”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침대에 도로 눕혀 두고 방을 나섰다.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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