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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17)화 (117/129)

117.

로렌디스는 말을 급히 몰아서 헬렌으로 복귀했다. 그는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북부의 찬 공기를 온몸으로 맞았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래도, 뺨을 할퀴는 찬바람 덕분에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다. 로렌디스는 군마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곧장 달렸다. 로렌디스의 군마를 알아본 경비대가 크게 외쳤다.

“각하이시다. 문을 열어라!”

경비대의 외침에 외성 성문이 빠르게 열렸다.

“급히도 가시는구나.”

“성문은 계속 열어두어라. 기사단 일원들도 도착하는 게 드문드문 보이는구나.”

해는 뜨기도 전이었다. 로렌디스는 내성까지 빠르게 내달렸다. 희뿌연 먼지가 일며 멈춰 섰을 때, 로렌디스와 동행했던 기사단 몇몇은 낙오된 지 오래였다. 로렌디스가 군마에서 내리자, 인기척을 느낀 집사가 성에서 나왔다.

“오늘 오후 늦게야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일찍 오셨습니다.”

“자리를 오래 비워 두기에는 집안에 나를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유일하게 깨어서 로렌디스를 맞이한 집사 오스틴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마님께서는 침실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로렌디스는 오스틴의 이야기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빈 복도를 지나서 침실 문을 여는데, 후끈한 열기가 몸을 뒤덮었다. 로렌디스가 침대로 다가가서 캐노피를 들추자, 아내가 빛에 반응하듯 몸을 웅크리며 피했다.

“…….”

캐서린은 똑바로 누웠던 자세를 몇 번이고 바꾸더니, 로렌디스 쪽을 보며 돌아누웠다. 로렌디스는 침대맡에 앉아서 그런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캐서린.”

작게 부르는 이름에 반응하듯, 캐서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식이 몽롱했는지, 깜빡거리는 눈동자에 졸음기가 가득했다.

“일어나.”

“조금만 더.”

“아침에 아버지 모시고 식사하기로 했잖아. 그 모습으로 가려고 그러나?”

캐서린은 그제야 눈을 떴다. 잠을 깨려고 고개를 젓는데, 머리칼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로렌디스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정돈해 주고, 캐서린의 허리에 손을 넣었다. 캐서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해요.”

씻자고. 짧게 답하는데 캐서린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익숙한 체향이 코밑을 스쳤다. 로렌디스는 숨을 깊게 마시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간지러워요.”

그냥 참아 봐. 하고 침의를 벗겨 욕조에 담갔다. 로렌디스도 외출복을 벗었다. 셔츠와 옷가지를 벗고 아내의 몸을 끌어안았다.

헐벗은 몸을 내려다보는데, 지난 일로 생긴 흉터가 눈에 밟혔다. 로렌디스는 그 흉터를 손으로 쓸었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그날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로렌디스가 흉터를 손으로 쓸자, 캐서린은 어깨를 웅크렸다.

“……왜요?”

이 흉터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거다. 나이가 들고 늙어서도 지워지지 않고, 이 가슴에 가지고 살아가겠지. 로렌디스는 흉터를 입안에 머금었다. 봉긋한 언덕을 따라서 혀로 쓸었다.

캐서린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목욕물이 첨벙거리고, 가슴에 닿은 손길은 노골적이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검은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겼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다독이는데, 봉긋한 언덕에 입술이 닿았다.

로렌디스가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당겼다. 캐서린은 움찔하며 몸을 빼려다가 좀 더 깊게 몸을 기댔다.

“지금은 괜찮아요.”

“흉터가 생겼잖아.”

“옷으로 어차피 가려지는 곳이잖아요.”

지금도 로렌디스는 가슴 둔덕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계속 혀로 둔덕을 쓸고 입안에 머금었다.

상처는 다 아물었다. 남은 건 흉터가 다였다. 그는 그 흔적을 따라서 살갗을 혀로 핥았다. 뭉툭한 혀가 가슴 둔덕을 핥았다. 캐서린이 긴장감에 몸을 웅크리는데, 로렌디스가 고개를 파묻고 시선만 들었다.

* * *

간신히 되찾은 일상이었다. 크게 바뀐 건 없다. 떠나간 이들은 떠났고, 남은 이들은 남았다. 그리고, 그들도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북부의 추위를 견디기엔 몸이 허약해 보이는데, 보약이라도 먹이고 있는 거냐?”

로렌디스에게 이 정도로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 그간 있었던가. 캐서린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로렌디스와 로테린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만간 먹이겠습니다.”

“네 사람은 네가 꼼꼼히 챙겨야지. 저런 허약한 몸으로 북부에서 병이라도 들었다간 어쩌려고 그러냐?”

로렌디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야만족과의 일이 끝나서 이제는 헬렌의 기사단도 여유로워졌구나.”

“몇몇은 지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일평생을 전장에서 싸우던 몸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유를 마냥 즐기기만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전쟁이 끝난 뒤의 평화는 낯선 이질감을 가져다줬다. 설원에서 칼을 들고 싸우던 이들이다. 이제부터는 남은 시간 동안 뭘 해야 할지, 스스로들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아버지는 어쩌실 겁니까?”

“몸이 나으면 폐하부터 찾아뵈어야지.”

“네. 폐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제도도 어수선할 건데, 제도는 괜찮더냐?”

“일반인들은 모릅니다. 극비리에 모두 묻었습니다.”

황실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권세가 귀족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 알았다. 그만큼 비밀리에 묻었으며 서둘러 처리했다.

시신 하나 없는 폐후의 무덤을 만들 때부터, 야만족과의 일은 암묵적으로 침묵하기로 결정 난 거였다.

“폐하께 다녀오면 어디 따뜻한 곳으로 요양이라도 다녀와야지.”

“젊어서부터 어디 따뜻한 곳으로 떠나서 지내는 게 소원이시라더니, 돌아오시자마자 요양지부터 찾는 겁니까?”

“늙었더니 찬 공기를 쐬면 무릎이 욱신거린다. 요양지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다, 한 번씩 네 생각나면 올라올 테니 서운해 마라.”

캐서린은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처음에는 캐서린도 1년간의 결혼생활이 끝나면, 적당한 요양지를 찾아서 떠날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게 달라졌다.

짧은 시한부 인생이었는데, 지금 여기에 앉아서 숨을 쉰다는 것부터가 예전과는 달랐다.

“아버지는 어쩌고 싶어요?”

캐서린이 타일로에게 조심히 묻는데, 타일로가 식기를 내려놓고 답했다.

“나도 일단 밀던가로 갈 생각이다.”

“밀던가로 간다고요?”

“그래. 집을 계속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느냐?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 집이 어떤지도 직접 살펴봐야지.”

“그래도 조금 더 천천히 몸을 회복하고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캐서린이 밀던가를 비우면서, 저택은 지금 빈집이 됐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헬렌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다시 사람 사는 집답게 꾸미려면 시간도 많이 들 건데……. 캐서린이 조심스럽게 되묻자, 타일로는 미안하지만 그게 맞다며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결혼해서 정착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거로 됐다. 여기에 오래 머무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아.”

“그래도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로렌디스도 한 번 더 머물기를 권유했다. 설원에서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몸도 성치 않은데 괜히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자작, 조금 더 머물러도 돼.”

“각하까지 왜 그러십니까? 곧장 떠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충분히 쉬었으니 조만간 밀던가에도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타일로는 실망한 것 같은 딸아이를 달래며 이야기했다.

“어차피 내가 갈 곳이고, 네가 올 곳이잖느냐? 계속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내가 거기 있어야, 네가 때때로 집이 생각날 때면 찾아올 게 아니냐?”

이제는 다 자랐지만, 아버지께는 여전히 아이 같은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조곤조곤하고 상냥했다. 그런데, 그게 기분 나쁘거나 섭섭하진 않다. 캐서린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못 볼 것도 아니니까.’

밀던가로 가면 다시 볼 수 있으니까 괜찮다. 캐서린이 은은히 웃어 주자, 타일로도 마음을 놓았다.

“며칠 더 머물다 갈 거니까 아쉬워 말아라.”

두 부녀지간의 대화는 서로가 서로를 달래는 쪽에 가까웠다.

“그나저나, 네가 결혼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로테린은 잊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기억하는 제 아들놈은 제 소꿉친구에게도 잘 웃어 주는 법이 없던 매정한 놈이었다.

주변 친우들과도 잘 섞이지 않던 녀석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정착까지 했다는 게 놀라웠다.

“폐하께서 독촉했습니다.”

“형님께서 말이냐?”

“네. 후계 하나 없이 전장만 떠도는 게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혼인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설원에 발도 디딜 생각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에 올렸습니다.”

로테린은 캐서린을 흘끔거리며 이야기했다.

“너, 그래도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냐?”

“그런 사정이 있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후계는 혹시…….”

로테린은 캐서린이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걸 보며 급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미뤘습니다.”

타일로는 이 이야기에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캐서린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타일로를 조곤조곤 달랬다.

“지금은 충분히 괜찮아졌어요.”

몸은 충분히 회복됐다. 후계라 미루고 미루던 이야기라서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지금부터는 또 고민해 봐야 할 영역이었다.

“좋은 소식 있거든 나중에 들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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