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네게 보여 줄 사람이 있어.”
로렌디스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보여 줄 사람이요?”
“이번 격변이 지나가고, 설원에서 실종자 두 명을 발견했어.”
캐서린은 그의 이야기에 몸을 움찔 떨었다.
“설원에서 실종됐던 실종자.”
“어, 어디 계세요?”
“누구인지는 안 묻고?”
“누, 누구예요?”
실종자가 누구인지 확인부터 해야 하는데, 캐서린은 본능적으로 가장 그리운 사람을 떠올렸다.
‘아빠…….’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당황한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따라와. 보여 줄게.”
로렌디스가 따라오라며 캐서린을 데리고 갔다. 로렌디스는 그녀를 데리고 본성 내에 위치한 귀빈실로 향했다. 로렌디스가 귀빈실 입구에서 멈춰 서서 문 안쪽을 턱짓했다.
“열어봐.”
귀빈실은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었다. 캐서린은 문고리를 붙잡고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천천히 문을 옆으로 밀자, 넓은 방이 캐서린을 반겼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너무 어릴 적일 때라서, 네 기억 속의 모습은 아닐 거야.”
“…….”
“그동안 시간도 많이 지났고, 설원에서 험난한 시간을 보낸 만큼 모습도 많이 변했을 거고. 그래도 못 알아볼 리는 없다고 믿어.”
“아버지예요?”
캐서린은 울음을 삼키며 로렌디스의 옷자락을 잡았다.
“직접 확인해 봐.”
로렌디스가 안으로 들어가 보라며 길을 비켰다. 캐서린은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귀빈실 안에는 커다란 융단을 깔아 두고 거기에 탁자와 소파, 침대를 설치해 둔 게 다였다. 내부는 단아하면서도 단정했다.
캐서린이 로렌디스를 돌아보자 로렌디스가 침대 쪽을 턱짓했다.
“가 봐.”
캐서린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막상 눈앞에 두니까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다.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침대에는 반투명한 캐노피가 처져 있었다. 캐서린은 손등으로 캐노피를 밀며 침대 안을 살폈다.
누군가 누워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흔적은 거의 사라져 있었지만,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세월의 풍파를 잔뜩 맞았는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 졌다. 피부는 희게 질렸고, 눈 밑도 거뭇거뭇했다.
“그런데, 내가 이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잖아요.”
캐서린은 주저앉듯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일부러 기억 속에서 지워 내려고 했던 적도 있다.
아버지께서 실종됐단 소식을 들었을 때, 캐서린 스스로 칼로 도려내듯 아버지란 존재를 덜어냈다.
‘잊지 않으면 남은 시간이 더 고달플 것 같았거든요.’
너무 긴 세월을 떨어져 보냈고, 남은 거라고는 사진 한 장이 다였다. 그 사진도 워낙 오래돼서 수십 년 전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많이 변했고, 기억 속에서 도려내다시피 지워 버렸지만…….
“아버지?”
캐서린은 타일로의 어깨를 더듬었다.
“아빠. 일어나 보세요. 아빠?”
“잠드신 거야. 설원에서 내려오자마자 딸아이의 주검을 봤는데, 어느 부모가 무던할 수 있겠어.”
로렌디스는 캐서린에게 고요히 답하고 곁으로 다가와 섰다. 캐서린은 타일로의 어깨를 더듬거리다 천천히 팔을 내렸다.
“어디 아프신 거예요?”
“쓰러져서 며칠 혼절하셨어. 설원에서도 워낙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데니스가 꾸준히 살폈고 지금은 회복 중이야. 이대로 충분히 쉬면 된댔으니 걱정 마.”
로렌디스는 캐서린에게 걱정할 일 없다며 어깨를 다독여줬다. 캐서린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이런 재회를 떠올린 건 아닌데.’
캐서린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침대에 손을 얹고 이불을 말아쥐는데, 주름진 아버지 손이 유독 눈에 밟혔다.
캐서린은 더듬거리며 타일로와 손을 맞잡았다. 주름진 손은 까끌까끌했다. 크림을 발라 보들보들한 캐서린의 것과는 달랐다.
“깨면 다시 올래?”
“아니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언제 다시 깰 줄 알고.”
“그래도, 깼을 때 옆에 있는 걸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얼굴에 진 주름은 그동안의 고단함을 보여 주는 것 같았고, 피부도 거칠거칠했다. 캐서린이 손바닥으로 뺨을 더듬자 꺼끌꺼끌한 살갗이 사포와 같았다.
‘아빠, 도대체 어떻게 지내신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그동안 어디서 뭘.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셨어요.’
젊었던 아버지는 많이 노쇠했다.
“잠시 혼자 있어도 될까요?”
캐서린은 침대맡에 주저앉아서 그의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아직은 실감이 안 나요.’
감동적인 재회를 떠올렸는데, 막연하게 와닿는 게 없다. 현실감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캐서린은 눈을 내리뜨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기껏 내려왔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서 더 죄송스러웠다. 재회가 왜 이런 식이야? 캐서린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캐서린은 타일로의 손등을 어루만지고는 힘없이 손을 내려놓았다. 침대맡 의자에 앉아서 엎드리자 잠이 쏟아졌다.
* * *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캐서린은 눈을 천천히 떴다. 엎드린 그대로 잠들었던 것 같다. 머리 위를 쓰다듬는 손길은 투박하면서도 다정했다.
캐서린은 눈을 깜빡이면서도 계속 엎드려 있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내가 뭘 잘못 봤나…….”
타일로가 읊조리는 이야기에 캐서린도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타일로의 시선이 작게 흔들렸다.
“잘못 본 게 맞는데, 왜 이리도 생생한 거냐?”
“이렇게 만질 수도 있고, 말도 할 수 있는데요. 여전히 잘못 본 거 같아요?”
타일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너…….”
“아버지께 너무 상처 될 모습만 보여 준 것 같아요.”
“네가 왜? 어, 어째서 네가?”
타일로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캐서린의 뺨부터 귀, 목과 어깨까지 더듬거리더니 손을 붙잡고 어루만졌다. 흔들거리는 시선이 그의 당혹스러운 감정을 고스란히 다 담아냈다.
“캐서린이냐? 정말 너야?”
타일로가 이불을 밀어내고 똑바로 앉았다. 몸이 엉망이었는지 침대에 앉으면서도 한 번 휘청거렸다.
“조심하세요.”
“어떻게 된 거야? 응? 이게 무슨 일이라니. 신이시여…….”
캐서린은 타일로가 진정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줬다. 아버지께 너무 큰 상심을 안겨 드릴 뻔했다.
추억 속에 있던 젊은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도 왜일까? 기억 속에서 칼로 도려내면서 잊었던 얼굴이건만, 이 얼굴을 보니까 속에서부터 울컥하며 터져 나왔다.
‘나는 이 얼굴을 잊은 게 아니었어요.’
잊고 싶었는데 잊지 못했어요. 털어 내야지 살 것 같아서 스스로 털어 내길 택했는데 그리워했던 것 같아요.
무슨 수로 잊겠나? 한때는 이곳을 책 속이라고 여겼다. 불현듯 깨달은 자신의 미래에 절망도 해 봤다.
‘아빠는 아빠잖아.’
설원으로 떠났던 아버지께서 십수 년 만에 돌아왔다. 언제일지도 모를 기약 없는 기다림이 끝났다. 모든 게 종식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어떻게 된 거냐? 분명 네 숨이 끊긴 걸 확인하고 왔는데, 내가 잘못 본 것이었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차근차근 이야기해라.”
캐서린은 그간의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자작가에서 계모와 의붓언니가 벌였던 일과, 밀던가에서 나와서 로렌디스와 계약결혼을 맺었던 일, 그리고 독에 노출돼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며, 야만족과의 다툼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일까지.
“그런 일을 몇 년 사이에 다 겪었다고?”
타일로는 질색하며 캐서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감히 그것들이……!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무슨 짓들을 한 거냐!”
“지금은 다 해결됐어요. 계모와 가족들을 수도원에 넣을 때만 하더라도, 언제 죽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요. 사람 삶이라는 게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더라고요.”
캐서린은 뎐트와의 일과 설원과 엮인 설화까지 하나하나 다 이야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타일로는 말없이 캐서린의 손등만 어루만졌다.
“네가 살았으니 됐지.”
그 뒤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이야기하고, 그 뒤로는 아버지의 면면을 눈에 담았다.
허락되지 않았던 순간을 이제야 허락받은 것 같다. 예정대로라면 캐서린이 먼저 죽어서 재회조차 못 할 뻔했는데…….
‘결국 책으로 엿봤다고 여겼던 게, 어그러졌던 미래였을까?’
캐서린은 타일로의 면면을 살피다 뒤늦게 웃었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
“자른다고 잘랐는데 엉망이냐?”
“설원에서 누가 잘라 줄 사람은 없었을 거고, 직접 자른 거예요?”
“그래.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걸리적거릴 때마다 칼로 베어 냈지. 전대 공작님의 머리도 내가 잘랐다.”
타일로는 자랑 아닌 자랑을 꺼내 놓았다. 캐서린은 뻣뻣하게 엉킨 타일로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희게 센 머리는 뻣뻣했고, 창백하게 질린 살갗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이리저리 긁힌 상흔만 가득했다.
“언제 이 정도로 자랐을까. 어릴 적에 보고 못 봤으니 몰라보게 변하는 건 당연하지만, 너무 훌쩍 자라 버려서 속상하구나.”
손길을 벗어난 아이는 훌쩍 자랐고 몰라보게 변했다. 타일로는 더 물을 것도 많지만, 일단 몸부터 청결히 씻는 게 먼저 같다고 중얼거렸다.
“네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어.”
타일로는 그간의 이야기를 짧게 나누고, 씻으러 다녀온다며 몸을 일으켰다. 캐서린은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일까. 긴장이 맥없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