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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07)화 (107/129)

107.

캐서린은 씁쓸히 웃었다. 이곳에 홀로 남을 로렌디스가 걱정이다. 그녀가 이대로 떠나 버리면 원망만 잔뜩 사겠지. 그런 생각이 들수록 캐서린은 세이렌의 어깨를 움켜 쥔 손에 힘을 줬다. 세이렌이 움직이려는 게 느껴졌지만, 캐서린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미안하지만 너는 어디 못 가. 내가 네 목덜미 쥐고 저승 앞까지 걸어갈 거거든. 저승길 외로워서 길동무를 택했거든. 같이 가자.

“헬렌은 놔둬.”

이 땅이 짓밟히는 건 도저히 못 보겠다.

“……왜, 왜 이런 거지?”

“야만족은 나랑 로렌디스를 공격하면 안 돼.”

“뭐?”

“일종의 금기지. 야만족은 우리와 공멸을 택했지만, 파멸하는 건 한쪽이면 충분해.”

세이렌도 무언가를 직감한 것 같았다. 그녀의 비명이 아찔하게 울려 퍼졌다. 마지막 발악처럼 새된 비명이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그리고 그때. 낙뢰가 쳤다. 아, 이거는 예전에 넨시와 하녀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녀의 숨이 멎었던 순간, 헬렌 밖은 낙뢰와 눈보라로 어수선했다지.

뎐트는 그게 야만인의 저주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태초의 설인이 어린아이 페레타를 씹어 먹은 죄로 받은 저주 말이다. 야만족은 북부의 주인을 해쳐선 안 되며, 이런 금기를 어기면 거기에 따른 벌을 받게 된다.

안개가 더 가득해졌다. 눈앞의 시야를 다 가릴 만큼 땅을 뒤덮었다.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듯 몸을 덮었다.

‘그들을 구하려던 내 선택이 오히려 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세이렌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창백한 손끝에 미세한 얼음 조각이 내려앉았다. 경악한 눈동자가 크게 뜨이고 입술이 험악하게 찢어졌다.

“당신이 졌어. 폐후.”

다들 미안해. 내가 떠난 뒤를 부탁할게. 야만족의 저주가 세이렌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북부의 가호와 야만족의 저주가 맞물렸다. 야만족은 설원의 금기를 어겼고, 이제 심판이 시작된다.

세이렌의 머리에 눈송이가 작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서서히 얼어붙었다.

저주가 야만인들의 몸을 서서히 좀먹었다. 캐서린은 고개를 힘겹게 돌렸다. 기사단과 싸우던 야만인들의 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이제 끝인가?’

세이렌의 손끝 역시 서서히 얼어붙었다. 손톱에서부터 얼어붙어서 손가락까지 타고 올라, 손목까지 얼음이 뒤덮었다. 나중에는 팔뚝 어깨까지 타고 올라 목까지 그대로 얼었다.

세이렌은 악귀처럼 구겨진 얼굴로 캐서린을 노려봤다. 찢어진 입술로 험악한 욕을 하는 것 같은데, 이제는 의식도 흐릿해서 들리지 않는다.

‘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다. 그건 소름 끼치리만큼 높고 새된 울음소리였다. 캐서린의 시야도 점점 어둑해졌다. 검게 점멸되는 의식 속에서도, 캐서린은 세이렌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나랑 가자.”

캐서린은 혼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안개가 일제히 걷히는 걸 봤다. 구름이 서서히 옅어지고, 빛이 갑자기 쏟아졌다.

눈앞의 세이렌이 눈을 뜬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은 야금야금 살을 뒤덮었고, 세이렌의 독기를 그대로 품었다.

얼음은 쩌저적― 하며 갈라지더니 서서히 금이 갔다. 조각났다. 조각난 얼음은 머리 위에서부터 먼지처럼 흩어졌다.

먼지라기에는 은은히 빛나는 알갱이 같은 게 예쁘다. 캐서린은 희게 전멸되는 의식 속에서도 폐후의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

“마님! 마님! 안 됩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 * *

로렌디스의 팔이 우뚝 멈췄다. 기함한 부기사단장이 그의 앞으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눈앞의 놈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이게, 뭡니까?”

로렌디스는 팔을 멈추었다.

“무엇이냐.”

이건 다른 누군가에게 묻는 게 아니다. 너는 이미 답을 알잖아. 로렌디스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지반이 흔들리며 눈보라가 몰아닥쳤다. 로렌디스와 일행들은 갑작스러운 이변에 몸을 납작하게 낮췄다.

로렌디스의 시선이 땅 밑을 향했다. 쩌적쩌적 갈라지던 땅이 서서히 금이 벌어지고,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아악!’

처절하면서도 끔찍했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았고, 이명으로 멍하던 귓속이 찢어진 듯 아파 왔다.

그들을 에워쌌던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검은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자 기사들이 멍하니 칼을 내렸다.

놈들은 서 있던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으로 빚은 동상처럼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설원을 가득 채웠다.

짐승처럼 몸을 들이박던 놈들이 설원 아래에서부터 먼 위까지 서서히 얼어붙었다.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혼란스럽게 눈알을 굴리던 기사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거, 본 적 있지 않으냐?”

“그러게 예전에 한 번 봤던 것 같은데요.”

어수선한 주변을 살피고서야 로렌디스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 들어갔다.

“캐서린…….”

얼어붙은 얼음이 조각나서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 또한 익숙했다. 흩어지는 먼지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설원은 고요해졌다. 얼어붙은 듯 고요해진 설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헬렌의 주인이 귀환했다. 로렌디스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그대로 굳었다. 헬렌의 성벽에 금이 갔고, 외성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도 없다.

“각하……! 오셨습니까!”

경비대가 로렌디스와 일행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외성을 보수하던 인력 중 하나였다.

“내성으로 급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로렌디스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내성까지 달리는 길은 고요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창밖으로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렌디스가 내성 앞에 도달하자 경비대가 내성 문을 급하게 열었다. 그는 본성까지 곧장 달렸다. 대저택 앞에서 내리자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

“…….”

“무슨 일이냐 물었어.”

로렌디스는 곧장 부부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침실 안은 엉망이었다. 검붉은 선혈 자국이 침실 바닥에 그대로 남았다. 무거운 걸음이 천천히 떨어졌다. 로렌디스는 숨을 골랐다.

침대에는 흰 캐노피를 내려놨다. 로렌디스가 곁으로 다가서자, 데니스 교수가 옆으로 비켰다. 그는 캐노피를 손등으로 들췄다.

“밖에 누구 있느냐?”

“각하, 브레디입니다.”

로렌디스는 그녀의 머리칼을 더듬었다. 아직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로렌디스는 손을 내려서 그녀의 가슴께를 짚었다. 피를 흘린 것 같다. 그것도 다량으로. 더러워진 드레스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뺨과 피부를 눈에 담아내고, 로렌디스는 천천히 침대 옆에 앉았다. 더듬거리는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아직 온기가 있는데 누가 설명이라도 해야지 않나?”

서슬 퍼런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브레디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긴 설명이 이어졌다. 세이렌과 야만족이 외성 앞까지 밀려 내려왔다고.

설원 너머로는 무언가가 각하의 발목을 잡아 두었고, 그대로 외성이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그 뒤의 설명까지 들었을 때는 모든 게 설명됐다. 멈춰 버린 호흡이 설명해 준다. 숨이 끊겼다고.

조금 전까지 입맞춤하고 기다린다던 사람의 숨이 끊겨서, 혼자서 여기 누워 있다.

로렌디스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그녀의 뺨을 짚었다. 따뜻하기만 하던 온기가 서서히 식어 가는 것 같다.

“사망하셨습니다.”

데니스의 사망 진단이 떨어졌다.

“아아.”

로렌디스는 그녀의 앞에서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얼굴로 누워 있지 마라. 못 잔 잠 미뤄 잔다고 이야기해도 되니까, 그냥 잠든 거라고 하란 말이다.

* * *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기분이 이럴까. 점점 더 아래로 추락한다. 이대로 진짜 끝일까? 억울한 건 아닌데 이대로 끝이면 남은 그들은 어떡하지.

서서히 추락하던 몸은 깊은 물속에 빠졌다. 허우적거릴 힘도 없다. 맥없이 흘러가는 대로 놔뒀다. 모든 감각이 멈춰 버렸다.

‘죽었나?’

삶을 되짚으면, 캐서린은 두 번의 삶 모두 덧없이 흘려보냈다. 이번 생도 지켜 내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누군가의 삶은 지켜 냈으면 그거로 됐지.

왜 나였을까? 그런 기분도 든다. 결국에는 두 번 모두 죽었으니까. 두 번 모두 단명할 팔자였구나.

“멍청한 것.”

욕하지 마요.

“스스로를 멸해서 뭘 지켜 보겠다고.”

결과적으로는 지켜 낸 게 맞잖아요.

“미련하긴.”

누가 그녀를 욕하는 것도 같다.

“진짜 보러 왔네요.”

캐서린이 작게 웃으며 속삭이자 누군가 물 위를 밟듯 천천히 내려앉았다. 온통 검은 세상 속에서 그만큼은 뚜렷했다. 은발이 나부끼듯 살랑거리고 도포 자락이 가만히 있어도 펄럭거렸다.

“그래서, 당신이 예고했던 격변은 찾아왔나요?”

“그래.”

“헬렌은 잘 이겨 냈나요?”

“성벽은 무너졌다. 무너진 성벽에 사람이 여럿 다쳤다. 설원과 일대는 산사태로 아수라장이 됐고, 무너진 잔재들이 쏟아져 내려서 짐승들의 거처를 덮쳤다.”

캐서린은 표정이 굳어 가는 걸 가까스로 참아 내며 되물었다.

“그들은 죽었나요?”

“몇몇은 죽었겠지. 그런데 네가 살리고자 하는 이들은 살았다. 성벽은 무너졌지만 헬렌이 짓밟히는 건 막았다. 산사태로 아수라장이 됐지만, 헬렌의 기사단과 네 남편은 자리를 피했다. 그것으로 너는 만족하느냐?”

살 사람들은 살았다. 그럼 나는 그거로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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