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타일로는 머리를 가볍게 감고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며, 아직은 낯선 이 상황에 적응하려는데…….
캐서린이 가위를 가지고 앞에 앉아 있었다.
“머리 다듬어 드릴게요.”
캐서린은 흰 천을 타일로의 어깨에 씌웠다. 빗으로 머리부터 느긋하게 빗었다. 머릿기름까지 쓴 덕분에 엉켰던 머리가 쉽게 풀렸다. 캐서린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빗고. 가위로 상한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많이 어른스러워졌어.”
“아버지 계실 때도 아이처럼 지낸 적은 드물었어요.”
“그랬지. 너는 누구보다 빨리 철이 들어서 가끔 그게 미안해질 지경이었으니까.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만, 이야기 좀 자세히 해 다오.”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가 많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으니 당연했다. 어쩌면 같은 말을 하고 또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이어 가면서까지 빈 공백을 메우고 싶은 게 부녀지간의 마음이었다.
“계약이니 뭐니 그런 건…….”
“그때는 모든 게 낯설었거든요. 그런데 밀던가에서 나온다면, 차라리 그게 저한테는 더 나은 선택인 것 같아서요.”
짧았던 수명이 조만간 끝난다는 걸 알아서, 조금이라도 편히 눈치 볼 곳 없는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죽는 순간에, 권력으로라도 밀던가를 빼앗아서 무덤으로 가려고도 했고.
‘이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자.’
계모와의 일도 간략하게 간추려 이야기했지, 자세한 상황까지는 함구했다. 이제 막 설원에서 돌아온 분께 마음의 짊을 얹어 드리고 싶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나를 배려하는구나.”
“자식이 부모님을 배려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어려서부터 어리광부리는 법도 잘 없었잖느냐.”
타일로는 과거를 되짚더니 탄식했다.
“아니구나. 네가 내게 어리광을 부린 적도 있었지. 내가 마지막으로 너와 헤어지기 전이었나?”
“……네. 기억나요.”
“네가 그때 처음으로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묻는 말에,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를 거야.”
등 돌린 아버지의 뒷모습은 이미 익숙했다. 아버지께서 야만족과의 전투에 떠나는 날이면, 캐서린은 항상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배웅했다.
어릴 적에도 그랬다. 어차피 떠나는 건 마찬가지라서, 등 돌린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며 배웅했다. 그런데, 그날은 다시 오지 못할 미래를 알아서일까?
‘붙잡고 싶었지.’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못 볼 걸 알았으니까.
“그러고, 기사단 행렬에서 벗어나 낙오됐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네게 가지 못할 게 보여서, 네게 마지막으로 남겨준 기억이 네 손을 잡아떼는 모습이었잖느냐?”
“마음 쓸 것 없어요. 아버지는 하실 일을 했고, 지금이라도 무사히 돌아왔다면 그거로 된 거예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인연을 다시 만난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캐서린이 가위로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자, 타일로는 낯선지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미용 가위를 내려놓고 어떤지 묻는데, 나름 괜찮았는지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솜씨가 좋구나.”
“손으로 하는 건 보통 다 잘해요.”
그러고는 얼마간 대화를 더 나눴다.
어쨌든 표정이 밝아 보이니 다행이었다.
* * *
노쇠한 선대 공작, 로테린 헬렌.
로테린은 시선을 내려 눈앞의 며느리를 내려다봤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들에게는 아내가 생기고 가정이 생겼다.
“어렵게 굴 것 없다.”
“설원에서 길게 방황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떠세요?”
“주치의 두 사람이서 여러 번 다녀갔다. 내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러는데, 뭐라고 부르면 될지…….”
“아버님께서 편히 부르고 싶은 호칭으로 부르셔도 좋습니다.”
로테린은 캐서린을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고 가벼운 안부만 나눴다. 원래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지, 대화하는 내내 캐서린이 먼저 뭔가를 물어야지 답해 주는 식이었다.
‘부자가 닮았나?’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선대 공작과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자리를 비켰다. 그에 로테린도 캐서린에게 손짓했다.
“가 보아라.”
“저기…….”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나보다는 네가 곁을 지켜야 할 사람 옆에 있어라. 나중에 식사라도 함께 하자꾸나.”
캐서린은 로테린과 가벼운 안부 인사만 나누고 로렌디스에게 갔다. 로렌디스는 브레디에게 간단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브레디가 먼저 캐서린을 알아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님, 오셨습니까?”
브레디는 좋은 시간 보내라며 자리를 떠났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마와 이마를 맞댔다.
“뭐예요?”
“그냥, 열 있는가 해서.”
이곳 사람들은 멀쩡히 걷는 사람을 반송장 취급하는데, 캐서린도 이 이유를 알긴 안다. 숨을 거뒀던 안주인이 모종의 이유로 다시금 깨어난 건데…….
“좀 더 쉬지. 어딜 또 다녀오는 길이야?”
“아버님께 다녀오던 길이에요.”
그건 로렌디스도 봐서인지 심드렁했다.
“부자지간 대화는 좀 나눴어요?”
“특별히 나눌 대화랄 게 없어서. 밀던 자작과는?”
“아버지랑은 충분히 대화 나눴어요. 머리카락도 잘라 드리고 왔고요.”
로렌디스는 시각을 확인하더니, 아직 여유롭다는 걸 깨닫고 천천히 걸었다. 복도의 잔상이 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이왕이면 침실에만 있어 주면 안 되나?”
캐서린은 설핏 웃어넘겼다.
“환자 대접이에요?”
“네가 어디 다니면 불안해서 그래. 눈 밖에만 두면 별의별 일이 생기잖아.”
일련의 사건으로 로렌디스에게 불안감을 심어 준 것 같다. 어딜 다녀올 때면 꼭 별의별 일에 엮이곤 해서 반박할 거리도 없었다. 잠자코 ‘미안해요.’라고 답한 게 다였다.
“오늘 밤에 일찍 들어와요?”
“잠은 침실에서 잘 거니까 피곤하거든 먼저 자도 돼.”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이마를 짚고 별일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내려놨다. 캐서린은 그가 제 몸을 찬찬히 살필 때까지 기다려 줬다.
“식사는?”
“아직이에요.”
“소화하기 좋은 음식으로 내어 달라 할게. 빈속으로 있지 마.”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이마에 입술을 짧게 맞췄다. 부드러운 촉감이 이어지고,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예민하게 날 섰던 기류도 다시금 잠잠해졌다.
“같이 식사할까?”
“그럴 여유 돼요?”
“여유는 만들면 돼.”
로렌디스가 수습보좌관을 불러 일정을 30분씩만 늦추라 지시했다. 수습보좌관은 캐서린을 흘끔거리더니 알겠다며 집무실로 뛰어갔다.
그날은 식사까지 하고 여유롭게 바람을 쐤다. 하늘은 속없이 맑았다.
* * *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데 지척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캐서린은 베개에 뺨을 비비다 작게 신음했다.
“으응.”
앓으면서 몸을 뒤척이는데, 침대 옆이 푹 꺼졌다. 인기척에 눈을 뜨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코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 숨 쉬고 있어요.”
“그냥 확인만 해 봤어. 피곤하면 자도 돼.”
로렌디스가 이불을 더 끌어 올렸다. 가슴께까지 이불로 덮어 주고 옆자리에 눕는데, 둘이서 같이 눕는 게 얼마 만이더라. 야만족과의 전쟁으로 그간 바쁜 시일을 보냈더니, 머리가 멍했다.
커다란 손아귀가 허리로 파고들었다. 캐서린은 몸을 잘게 웅크렸다.
“오래 자던데 그동안 무슨 꿈이라도 꾼 건가?”
“설화에 나오는 페레타를 봤어요. 그때 북부의 가호라는 게 실존했다는 걸 확신했죠.”
지금은 이 가호 또한 유명무실해졌지만 말이다. 페레타는 캐서린의 영혼을 여기에 묶어 두고 떠났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정확히는, 꿈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억지로 이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무의식 속에서 만났던 뎐트는 작별 인사를 나누듯 초연했다.
“그거 알아요?”
“네?”
“페레타는 끝까지 설인을 기다렸어요. 죽어 가던 내 영혼을 무의식 속에 잡아둔 게 뎐트이고, 거기서 나를 돌려보낸 게 페레타예요. 북부의 가호를 직접 봤거든요.”
잠결에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그때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자, 하룻밤이 그냥 지나갔다. 로렌디스는 그녀의 말을 끊는 법 없이 잠자코 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는 정수리에 턱을 묻고, 눈을 감았다.
“자라.”
하룻밤이 고요히 지나갔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로렌디스는 옆자리에 누워서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캐서린이 눈을 뜨자, 안면의 근육이 편안하게 풀렸다. 마치 언제 눈을 뜨나 기다리던 사람 같았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깨어나자 캐노피를 열었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캐서린이 몸을 웅크리며 이불에 몸을 묻자, 로렌디스가 이불을 걷어갔다.
“이만 일어나.”
“조금만 더요.”
“충분히 잤잖아. 너무 오래 자면, 나중에 밤에 또 못 자. 피곤하거든 차라리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
녹슨 쇠처럼 삐거덕거리는 것 같아.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억지로 침대에 앉혀 놓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기다란 금발이 이불 위에 흩어졌다. 로렌디는 못 말린다며 가느다란 어깨를 커다란 손아귀로 꾹꾹 누르더니, 설렁줄을 당겼다.
“아내가 채비하는 걸 도와주어라.”
“네. 주인님.”
“그래도 졸리면, 오늘 밤에는 일찍 재워 줄 테니까 그때 마저 자.”
캐서린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넨시가 ‘아아-’라고 감탄하더니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채비를 도와 드리겠습니다.”
캐서린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나왔다. 로렌디스가 휘청거리는 몸을 받쳐 안았다. 잔머리를 정돈해 주는 손은 다정했다.
“밖으로 나오거든 성 밖 구경이라도 시켜 줄 테니까, 오늘은 좀 움직이자.”
캐서린은 창문을 더듬거리며 열어젖혔다.
오늘따라 햇볕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