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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06)화 (106/129)

106.

지금 야만족은 세이렌에게 통제되고 있다. 그런 직감이 든다. 세이렌이 스스로 통제하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긴 은발과 적안과 연관됐다는 부분은 알겠다. 그 정답은 세이렌이 들고 있겠지.

“마님 떨어지십시오!”

브레디가 손을 뻗을 때, 캐서린은 그대로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높은 성벽에서 몸이 빠르게 추락하고, 아래에 있던 2소대 기사단이 그녀를 받아 안았다.

“미쳤습니까! 여기를 왜 뛰어내리는 겁니까!”

“역시, 로렌디스의 기사단이라서 그런가? 내게 미쳤냐고 묻는 게 아주 자연스럽네요.”

캐서린은 밑으로 내려 달라 부탁해서 스스로 땅을 짚고 섰다.

“이런 무모한……! 정신 나간 짓을 해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건!”

“그대들도 하는 일이잖아요.”

“우리 목숨과 마님 목숨이 같습니까!”

당신들 목숨과 내 목숨이 다를 건 뭔가요. 캐서린은 되묻지 못하고 속으로만 읊조렸다. 캐서린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조금씩. 조금씩. 눈이 덮인 땅은 걷기도 어려웠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캐서린이 걸음을 딛자 세이렌의 미소가 깊어졌다. 히죽 웃으며 우리를 비웃었다. 폐후는 일대를 뒤덮은 야만인에게 이야기했다.

“헬렌의 기사들을 막아라.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놈들의 발목을 붙잡아놔.”

세이렌이 하는 이야기에 성문을 들이박던 야만족들이 기사단과 경비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발아래에 야만인의 시신이 쌓이고 또 쌓였다. 야만인은 기사단의 행로를 막으면서도, 캐서린의 앞길을 열어 두었다.

마치 세이렌에게 계속 걸어가라는 듯. 세이렌에게 가는 앞길이 열렸다.

캐서린은 세이렌을 찬찬히 눈으로 살폈다. 세이렌의 드레스는 구겨져서 너저분했고, 어깨와 팔뚝의 옷자락은 죄다 찢겨서 너덜거렸다. 제국의 지고한 황후였던 흔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얼른 와요, 헬렌 부인.”

“…….”

“기다렸어요.”

읊조리는 목소리가 음습했다.

* * *

로렌디스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한기가 평소와 달라.”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군요.”

북부의 추위가 유명하다지만, 사시사철 추위를 몸소 겪는 북부인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이었다. 설원에서 야만인과 싸우고 주둔지를 지켜오던 건 북부의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그래서 북부는 북부를 수호하며 그만큼의 권한을 누려 왔다.

“한기가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잖아.”

“안개가 짙어지면서 점점 더 그러는 것 같습니다.”

야만인의 검이 살갗을 스칠 때면 이 한기가 더 독해졌다. 살갗을 파고들다 몸 어딘가의 기운에 부딪쳐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립된 것 같습니다.”

“아래로 사람 내보내려고 시도해 봤나?”

“네. 두 명 정도 내려 보내려고 시도해 봤는데, 안개가 짙어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설원에서는 이미 1소대 기사단 중 일부를 내려 보내려고 시도했다. 헬렌의 내부 상황도 확인해 봐야 되니까. 그런데 밑으로 내려 보냈던 기사단이 다시 올라와서는 내려갈 수 없다는 말을 전해 왔다.

“안개를 뚫고 보냈다간, 아래에 도착하기 전에 길을 잃어서 본대에도 합류하지 못할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로렌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결정했다.”

괜한 모험을 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는 안위부터 챙기는 게 맞다.

“헬렌의 상황을 보고 와야 될 건데…….”

“2소대를 남겨 두었잖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헬렌의 가족들을 걱정하는 건 다 똑같다. 기사단은 걱정을 겉으로 내색하는 대신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로렌디스는 야만인의 목에 칼날을 박고 비틀었다.

“버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저희도 각하만큼은 아니더라도 악바리가 있습니다.”

불안감이 속에서부터 싹텄다. 어디서 시작된 불안감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머리 위입니다! 각하! 피하십시오!”

부기사단장의 외침에 로렌디스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눈 속을 구르는 몸이 차게 식었다. 이명이 길게 이어지고, 로렌디스는 손끝이 점점 저릿해졌다.

그건 추위 때문이 아니다.

본능에서부터 무언가 경고해 온다. 일이 잘못 흘러간다고.

* * *

캐서린은 천천히 발을 디뎠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러는 것 같다.

‘알아요. 나도 위험한 거.’

얼마나 무모한 줄도 다 안다. 그런데 말이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군가 한 사람 희생하는 것 또한…….

‘괜찮은 선택지이지.’

북부의 가호니 야만족의 저주이니, 그런 이야기가 밖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결국에는 희생이다.

단 하나의 희생이 이곳을 더 이롭게 한다. 누군가 여기서 피를 흘린다면, 여기서 목숨을 바쳐 스스로를 처형대 위에 올려 둔다면 해결된다.

이 사실은 그간 함구되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등 떠밀려 희생물로 던져지는 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나는 등 떠밀려 나온 게 아니에요.’

멀리 서 있는 뎐트의 표정이 보인다.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캐서린이 읊조리는 이야기에 세이렌이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왔군요. 드디어 여기까지.”

눈앞에서 본 세이렌은 이질적이었다. 뎐트에게서 풍기던 기운과 비슷했다. 그녀가 알던 사람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무언가’를 보는 기분이었다.

“모습이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주 사소한 차이일 뿐이지.”

세이렌은 사소한 차이라 이야기했지만, 사소한 차이에서 오는 극명한 변화가 있다. 가까이서 본 피부도 희게 질렸다. 그건 산 사람의 피부가 아니었다. 창백한 손등에서는 핏기가 가셨고, 그래서 화려한 드레스가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붉은 드레스는 정교하게 수놓은 레이스를 겹겹이 쌓아서 드레스 아래를 풍성하게 부풀렸다.

“너무 보고 싶었어. 이곳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 저 완고한 성벽이 허물어지는 모습은 또 얼마나 경이로울까?”

놈들이 머리로 성벽을 들이박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이 땅이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네요.”

“그래요. 헬렌이 짓밟히고 북부가 짓밟히고 제국 땅이 쓰러져 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건물이 불에 타고, 살려 달라 애걸복걸하는 모습이란……. 무척 아름다울 것 같군요.”

황후로서의 책무는 잊은 지 오래다. 지금 이 사람은 제국의 황후가 아닌, 설원의 야만인이다. 캐서린은 떨리는 손아귀로 세이렌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린다. 헬렌의 성벽이 서서히 무너지려는 듯, 두꺼운 벽이 아래서부터 갈라졌다. 금이 간 성벽이 위태로웠다.

그때 불쑥, 세이렌이 말했다.

“울어 봐.”

캐서린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에 웃었다.

“미안하게 됐어, 폐후.”

영지 앞에 흩뿌려진 피, 이들에게 괜한 희생을 짊어지게 하면 안 됐다. 검을 휘두르는 이들의 몸짓이 점점 다급해졌다.

캐서린은 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성벽을 보호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점점 더 절박해졌다. 절박함에 압박감까지 더해졌다.

제 영지와 영지민을 지켜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란 뭘까? 압박감에 짓눌린 이들의 어깨가 유독 무거워 보였다.

“마님, 그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젠장, 성벽……! 놈들이 또다시 성벽을 공격한다!”

“이 새끼들 죽든 말든 일단 머리로 성벽부터 들이박고 보잖아!”

가슴에 도끼가 박힌 기사는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 성벽을 수호하는데 더 필사적이었다. 눈앞에서 기사들의 목숨이 덧없이 쓰러져 간다.

‘미안해.’

우리에게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런데 이제는 남은 시간이 없다.

시한부였던 몸이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그녀에게 다시 허락된 삶을 조금 더 이어 갈까도 해봤다. 그런데 아무래도 힘들지 싶다.

‘미안해. 다들.’

세이렌이 비틀대며 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주웠다.

“너희가 졌어.”

“그래. 확실히 진 것 같아.”

“이 땅은 곧 짓밟힐 거야. 내가 갖지 못했으니, 이 땅의 모든 것을 밟아 주마. 그래도 걱정하지 마렴. 너는 어차피 죽어서 보지 못할 것 같으니까.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헬렌을 말이다.”

세이렌은 짐승을 죽이듯 손쉽게 캐서린의 몸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캐서린은 더듬거리며 세이렌의 손목을 붙잡았다.

솜씨는 서툴렀다. 그런데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몸을 꿰뚫은 검은 그대로 등 뒤를 관통했다.

통증으로 캐서린의 눈앞이 새까매졌다. 아파. 이건 진짜 너무 아프잖아. 숨이 천천히 차올랐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호흡이 불안정했다.

“더럽게 아프네.”

너는 지금 환희에 젖어 있다. 이 싸움이 너의 승리로 끝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틀렸다.

헬렌이 짓밟히게 두지 않는다. 북부가 무너지는 일 또한 없다. 적어도, 내 앞에서 영지민들이 고통 속에 울부짖는 일은 없다.

캐서린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세이렌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검을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제대로 비틀어. 그래야 죽지.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면 비틀어서 조각내듯 베어 내란 말이야.”

세이렌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낀 듯 그대로 손을 놓으려 했다. 캐서린은 세이렌의 손을 맞잡고 칼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통증으로 눈앞이 전멸하는 것 같았다.

삐거덕거리던 가호와 저주가 맞물렸다. 뻐근하다. 좀 아픈가? 머릿속이 혼미해지는 것도 같고. 원망도 들을 것 같고.

캐서린은 더듬거리며 세이렌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강하게 당겨서 끌어안았다.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파멸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세이렌이 입술을 달싹였다. 작게 미소 짓던 입꼬리가 괴이하게 비틀렸다. 세이렌이 손을 빼내려 뒷걸음쳤지만, 캐서린은 그런 세이렌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죄인은 나와 같이 가야지. 저승길 길동무쯤은 해 줄 테니까. 헬렌은 이대로 놔두고, 우리끼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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