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로렌디스가 침대 옆에서 가만히 있는데, 밖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울렸다. 보좌관의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부기사단장입니다.”
부기사단장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설원이 헤집어지면서 아래 묻혔던 전사자들의 주검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로렌디스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예우를 갖춰 수습해라.”
부기사단장이 멈춰 있는 모습을 보고, 로렌디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더 남아 있는 거냐?”
브레디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는 캐서린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기사단장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각하, 천천히 내려가십시오! 어차피 두 분 모두 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기사단장이 뒤에서 로렌디스에게 외쳤다.
“각하의 앞길을 막지 말고 썩 옆으로 비키거라! 뭣 하고들 서 있는 거냐!”
로렌디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게 식어 버린 손아귀가 저릿했다. 감각이 모조리 다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로렌디스가 복도를 거칠게 걸어나가자, 하인들이 서둘러 길을 열었다. 길을 급하게 열다가 바닥에 넘어진 이들도 있었다. 로렌디스는 그런 이들을 돌봐줄 여력이 안 됐다.
로렌디스의 걸음이 본성의 입구 앞에서 멈췄다. 그의 시선이 입구 아래에 선 이들에게 향했다.
오랜 기간 헤맸을 게 보이는 이들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로렌디스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로렌디스냐?”
전대 공작이 상처투성이인 차림새로 허물어졌다. 브레디가 사색이 돼서 전대 공작부터 챙겼다.
“아, 아니……. 각하! 도대체 그간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설원에서 오래 헤맸지. 우리가 달리 있을 곳이 더 있겠느냐?”
전대 공작의 검었던 머리는 희게 셌다. 긴 세월을 설원에서 보냈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손끝에는 동상으로 입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찾고는 있었지만,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여긴 이들이었다. 밀던 자작이 전대 헬렌 공작을 부축하며 무릎을 꿇었다.
“실종됐던 타일로 밀던, 헬렌으로 복귀했습니다.”
이들을 찾아낸 건 주둔지에서 수색 중이던 병사들이었다. 설원이 그렇게 되고, 헬렌에서는 추가 수색을 위해서 인력을 파견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그곳에서 생존자 두 명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
로렌디스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각하?”
로렌디스는 침음을 삼켰다. 생존자의 귀환은 마땅히 기뻐할 일인데, 입술이 붙어 버린 듯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랜 기간 찾아다닌 이들이었다. 전대 공작이 실종되고 설원을 누빈 시간만 해도 십수 년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이들인데, 로렌디스는 차마 이들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밀던 자작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뒀다.
“잘, 돌아왔어. 아버지께서도 잘 돌아오셨습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네게 뭐라고 인사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됐습니다.”
로렌디스는 제 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가 섰다. 그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아버지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수그려 끌어안았다.
“어디 크게 탈 난 곳은 없습니까?”
“네가 걱정할 만큼 아픈 곳은 없다. 헬렌 내부가 어수선하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야만족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성벽은 왜 주저앉은 거냐?”
전대 공작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큰일이 있었구나. 설원에서 내려오면서부터 야만족이 모두 사라지고, 눈에 파묻힌 땅이 갈라진 모습을 보고 왔다.
“너는 어디 다친 곳 없고?”
“괜찮습니다, 아버지.”
“내가 갑자기 없어져서 네가 고생이 너무 많았을 거다.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려면, 대화가 길어지지 싶은데…….”
로렌디스는 천천히 전대 공작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습니다.”
전대 공작은 이상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두 분을 안으로 모셔라.”
로렌디스의 시선이 밀던 자작에게 닿았다.
밀던 자작이 실종되고 십수 년이 흘렀지만, 헬렌에서는 시신이라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헬렌을 위해서 싸우다 죽은 용사들이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을 찾아내서 안장하는 것 또한 남겨진 이들의 책임이라고 여겼다.
“긴 시간 버텨 주어서 고맙다.”
밀던 자작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밀던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보고를 진짜 나중에 들어도 되겠습니까?”
밀던 자작은 아무래도 그간의 일을 바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로렌디스는 당장 그의 얼굴을 보고 대화할 엄두가 안 났다.
“모두들 지친 것 같으니, 안에서 쉴 자리부터 마련해 드려라.”
밀던 자작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많은데, 입술이 말라붙은 듯 건조해졌다.
그제야, 밀던 자작도 기사단에 흐르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위화감은 자작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은연중에 그의 시선을 피하는 움직임까지 느껴졌다. 이상하리만큼 적막한 침묵이 흘렀다. 로렌디스가 숨을 고르고서 작게 웃었다.
“아버지께도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로렌디스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야기에, 전대 공작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라.”
“감사합니다.”
로렌디스는 보좌관에게 뒤를 맡기고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가까스로 수습했던 표정도 사람들과 멀어지자 점점 허물어졌다.
‘네 아버지께 죽은 딸아이 시신을 보여 주라는 거냐?’
설명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도 자작이 아니라, 로렌디스가 그에게 설명해야 할 일이었다.
하인들을 지나쳐 다시 침실로 왔다. 시신의 부패를 막는 인공 약품의 향이 침실 안에서 은은히 풍겼다.
독한 냄새는 아니다. 향은 꽃내음처럼 잔잔했다. 빌어먹게도 로렌디스가 앞으로 가장 혐오하게 될 향료였다.
그녀는 시간이 멈춘 듯 홀로 잠들어 있었다. 부패를 막아 둬서인지, 편안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게 다였다. 손을 더듬거리며 뺨을 어루만지자, 이제는 온전히 식어 버려 뻣뻣해진 육신이 닿았다.
“어쩌면 좋은지 이야기해 줘.”
내가 어쩌면 좋은지.
“나한테 이야기라도 해 달란 말이야.”
너의 죽음을 놓고 어디에 내 분노를 쏟아야 하는 거냐? 길 잃은 분노는 스스로를 향했다. 모든 게 어지럽다.
쿵쿵― 지반이 한 번 더 떨렸다. 불안정한 지반은 이곳이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해 오고 있었다.
“각하. 브레디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브레디가 침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선대 공작님께서 상황 설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대로 침묵하기도 어렵고, 뭐라도 설명을 해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이제는 자작님께 말씀드려야죠. 다른 건 다 미루더라도, 이건 미루시면 안 됩니다. 마님께서도 분명 기다리실 겁니다.”
브레디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입안이 썼다.
* * *
타일로는 로렌디스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그간의 일은 로렌디스에게 하나하나 전해 들었다. 처음 딸아이가 여기 있다 할 때는 믿지 못했다. 그 아이가 야만족과의 다툼에서 희생됐다는 말 또한 믿지 못했다.
‘아니지 아니야. 그럴 리가.’
타일로는 이상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위화감은 수의를 입고 누운 여인을 봤을 때 극대화됐다.
‘누구?’
긴 금발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캐서린?’
수년 만에 재회했지만 딸아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저 얼굴을 무슨 수로 잊겠나? 지난 몇 년간 저 얼굴만 머릿속에 그리며 지냈는데……!
타일로는 로렌디스에게 그간의 일을 전해 듣고 캐서린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 누워 있느냐?
침실로 보이는 이곳은 적막했다. 침대에는 딸아이만 홀로 누워 있었다. 타일로는 더듬거리며 침대 시트를 정돈했다. 그리고, 줄곧 곁에 있었던 로렌디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제가 지금 현실감이 없어서 그러는데……. 한 번만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제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타일로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내 아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여기에 누워 있을 리 없잖습니까? 십수 년 만에 만난 아이가 왜 여기에서, 왜 이런 모습으로 있겠습니까? 각하, 제가 잠시 본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
타일로는 숨을 죽였다. 아이가 타박하는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봤다고 알아보지 못하는 거예요?’
타일로는 숨죽이며 아이의 옷을 긁어쥐었다.
“아, 아버지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를 못 알아볼 리 없잖느냐. 내가, 십수 년 만이더라도 너를 알아보지 못할 리 있느냐? 타일로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손을 더듬거렸다. 제발, 아가, 장난이라도 내게 이래선 안 되는 거잖느냐.
“잠든 게 아닙니까? 잠든 것으로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의사를 한 번만 더 불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확인해 주십시오.”
타일로는 로렌디스를 돌아보며 숨을 삼켰다.
“주치의를 한 번 더 불러 주면, 자작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겠나?”
적막한 표정이 감히 그에게 무엇도 되묻기 힘들게 만들었다.
“……잠시만 아이와 둘만 있고 싶습니다.”
“자리를 비켜 줄 테니 필요한 게 있거든 이야기해.”
“아이……. 제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은 어땠습니까?”
로렌디스는 답하지 못했다.
“나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타일로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왜, 왜 못 지킨 거지?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고 로렌디스를 올려다보는데 말문이 막혔다.
로렌디스의 표정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서글프고 무거운 표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그래서 타일로도 더는 묻지 못했다.
“각하께서도 조금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타일로는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로렌디스와 눈을 맞추는 순간, 숨이 막히는 무게감이 그의 목구멍을 턱― 하고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