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캐서린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게 뭐야, 엄청 쉽게 끝날 전쟁이었잖아요.”
“네 죽음이 네게는 쉬운 일이구나.”
그녀의 죽음 하나로 나머지를 살려 낼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닐까. 몸을 희생물로 삼아서 자신의 영지민과 땅이 밟히는 건 막아 냈으니.
“어리석은 녀석. 네가 이런 결정을 하리라고 미리 알았다면, 헬렌 공작이 너를 그냥 가만히 뒀을 리 없었을 거다.”
“그러는 뎐트는 알았잖아요.”
“나는 알았지.”
읊조리는 목소리가 씁쓸하다. 짓궂게 그녀에게 울어 보라고 하던 게 반년도 안 됐는데, 지금 당신은 세상 적막한 표정을 짓고 있다. 거기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캐서린까지 괜스레 씁쓸해졌다.
“뎐트가 알고도 놔둔 거면,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겠네요.”
굳이 누군가 원망스럽다는 건 아니다.
“알고도 놔뒀다고 하면, 보통은 원망하는 게 맞지 않느냐?”
“뎐트를 원망하기에는, 애초에 뎐트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뎐트는 그러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물을 기회를 잡았는데 뭐부터 물으면 좋을지 감이 안 온다.
“폐후의 은발은 뭐예요? 내가 알던 세이렌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태초 설인의 그릇이 된 거야. 설화에서 페레타를 씹어 먹었던 설인의 환생쯤으로 이해하면 돼. 원래는 인간으로 환생했는데, 북부의 균형이 깨지면서 그릇에도 균열이 간 거야.”
균형이 깨진 결과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격변이래서 큰 혼란이 헬렌을 덮쳐 올까 했는데, 누군가의 죽음으로 막아 낼 수 있는 변화였다면 남는 장사였다.
뎐트는 이런 캐서린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혀를 찼다. 헬렌 공작이 봤으면 뒷목을 짚었을 거라며 탄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북부의 주인들은 왜 죄다 미련한지.”
“처음부터 누군가 한 명만 희생하면 끝날 일이었네요?”
“그럼, 제 주군의 목덜미를 짚어서 야만인들 앞에 데려다 놓고 죽으라 이야기하는 게 옳았다는 뜻이냐? 너는 네 목숨을 굉장히 가볍게 여기는구나.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라고 죽음이 네게는 가벼운 영역이 된 거냐?”
이건 타박하는 게 아니다. 미련하다며 혀를 차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한 어조였다. 뎐트는 뒷짐을 선 그대로 캐서린을 내려다보고 섰다. 이 깜깜한 어둠은 저번에도 한 번 봤다.
‘내 무의식이랬나?’
뎐트가 또 무의식 안으로 온 모양이다.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진짜 한 줌의 먼지가 돼서 흩어질 것 같다는 직감뿐이었다.
검은 먹물 속에 파묻혀서 허우적거리는 것도 잊고 떠다니고 있다.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아니면 이 자리에 멈춰 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공간 속에서 말이다.
“죽었나요?”
“누가.”
“폐후요.”
“죽었다. 폐후는 존재 자체가 소멸했고 너도 숨이 끊겼다.”
“야만족은 안개와 같이 물러났고요?”
“그래. 그것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거로 끝인가요? 야만족이 있던 설원은요?”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닐 건데 뎐트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캐서린이 부가 설명을 요구하자, 뎐트는 억눌러 두었던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설원은 무너질지도 모르겠어.”
뎐트는 작게 웃었다.
“설원은 설인의 자리였잖느냐? 저주를 받고 금기까지 어겼으니 그들이 설 자리 또한 사라지는 게 맞지.”
무던한 어조로 하는 이야기는 설인의 끝을 입에 담고 있었다.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요?”
“금기를 어겼으니 마땅한 벌을 받는 게 맞아.”
“아아……. 그럼 설원에서는 더 이상 야만인이 나오지 않겠네요. 이젠 다 끝난 거죠?”
뎐트가 답한 건 아니지만, 서서히 끝나 간다는 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데, 뭘 잊은지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점점 멍해졌다. 흐릿해진 시야는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도 안 가는 어둠 속에서, 뎐트만 보이고 그녀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해라.”
내게 그런 게 있었나.
“뎐트.”
“그래.”
“헬렌도 무너지고 있죠? 설원만 무너지는 게 아니잖아요.”
뎐트가 숨을 멈췄다. 천여 년 가까이 이어진 균형이 어긋나고 격변이 도래했다. 격변이 끝난들 뒷수습은 남아 있었다.
“균형이라는 게 갑자기 깨지면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무너지는 법이잖아요. 뒤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게 네 바람인 거냐? 단 하나다. 네가 내게 부탁할 수 있는 건.”
“우리는 친우잖아요? 뎐트……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설원에서 죽은 이들을 모두 헬렌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자신은 이제 떠나지만, 자신이 떠나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있으니. 캐서린은 뒤에 남을 사람들의 안녕을 빌고 싶었다.
어둑한 어둠이 서서히 의식을 집어삼켰다. 한 입 한 입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캐서린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진짜 끝일까?’
미안해요.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진 말아요. 이왕이면 금방 잊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쉬울 리는 없겠죠. 외로움이 밀물처럼 캐서린을 덮쳤다.
“자아를 잃지 말아라.”
고요한 읊조림이 이어지고 캐서린은 눈을 감았다.
* * *
제임스는 잠든 캐서린을 한 번 내려다보고, 여러 번 맥박을 확인했다. 숨을 거뒀다. 핏기가 가시고, 호흡이 끊겼다. 심장의 고동이 멎었으며, 지금은 흰 수의를 입었지만 심장을 가로지르는 상흔으로 몸이 붉게 물들었었다.
“니콜.”
제임스를 따라왔던 니콜이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부르셨어요, 스승님?”
“퇴직금까지 챙겨서 돌려 보내 주겠다던 사람이 왜 이런 꼴로……?”
며칠 전까지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사람이 이 꼴로 누워 있다.
일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환자와 깊게 인간관계를 쌓은 적은 없다. 돈 따르다가 패가망신한다고 이야기한 게 얼마 전이었다.
“헬렌이 많은 것을 잃었네요.”
니콜이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제임스는 고개를 돌렸다.
“내성이 쥐 죽은 듯 고요하기는 하구나.”
“헬렌 부인이 차지하는 공간이 의외로 컸던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그의 목덜미를 더듬거렸다.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 허망함일까? 손끝이 잘게 떨렸다. 어째서?
‘죽은 이들을 한둘 본 게 아닌데.’
마음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뒷일을 수습하기도 벅찬데, 안주인의 장례식까지 준비해야겠군요.”
헬렌 깊숙하게 자리 잡은 침통함. 영지민들에게도 이곳의 안주인이 숨을 거둔 게 알려졌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영지민들도 야만인이 코앞까지 덮쳐 온 걸 알았다.
내성 앞에서 우악스럽게 성벽을 들이박고, 경비대와 기사단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안에까지 울렸으니까.
그래도 모든 게 평화롭게 끝났다. 아니, 이걸 평화롭다고 해도 좋을까? 잠든 아가씨 표정은 편안하다만.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조용해졌어.”
북부에서 천여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전쟁이 종식됐다. 야만인이 모두 사라졌고 설원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영지 내부에서는 아직 몇몇만 알고 있지만, 내성의 기사단은 야만인과 직접 부딪쳐 싸운 만큼 이 전쟁이 종식됐음을 확신했다.
‘희생이었나?’
제임스는 고요히 침실에서 물러났다.
* * *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침대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자리를 지켰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무엇부터 하면 좋을지, 누구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각하. 브레디입니다.”
브레디가 침실 문을 두들겼다.
“저도 각하께 시간을 더 드리고 싶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가 않습니다.”
브레디는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설원 일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로렌디스는 미동도 없는 캐서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브레디는 곁에서 그런 주군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황실에서도 일이 어떻게 됐는지 설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폐후께서 어떻게 된 건지, 이제는 황실에 설명해야 합니다.”
폐후가 헬렌에서 발견됐다는 보고가 황실로 들어갔다. 마지막 족적이 헬렌에서 끊겼으니, 황실에서도 궁금해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설명할 길이 없다.
“폐후가 그대로 멸했다고?”
“네. 야만족들이 사라질 때 같이 사라졌습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저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안개가 옅어지면서 흩어지는 먼지 한 줌에서 폐후를 봤던 것 같습니다.”
이건 황제만 볼 수 있는 급보로 황실로 소식을 전하는 게 맞겠다. 폐후가 멸했다. 설원은 서서히 주저앉고 있고, 헬렌이 있는 북부의 땅도 지반이 많이 약해졌다.
헬렌에서는 해야 할 일들이 투성이인데, 로렌디스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브레디는 제 주군을 독촉하기보다는 일단은 시간을 드리기로 택했다.
브레디가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코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숨을 거둔 지 오래지만 계속 확인하게 된다.
벌써 하루가 흘렀다. 새하얀 수의로 갈아입고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조금의 고통이 없었던 걸까?
“네가 여기 누워 있으면……. 내가 남은 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거냐.”
맞잡은 손의 온기도 식은 지 오래다.
“그냥 기다리지 그랬어. 버티기 너무 어려웠으면 내가 해도 됐었다. 그런데 왜 네가 굳이……. 왜 네가 그래야 했던 거냐, 캐서린.”
손등의 온기를 붙잡고 싶은데 점점 멀어져 간다. 평소 그대로 잠든 것 같은데,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