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흰 설원에 눈보라가 일었다. 시야 너머로 누군가 서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윤곽만 보였다.
말이 경기를 일으키며 달아났다. 로브 자락은 바람에 날렸고, 모자가 벗겨졌다. 긴 금발이 휘날리며 엉켜 들었다.
“눈 뜨지 마.”
로렌디스가 캐서린에게 경고하듯 속삭였다. 눈을 가늘게 뜨자 희뿌연 먼지가 들어갔다. 로렌디스가 그럴 줄 알았다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잠깐 봤던 설원은 엉망이었다. 눈이 무너져 내리고, 그곳에 있던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커다란 몸이 캐서린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그런데, 로렌디스도 이미 느꼈을 거다.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아.’
이 설원은 무너져 내리는 순간까지도 헬렌의 기사단을 보호한다. 땅이 갈라지는 순간에도, 눈사태가 헬렌의 기사단까지 닿지 못했다. 마치, 설원에 남은 의지가 그들을 보호하는 것 같았다.
- 잘 지내라.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 즐거웠다.
캐서린은 목소리에 반응하듯 눈을 떴다. 이건 본능이었다. 지금 눈을 뜨지 못한다면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로렌디스의 손목을 붙잡아서 끌어 내렸다. 그리고 거칠게 이는 눈보라 속에서 저 멀리 있는 윤곽을 찾아냈다.
- 작별 인사는 됐다. 네놈들 보기도 이제는 지겨워졌어.
목소리는 귓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또렷하게 들렸다.
- 북부는 걱정하지 말아라. 뒤를 부탁한다. 모두 끝났으니 나도 떠난다.
지각이 크게 한 번 더 울렸다. 캐서린은 뎐트의 윤곽 옆으로 또 다른 윤곽을 봤다. 익숙하다. 갑옷을 입은 실루엣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혼령 같았다. 검을 갈무리한 ‘그’는 뒷짐을 지고 뎐트의 뒤에 서 있었다.
마중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길었다. 이만 가자.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뎐트가 고개를 돌리더니 ‘네놈은 왜 아직도 여기 있느냐?’라고 되묻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마중 나왔다고 답했다.
지각판이 맞물렸다. 거대한 굉음이 이어지고, 뿌리째 뽑힌 나무가 다시금 자리를 찾아가듯 똑바로 섰다.
지각이 흔들렸다. 무언가 무너져 내리고 눈앞의 눈보라는 점점 흐릿해졌다. 캐서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 일대는 고요했다. 마치 모든 게 끝났다는 듯 잠잠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캐서린은 빈 설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응. 괜찮아.”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갑자기 왔다 갑자기 떠나는 것까지 한결같군.”
끝까지 그놈답다며 읊조리는 목소리가 낮았다. 로렌디스는 직감했다. 설원과 북부에 감돌던 긴장감이 서서히 가셨다.
설원의 동산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았고, 갈라졌던 땅도 복구됐다. 땅속에서부터 울리던 옅은 진동도 끝났다. 지각판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뒤틀린 지각판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건 알겠다.
“말은 도망갔어요.”
“그럼 걸어 내려가야겠네.”
로렌디스는 실없는 농담이라도 이야기하듯 가볍게 답했다. 캐서린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슬러 힘겹게 일으켰다.
설원은 고요했다. 떨리던 진동도 멎었고, 누군가의 흔적 또한 사라졌다.
* * *
도망간 말은 인근에서 쉬고 있었다. 로렌디스가 말의 고삐를 찾아서 다시 데리고 왔다.
“성내가 어수선해요.”
로렌디스가 말을 천천히 몰았다. 성내는 어수선했다. 설원에서 큰 지진이 났을 때, 이쪽에서도 지진으로 어수선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지진과는 달랐다. 로렌디스는 로브를 벗고 영지 안을 살폈다.
브레디가 로렌디스를 발견하고 급하게 다가왔다.
“설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로렌디스는 브레디에게 답하는 대신 영지를 눈에 담았다.
지난 지진으로 갈라졌던 땅이 도로 붙었다. 금이 갔던 건물들도 다시금 복구됐다.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던 성벽은 금이 간 것 외에는 멀쩡히 복구됐다.
“말에서 내리고 싶어요.”
캐서린은 로렌디스에게 부탁해서 말에서 내렸다. 로렌디스가 먼저 말에서 내려서 캐서린을 안아서 내려 줬다.
캐서린은 영지 안을 두리번거렸다.
“큰 굉음이 이어지고, 영지 내부도 복구됐습니다. 갈라졌던 도로가 다시 붙고, 일부 무너진 성벽도 복구됐습니다. 또 지반이 다시 안정화됐는데……. 여기서는 주인님과 마님께서 설원에서 뭔가 하셨는가 추측하고 있었는데 아닙니까?”
“우리가 한 건 없다.”
그들이 한 건 없다. 태초부터 설원에 있던 설인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북부가 무너지게 둘 마음이 없다더니, 떠나기 전에 이런 것을 주고 떠날 생각이었나?
“영지민들은 어수선한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 없었나?”
“불안감을 호소한 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긍정적으로 반응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로렌디스는 브레디를 지나쳤다.
캐서린도 어느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벽화가 있던 곳이었다.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벽화를 감싸던 막이 사라졌다는 듯, 페인트칠이 벗겨졌다.
“그놈…….”
벽화의 페인트가 한 꺼풀 벗겨졌다.
저 모습을 보는 순간 알았다.
저걸 보존하고 있던 게 뎐트였구나.
“각하, 영주민들이 어수선합니다. 이들을 다독여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중앙광장을 주변으로 영지민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 모두가 로렌디스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쥔 이들은 간절하면서도 처절했다. 로렌디스는 그런 영지민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로렌디스는 마침내 영지민에게 이야기했다.
긴 혼란이 끝났다고.
이제는 그 막을 내렸다고.
전쟁이 끝난 헬렌은 고요했다.
천여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다. 항상 전장에서 앞장서서 싸우던 기사들은 막연하게 멍해진 얼굴로 영지를 살폈다.
* * *
폐후의 죽음은 기밀로 처리됐다.
외부적으로는 폐후를 황실의 기사가 발견했으며, 황제가 직접 폐후를 심판했노라고 알려졌다. 야만족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빠졌다. 훗날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테슬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뒷수습은 폐하께서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네놈은 지금 내게 다 맡겨 두고 뭘 어쩌겠다는 거냐?”
야만족이 모두 사라지면서 폐후의 시신 또한 건지지 못했다. 시신이 없는 무덤만 겉치레로 남았다.
사람들은 거기에 폐후가 묻혔으리라 여기겠지만, 그곳은 빈 무덤이었다. 소펜가는 폐후와 엮여서 작위를 강탈당했으며, 평민으로 강등됐다.
“헬렌 내부는 좀 어떠냐?”
“어수선하지만 어느 정도는 정돈됐습니다.”
“야만족에게 터를 짓밟힐 뻔했다는 이야기는…….”
“그럴 뻔했지만 괜찮습니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헬렌 내부 기밀이라서 전하지 못한다. 다만, 야만족과 엮이면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대략적으로 설명했고, 그것으로 이번 일은 마무리됐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기지 말고 태워 주십시오.”
“그래, 알았다. 헬렌 부인은 좀 어떠냐?”
테슬러는 숨을 거뒀던 헬렌 부인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의식을 회복한 거면, 지금 상태는 괜찮은 거냐?”
“네. 일단은 회복됐습니다. 주치의도 안심해도 좋다는 소견을 내놓았으니, 폐하께서도 크게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숨이 끊겼었다더니 진짜인 거냐?”
“이런저런 일이 많았습니다.”
“그 부분은 네가 직접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거구나.”
테슬러는 로렌디스가 답하기 어려워하는 질문은 일부러 캐묻지 않고 묻어 주었다. 황궁 내부도 어수선한데, 헬렌 내부 사정까지 고려해 줄 여유도 없었다.
테슬러는 로렌디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녀석도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 그간 많은 일을 겪었음을 그의 표정이 말해 줬다.
“미안하게 됐다. 황실이 헬렌에 큰 빚을 졌구나.”
“아닙니다.”
“그간의 기록은 모두 태우도록 하마.”
며칠 전, 믿을 만한 몇에게만 남몰래 지시해서, 테슬러는 그간의 기록을 불에 태웠다. 그간의 기록은 모두 불탔으며, 테슬러가 마지막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폐후와 엮인 야만족의 이야기는 불길 속으로 없어졌다. 앞으로도 세상 밖으로 꺼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제국의 황후가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야만족에게 나라를 팔아치울 뻔한 일이었다.
이것으로 그간의 일은 얼추 정리된 셈이었다. 테슬러는 참담함에 숨을 삼켰다.
“헬렌으로 가는 거냐?”
“네. 돌아가야 합니다.”
“헬렌 부인은 같이 온 건 아니고?”
“아픈 환자를 어디 오라 가라 하겠습니까?”
대강의 상황을 보고한 로렌디스는 옷을 추슬렀다.
“한동안 헬렌을 비우기 어려워서 이제야 찾아뵈었습니다. 이 부분은 죄송했습니다.”
“아니다. 내가 네 사정을 뻔히 아는데 너를 탓해서야 되겠느냐?”
황궁 내부가 어수선했던 만큼, 헬렌 내부도 어수선했다. 그리고 이 일은 헬렌과 황궁이 침묵하며 고요히 묻혔다. 폐후도 헬렌이 아닌 황실에서 죽은 것으로 처리됐다.
테슬러는 씁쓸히 웃었다. 참담했던 그날 그때, 기쁜 소식이 없던 건 아니었다. 기쁜 소식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내 아우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네. 지금 헬렌에서 쉬고 계십니다. 몸이 낫거든 제국으로 올라와 폐하를 뵙는다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테슬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고맙다.”
로렌디스는 마지막으로 점검할 일을 점검하고, 끝맺을 일까지 끝맺어 두고 제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