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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19)화 (119/129)

119.

캐서린은 먼 허공을 올려다봤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로브를 더 깊게 씌웠다. 저녁이어서일까. 밤거리에 조명이 드문드문 들어왔다.

“잠깐 걸어도 돼요?”

캐서린이 묻는 이야기에 로렌디스가 그러자며 답했다. 수행 인원들은 최소한으로 따라붙었다.

그들은 방해되지 않는 거리에서 주인 내외를 엄호했다. 캐서린은 가로등 조명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저절로 빛이 들어왔다. 거기서 우두커니 서서 걸음을 멈추는데, 입안에 씁쓸한 미소가 감겼다.

“모두들 잠깐 왔다 떠나간 기분이네요.”

캐서린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랬나?”

“네. 우리야 어차피 여기에 남을 거라서 남는다지만, 제 아버지나 선대 공작님도 지금은 여기 안 계시니까요.”

“찾으면 오실 분들이잖아.”

“찾아야지 볼 수 있잖아요.”

그래도 같이 있다는 게 어딘가 싶다. 캐서린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걸었다. 걷는 길을 따라서 조명이 차례차례 켜졌다. 어느샌가 거리가 환해졌다. 로렌디스는 거리를 걷다 말고 선술집 앞에서 멈춰 섰다.

“익숙한 얼굴이군.”

캐서린도 로렌디스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선술집 앞에 앉아 있었다. 제임스가 발가락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밀어내며 씩씩대고 있었다.

“왜 남의 술통을 탐내! 네놈 저리 꺼지지 못해!”

버럭버럭 내지르는 소리를 보니까 이미 한껏 취했다. 캐서린은 이마를 짚으며 신음했다. 최근에 제자도 하나 들여놓지 않았나? 괴팍했던 성격이 조금 변한 줄 알았더니…….

“한결같구나.”

제임스는 술통을 안전하게 사수하고서야 툴툴대며 마저 술을 마셨다. 제임스도 기척을 느꼈는지 빠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캐서린을 발견하고 눈을 번쩍 떴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해?”

제임스는 뒤늦게 로렌디스를 발견하고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제임스는 그런 와중에도 술통을 바삐 비웠다. 그는 술통 하나를 통째로 다 비우고, 두 번째 술통을 비우는 중이었다.

“……제임스, 여기서 혼자 뭐 해?”

“몰라. 제자 놈 눈치 보여서 거기서 술도 못 먹잖아.”

“의외로 눈치라는 걸 보기는 보는구나.”

“술병을 꺼내면 쪼르르 따라와서 머리부터 들이미는데, 내가 애 앞에서 술병을 무슨 수로 따겠어.”

제임스는 크게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맞은편을 턱짓했다. 그러자 로렌디스가 자연스럽게 제임스 앞에 앉았다.

수행인으로 따라온 이들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인파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자, 누구도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 한동안 진료동 비울 거야.”

제임스가 선수 치듯 이야기했다.

“휴가비 주십시오.”

제임스는 로렌디스에게 손을 뻗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건들거리는 자세가 ‘내가 이래도 네가 어쩔 건데?’라는 쪽에 가까웠다. 로렌디스는 눈매를 좁히더니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퇴직금은 아니고?”

“아니, 왜 자꾸만 내쫓으려고 드십니까?”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갑자기 휴가비를 달라니까 그러지. 휴가비 정도야 줄 테니까 내 보좌관에게 이야기해. 알아서 넉넉하게 챙겨 줄 거야.”

제임스는 휴가비를 챙겨 준다는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본인도 일단 한 번 내질러 본 것 같은데, 얼떨결에 통해서 더 놀란 것 같다. 로렌디스는 술병을 비우고 비스듬하게 턱을 괬다.

캐서린은 그 둘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둘은 언제 이 정도로 가까워졌을까.

‘가까워진 건 맞나?’

제임스는 그간 고생한 만큼 휴가비를 뜯어내겠다며 투덜거렸다. 그런 제임스를 편안하게 바라보는 로렌디스를 보니까, 이 둘도 심적으로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

로렌디스가 지난 일로 캐서린의 안위에 민감해진 부분도 있었고, 제임스도 원래 사람들과 허울 없이 지내는 편이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가 쥔 술병을 가져와서 향을 맡았다. 저번에 만찬장에서 먹었던 맥주라는 것과 비슷했다.

캐서린이 술병을 가지고 가서 혀끝으로 슬쩍 맛을 보자, 로렌디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임스는 떨떠름하게 주인 내외의 모습을 바라봤다.

캐서린은 제임스의 관심을 돌렸다.

“어디 다녀오려고?”

제임스가 시큰둥하게 턱을 괴고 답했다.

“헬렌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어. 남부랑 북부에 있었으니, 이제는 동부로 가 보려고.”

“얼마나 떠나 있으려고?”

“휴가비 적당히 다 써먹는 동안. 그러니까 적당히 많이 챙겨 주십시오. 제자 놈은 제가 데려갈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어깨에 기대앉았다. 특별한 대화를 나눈 건 아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멀거니 하늘만 올려다봤다. 앞에서는 제임스가 술잔을 홀짝거리고, 로렌디스는 그런 제임스와 드문드문 말동무를 해 줬다.

“내 자리 빼놓지 마십시오. 휴가비만 딱 쓰고 올 거니까 기다리십시오!”

“네 녀석 뜻대로 해.”

“저는 일단 노후 자금까지 확실히 받을 때까지는 진료동에 앉아 있을 겁니다.”

캐서린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고개를 젖히고 숨을 내쉬는데 졸음기가 쏟아졌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될 것 같은데……. 머릿속은 이미 몽롱해진 뒤였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감싸 안았다.

잠결에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우리는 이만 일어나야겠군.”

제임스는 툴툴대며 작별을 고했다.

“아무튼 잘 지내십시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도 겪었으니, 헬렌의 앞날을 기도하겠습니다.”

* * *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캐서린은 익숙한 체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목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자, 로렌디스가 걷던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깼나?”

캐서린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고쳐 업고 걸음을 다시 옮겼다.

힘없이 늘어진 몸이 무거울 법도 한데, 로렌디스는 불평 한 번 없이 고요히 걸었다. 캐서린은 그의 목을 다시금 감싸 안았다.

“처음에 왔을 때요.”

“……그래.”

“죽으러 오는 줄 알았어요.”

여기가 곧 내 무덤이 되겠구나. 스스로 죽을 자리를 향해서 걸어간다는 게 이런 마음일까. 그런 마음으로 헬렌에 발을 디뎠다. 북부는 아름답지만 추웠고, 매혹적이지만 삭막했다.

“저번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냥요, 내 마음이 그랬다고요.”

로렌디스가 한 번 더 캐서린을 고쳐 업었다. 캐서린은 작게 웃으며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캐서린은 그의 목덜미를 가만히 보다가 입술로 머금었다. 로렌디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뭐 해.”

캐서린은 ‘그냥’이라고 중얼거리며 답을 피했다. 그의 목덜미를 치아로 깨물었다. 살갗에 밴 체향이 익숙했다. 업힌 몸이 흔들렸다.

로렌디스가 걸음을 멈추고 눈매를 좁히더니 그만하라고 작게 속삭였다. 캐서린은 모르는 척 다시 고개를 묻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남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이러고 싶었다.

로렌디스는 시큰둥하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캐서린은 또다시 잠들었고, 다시금 깼을 때는 로렌디스가 외출복을 침의로 갈아입히고 있었다. 캐서린은 몸을 들어서 그가 갈아입히기 좋게 자세를 바꿨다.

“다리 들어 줘.”

로렌디스는 익숙하게 침의로 갈아입히고, 머리를 정돈해서 눕혔다. 침대 옆에서 나른한 온기가 퍼졌다. 캐서린은 온기를 되짚으며 그쪽으로 돌아누웠다. 로렌디스가 옆에 누워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밀던가에서 전서구를 보냈어.”

“으응.”

“잘 지내신대. 집 정리만 끝내 두고, 며칠 뒤에 다시 헬렌으로 오시겠대.”

캐서린은 잠결에 눈을 다시 떴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잘 들렸다. 그녀가 웅크렸던 몸을 사부작거리며 신음하자, 로렌디스가 이부자리를 다시 살폈다. 캐서린은 이불 시트를 더듬거리며 눈을 떴다.

“선대 공작님은요?”

“아버지께서는 폐하 만나시고 타운하우스에서 적당히 쉬고 계셔. 조만간 헬렌으로 다시 오실 거야. 작위는 나한테 맡기고, 본인은 여생을 편히 쉬면서 보낸다는데, 나도 그러라고 했고. 휴양지에서 쉬고 싶다는데, 아버지께서도 많이 늙었지.”

공작위도 계승했고 영지는 아들이 이어받았으니까, 본인은 거기에 남을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지극히 헬렌다운 선택이었다.

본인이 책무를 다해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한다. 본인이 자리를 지켜야 할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때가 지나서 비켜야 할 때면, 미련 없이 비킨다. 그게 헬렌이었다.

“추운 곳에 오래 있었으니, 따뜻한 곳에서 쉬고 싶겠죠.”

캐서린이 잠결에 뒤척이자, 로렌디스가 편안하게 자세를 고쳐 주었다.

“조만간 두 분 다 헬렌으로 온다니까, 두 분 모시고 식사나 한번 하자.”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대신했다.

졸음이 쏟아진다. 몸이 그만큼 많이 피곤해서일까. 다독이는 손이 편해서일까. 까무룩 잠기는 의식 속에서 편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느릿하게 머리를 정돈해 주는 손짓이 다정했다. 캐서린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다음 달.

떠나갈 이들은 떠났고, 돌아올 이들은 돌아왔다. 외성에는 긴 은발을 가진 사내의 동상이 세워졌다. 동상의 사내가 누구인지는 비밀리에 붙여졌다.

늦은 밤이면 동상 앞에 독주 한 병과 잔 하나를 가져다 놓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인지 또한 비밀리에 관리됐다.

헬렌은 고요했다. 그런 헬렌이 다시 시끄러워진 건 후계자 소식이 들려오면서였다. 두 주인내외를 반반 닮은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는 훗날 북부의 수장이 됐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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