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내성 밖은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안정적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상을 되찾았다. 캐서린은 로브를 쓰고 성 밖으로 나왔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로브를 깊게 눌러 씌웠다.
“어제는 침실에만 있으라더니…….”
“너무 오래 자는 것도 같고, 데니스도 웬만하면 움직여 주는 게 좋다고 이야기해서 데리고 나왔잖아.”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시야에 두고, 성 내부를 순찰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기저기서 분주한 건 마찬가지였다. 지대가 무너질 뻔하면서, 헬렌에서는 땅을 보수하고 성벽을 다시 세우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브레디가 숄을 입고 나온 캐서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데니스 교수가 외출해도 좋다고 허락해서 겸사겸사 나왔어요.”
“저는 또 마님께서 무리하는 건 아닐지, 주제 모르고 걱정했습니다.”
캐서린은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뭔가 비현실적인 일을 겪은 기분이네요.”
이 모든 현실이 비현실적이어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지금은 또 뭔가를 잊은 기분이었다. 캐서린은 그제야 뭘 잊었는지 깨달았다.
“설원이 걱정입니다. 저대로 무너져 버리면 안 되는데…….”
캐서린의 표정이 점차 허물어졌다.
“야만족들은 모두 사라졌고.”
“네. 고요합니다. 항상 전장만 떠돌던 기사들이 대거 헬렌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둔지에서는 옛적에 설원에서 죽은 전사자들의 주검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넋을 기르는 깃발이 설원 너머로 펄럭였다. 캐서린은 헬렌 외성의 성벽에 올라가 섰다. 저 먼 곳에서 흰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캐서린이 성벽에 올라서자, 로렌디스가 주변을 살피다 말고 다가왔다.
“왜?”
“특별히 변한 건 없어서요.”
“그렇게 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크게 변할 게 있나?”
“여기였잖아요. 야만족이 여기까지 내려와서 이곳을 밟으려고 했으니까요.”
캐서린이 울퉁불퉁한 난간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깨지고 조각난 파편들이 성벽 바닥에 나뒹굴었다.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넘어질 것 같았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팔뚝을 붙잡아서 부축했다. 곧 넘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캐서린은 괜찮다고 은은히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로렌디스는 마지못해 팔을 놓아주었다.
“당신이 어떤 적과 싸웠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눈앞이 까마득해졌었거든요. 당신이랑 헬렌의 1소대 기사단은 모두 자리를 비웠고, 헬렌의 성벽은 당장이라도 침공받을 것 같았고.”
캐서린은 그때 본 모습을 로렌디스에게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폐후가 얼음조각이 돼서 흩어지던 모습까지.
“내가 한 선택이 맞는지 아닌지, 그런 확신조차 없었어요. 솔직히, 그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떠오른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혹시나, 헬렌에 다른 피해를 주는 건 아닌가 했거든요.”
실제로도 저주와 가호가 맞물리며, 북부가 주저앉을 뻔했다.
“뎐트가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요.”
“뭐?”
“페레타를 보며 은은히 웃어 주던 걸 봤거든요. 잔상처럼 흐릿했지만, 페레타를 보는 표정이 홀가분했던 것 같았어요.”
페레타도 홀가분했지만, 그런 페레타를 바라보는 뎐트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딱딱하던 표정이 풀렸다.
길었던 싸움은 끝났고 야만족은 사라졌다.
이곳이 짓밟힐 뻔한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설원은 고요하기만 했다. 설원을 들쑤시던 야만족의 자취도 눈 녹듯 사라졌다.
“뎐트도 오랜 시간을 보냈던 만큼, 잊지 못했던 것 같아요.”
뎐트의 표정에 스몄던 익숙한 친밀감이 페레타를 기억하고 있었음을 이야기해 줬다.
“이것저것 확인해 볼 일이 많은데요. 왠지, 지금은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머리를 비워 두는 것쯤은 괜찮다. 나중에 때가 되거든, 그녀가 싫더라도 다시 현실 앞에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아주 잠깐만이라도 머리를 비워 두기로 했다. 캐서린은 성벽을 손으로 쓸었다.
‘지켰나?’
하지만 내가 지킨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페레타와 뎐트가 그동안 북부를 지탱해 왔던 건가? 답은 알 수 없었다.
* * *
며칠이 더 흘렀다.
로렌디스는 설원을 한 번 더 살펴봐야 한다고 말 위에 올랐다. 캐서린은 그런 로렌디스를 배웅하며 그의 옷자락을 당겼다.
“설원으로 가는 거예요?”
“일찍 올 거야. 저녁 먹기 전에는 올 거니까 식구들끼리 같이 식사하자.”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이야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우리는 할 만큼 했는데.
로렌디스는 군마를 타고 떠났고, 1소대 기사단이 그런 로렌디스를 뒤따랐다. 뿌연 먼지가 일었고, 캐서린은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마님, 안으로 드십시오.”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아.”
넨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뭘 잊어버린 것 같으십니까?”
“중요한 것 같은데 속이 답답해. 성안을 조금 더 둘러보고 싶어.”
“아직은 어수선합니다. 그래도 원하신다면, 기사단과 동행하에 다녀오시겠습니까?”
어차피 외성으로 나가려던 기사단이 있었는지, 일정은 곧장 잡혔다. 캐서린은 외성 안을 찬찬히 살폈다.
일상을 되찾은 사람들은 무너진 집을 수리하거나, 이웃 주민들을 살피고 있었다. 캐서린이 길가로 나오자, 영지민이 그녀를 알아보고서 몸을 꾸벅 숙였다.
“마님, 나오셨습니까?”
“어어……. 그래.”
캐서린이 눈매를 곱게 접으며 웃자, 데보라가 옆에서 이야기했다.
“마님께서 몸을 던져 야만족들을 막아냈다는 이야기가 헬렌 내부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간은 어수선해서 살필 겨를도 없었지만, 최근에는 여유를 찾아서 마님께 인사드리는 겁니다.”
캐서린이 은은히 웃자 영지민들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잠깐의 혼란일 뿐이다. 다들 큰 걱정할 것 없으니 일상으로 돌아가도 돼.”
“마님께서 몸 바쳐 구한 헬렌인데 저희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기뻐하는 얼굴 속에는 근심이 깃들었다.
‘나도 알아.’
설원은 앞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그런데 설원이 저대로 무너질 리 없다. 뎐트가 그걸 놔둘 리 없잖아.
아직은 끝난 게 아니다. 무언가 더 남았다. 그런데 뭔가 하나하나 잊어 가는 것 같다.
기억해 내라. 캐서린, 뭘 잊은 거야.
캐서린은 숄을 덮어쓰고 천천히 외성 성벽을 따라서 걸었다. 일전에 저질렀던 돌발행위 때문일까, 성벽의 경비대가 이런 캐서린을 경계했다.
‘설원은 설인의 자리였잖느냐? 저주를 받고 금기까지 어겼으니 그들이 설 자리 또한 사라지는 게 맞지.’
뎐트는 끝을 이야기했다. 그 끝에는 그가 없음을 암시했다. 캐서린은 성벽에서 내려와서 외성 밖으로 나갔다.
캐서린이 홀린 듯 걸어 나가자, 발밑이 푹 꺼졌다. 캐서린이 또 이상행동을 보이자, 그때부터 마른침을 삼키는 건 경비대의 몫이었다.
“마님. 어디 가십니까?”
“로렌디스, 지금 설원으로 간 거지?”
“네. 지금은 설원에 나가 계십니다.”
경비대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물었다.
“전서구를 보낼까요?”
“말을 가져와 줘. 설원에 다녀와야겠어.”
왠지 이게 마지막이라는 직감이 든다. 머릿속에 꽂혀 든 직감은 캐서린에게 경고하고 있다. 늦으면 안 된다고. 설원으로 오르라고.
“말을 가져와.”
기사들이 우물쭈물하던 때였다. 데보라가 흑마를 가지고 나왔다. 데보라는 캐서린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다는 것 같았다. 캐서린은 데보라의 도움을 받아서 말에 올랐다.
“각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면 됩니까?”
“그래. 되도록 빨리.”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데보라가 곧장 말을 몰았다. 거칠게 치고 나가는 속도에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날렸다. 숄이 저 뒤로 날아가 버리고, 캐서린은 눈을 어렵게 떴다.
주변 풍경이 바로바로 바뀌었다. 말굽에 눈밭에 빠지지 않도록 쇳조각을 덧대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저기 계시는군요.”
캐서린은 데보라의 이야기에 눈을 떴다. 말이 급하게 멈추어서며 눈이 갑자기 날렸다.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에 손을 휘젓는데 곧 시야가 밝아졌다. 갑자기 눈보라가 흩어지며 주변 일대가 환해졌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데보라가 먼저 내려서, 그녀가 말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뎐트 놈이 북부인들은 죄다 미련하다고 하더니, 그놈의 말이 맞았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모습에 눈매를 찌푸리며 읊조렸다.
“병상 털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마님께서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직접 모셔 왔을 뿐입니다.”
캐서린은 찬찬히 설원을 살폈다. 이곳은 고요했다. 짐승들 우는 소리 하나 안 들리고, 헬렌의 기사단은 죽은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다시금 뜨는데, 로렌디스가 로브를 벗어서 캐서린의 머리에 씌웠다.
“그 꼴로 다니면 또 앓아누워.”
“하긴. 북부에 처음 왔을 때 로렌디스가 내게 해 준 이야기가 이곳의 추위를 쉽게 보지 말라는 거였죠.”
캐서린은 고요한 설원을 살폈다. 이제는 이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마치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 황량했다.
들꽃 하나 없다. 풀 한 포기 안 나는 이곳에는 설원 아래에 단단히 자리잡은 묘목 몇 개가 다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온다. 익숙한 도포 자락이 날리고, 뎐트는 먼 설원 끝자락에 서 있었다. 로렌디스도 그를 알아봤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 뭐라도 잡아.
이명이 울리듯 귓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 땅이 크게 울릴 거야.
로렌디스는 직감하고 캐서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때 땅이 크게 울렸다. 몸은 무게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