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캐서린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봤다. 시야가 넓게 트였다. 발바닥에 차가운 눈송이가 밟혔다. 흰 침의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그나저나, 침의는 맞나?’
침의라기에는 평소에 입던 옷 재질과 다르다. 캐서린이 한 번 숨이 끊겼댔으니, 수의일 확률이 더 높겠다.
‘이걸 무슨 마음으로 입혔을까.’
헬렌에서는 그녀에게 수의를 입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캐서린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밭에 발을 디뎠다.
차갑다. 살갗을 저릿하게 찌르는 한기에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캐서린은 멀거니 허공만 바라봤다.
푸르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내성의 후원에는 흰 천막이 가득했다. 곳곳에 흰 천막과 흰 깃발을 꽂아 두었다. 캐서린은 가만히 목덜미를 쓸었다.
“마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캐서린은 고개만 돌렸다.
“넨시.”
넨시가 들고 있던 걸레를 떨어트렸다.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충격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캐서린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고 은은히 웃었다. 넨시가 울컥하더니 캐서린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게 무슨…… 아니, 마님.”
말이 뚝뚝 끊겼다. 넨시는 무례인지도 모르고 캐서린의 어깨를 더듬거렸다. 그녀는 감히 만져서도 안 될 귀한 곳에 손이 닿은 듯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넨시가 많이 놀란 모양이야.”
캐서린은 넨시의 어깨를 다독였다. 긴 금발이 흘러내렸다. 넨시는 길게 흘러내린 금발을 보고서야 울컥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너무 오래 누워 있었니?”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넨시는 캐서린의 발등에 이마를 묻었다. 캐서린이 당혹스럽게 이만 일어나라 이야기하려는데, 넨시의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다. 넨시는 엎드려서 쉼 없이 흐느꼈다.
‘잠시만 기다려 주자.’
넨시는 캐서린의 발등을 더듬거렸다. 캐서린은 넨시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뒀다.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헬렌 내성에서는 여주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흰 깃발이 펄럭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장례식은 치르기 전이었다.
“넨시,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넨시는 캐서린의 목소리에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네?”
“이곳 사람들에게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 줘야지.”
넨시는 그제야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며 불현듯 외쳤다.
“마님, 기다리십시오! 사, 사람들에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아니지,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이런 차림으로 나오시다니! 제가 채신머리를 길바닥에 놓고 와서, 마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캐서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옷차림은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아.”
“마님, 아무리 그래도 수의 차림입니다!”
“그래도, 죽었던 사람이 깨어난 거잖아. 옷차림쯤이야 눈에 보이지도 않을 거야.”
캐서린이 한쪽을 눈짓하자 넨시의 시선이 돌아갔다. 로렌디스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음. 로렌디스에게 사람을 보낼 것도 없었나?”
보좌관과 이동 중이던 로렌디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캐서린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좀 무모하게 군 면도 있었네요. 미안해요, 로렌디스. 내가 여기서 할 말이라고는 때 지난 사과밖에 없네요.”
충격받은 로렌디스의 얼굴에, 캐서린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캐서린 역시, 헬렌 곳곳에서 보이는 흰 깃발과 흰 천막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돌덩이에 맞기라도 한 듯 멍해졌다.
깃발은 바람에 날려 펄럭거렸다. 캐서린은 내성 곳곳에서 펄럭이는 흰 천을 보며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당신은 여기서 내 장례를 준비했었구나.
‘당신은 내게 수의를 입히며 무슨 생각을 했어요?’
아물지 않은 흉터를 보며 아파했을까?
캐서린은 가슴께를 더듬거렸다. 몸을 관통하는 칼을 손아귀로 붙들고 폐후를 그대로 끌어안았을 때, 캐서린은 죽음을 각오했다. 다만, 그런다고 마음이 편할 리 없지.
“마님, 어,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죽어 가는 순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떠난 뒤에도 이곳에 남을 사람들이 걱정이었다.
“…….”
로렌디스가 보좌관을 뒤에 놔두고 캐서린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느릿하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캐서린이 천천히 와도 좋다고 이야기하려는데, 로렌디스는 이미 캐서린 가까이 와 있었다. 그는 캐서린의 어깨를 더듬거리더니 그대로 끌어안았다.
“네가 무모했던 건 아는구나. 네가 그러면 나는 어쩌라고. 네가 내게 이 정도로 무심하면 안 됐잖아. 내 손으로 네 장례식을 준비하게끔 해?”
전생에서 당신은 이미 내 장례식을 한 번 치렀어요.
이런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다시금 떠올려 보면, 전생은 결국 비극 서사로 끝났다.
로렌디스는 그녀의 차림새를 눈으로 훑어 내리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미쳤나?”
“…….”
“이 꼴로 여기까지 나와?”
네가 제정신이냐고 질책하는 눈짓이 익숙했다. 애틋함은 잠시였고, 그는 예의 그 ‘네가 제정신이야?’라는 표정으로 캐서린을 내려다보며 그대로 안아 들었다.
“브레디!”
로렌디스가 보좌관을 부르자, 브레디는 안 들어도 알겠다며 답했다.
“진료동에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데니스 교수와 제임스 박사 두 사람 모두 모시고 오겠습니다.”
브레디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로렌디스가 그녀를 안아서 침실로 옮겼다. 그는 침실 창문을 열어서 환기했고, 침실 안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데니스가 의사 가운을 입다 말고 들이닥쳤다. 문턱에 발이 걸렸는지 몇 번 구르더니, 침대맡에서 고개를 대뜸 들며 감탄했다.
“진짜입니까?”
“무엇이요?”
“살아 계시네요?”
“데니스, 때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인데요?”
데니스는 울컥하며 캐서린의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정말. 이 손으로 마님의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던 줄 아십니까!”
데니스는 덜덜 떨리는 손아귀로 캐서린을 살폈다. 이것저것 살피더니 몸이 쇠한 것 외에는 모두 괜찮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적응하지 못했는지 진단하는 내내 손이 자주 미끄러졌다.
‘기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무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캐서린은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는 아직도 침실 문턱에 서 있었다.
“제임스도 들어와.”
“내가 들어가도 될지 모르겠는데…….”
“들어와서 안 될 건 또 뭐겠어.”
니콜이 제임스의 등을 떠밀었다. 제임스는 휘청거리며 침실로 오더니 침대 가까이 왔다. 그러고는 캐서린의 낯빛을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괜찮은 건지 똑바로 진단한 것 맞습니까?”
제임스가 제 스승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봤다. 스승이라서 존중하지만, 실력까지는 썩 믿음이 안 간다는 눈초리였다. 제임스는 데니스의 어깨를 밀어내더니 침대맡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니콜!”
니콜이 진료 가방을 가져와 제임스 앞에 내려놨다.
“뭘 꺼내 드릴까요?”
“주사기랑 진단 시트 꺼내 놔.”
캐서린은 이들이 만족할 때까지 몸을 내어 주고 기다렸다.
“사람이 심장까지 관통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잖아. 스승님이 아무리 돌팔이더라도 환자 앞에서 약을 팔면 씁니까?”
“이놈아! 너는 지금 네 스승 앞에서 무례하게 무슨 말버릇이야!”
캐서린은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료동 분위기는 한결같구나. 이곳은 변함이 없다.
“괜찮은 건가?”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옆자리를 말없이 줄곧 지키고 있었다. 캐서린은 그런 로렌디스를 올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앉아요, 당신도.”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캐서린에게 닿아 있었다.
* * *
숨이 끊겼던 몸이 되살아났다. 헬렌 곳곳으로 여주인이 다시 소생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헬렌은 기쁜 소식에 축제를 벌였고, 그제야 전쟁이 끝났음에 안도했다.
‘비록 로렌디스는 아직 온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 듯 보이지만.’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볼 때마다 속 모를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럴 때면, 캐서린도 그런 로렌디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곤 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로렌디스가 어렵게 고르고 골라 꺼낸 이야기였다.
“딱히 막 큰 목적을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어요.”
“그럼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뛰어들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무런 생각 없이 그곳에 뛰어들 만큼 채신머리가 없진 않다.
“그때는 다른 생각이 안 들었어요. 로렌디스는 설원에 발이 묶인 것 같지, 성벽은 곧 함락될 것 같지. 영지에 남은 영지민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는 일반인들이지. 성벽이 무너진 뒤에는 무참한 학살이 벌어질 게 눈앞에 보이듯 선명했거든요.”
그때 캐서린에게는 선택지가 얼마 없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때 내게는 선택지라 할 게 없었어요. 그래서 무턱대고 뛰어들었던 것 같아요.”
이 몸 하나만 희생하면 될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조금 일이 어그러지긴 했어도 그게 옳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