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나를 안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캐서린도 멀리서 보이는 저 얼굴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긴 은발만 뺀다면 말이다.
황궁에서 족적을 감췄다던 폐후. 세이렌이었다. 캐서린은 멈춰 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은발은 야만족 지배자 혈족의 상징이었다.
‘폐후가 왜…….’
족적을 감췄던 폐후가 헬렌 앞에서 나타났다. 캐서린은 익숙한 면면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서늘한 한기가 살갗을 찔렀다.
따끔한 통증이 퍼졌다. 아파. 캐서린은 목덜미를 짚었다. 얇은 종이에 베인 것처럼 선혈이 흘렀다.
“마, 마님! 피가!”
넨시가 다급하게 손수건을 가져와 목덜미를 감쌌다. 캐서린은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았다. 머리가 점점 멍해졌다.
‘왜?’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왜 여기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이 왜 거기 있어?
폐후가 맞는 것 같다. 다시 보고 또 봐도 폐후, 세이렌이다.
“마님 넋 놓을 때가 아닙니다!”
브레디가 다급하게 캐서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얼른 여기서 내려가십시오! 여기는 위험하겠습니다. 규격 외의 존재입니다. 괜한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습니다!”
“그간 북부 사람들 중에서 야만인, 그러니까 설원에서…… 야만인이 돼서 내려온 적이 있나요?”
이런 일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부터 확인해야 된다. 캐서린이 묻는 이야기에 브레디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성벽을 손으로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긴장감이 어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로렌디스는 지금 설원에 나가서 없다. 이 성에서 최고 결정권자는 로렌디스가 아닌 캐서린 그녀였다. 설원 너머에서는 세이렌이 웃으며 이곳을 보고 있었다. 멀리서 입술을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헬렌……. 헬렌이라, 빌어먹을 헬렌…….”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 없는데도, 귓속에 저주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렌의 너머로 무언가 우글우글 내려왔다. 야만인이 개미떼처럼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쿵쿵쿵, 하는 묵직한 발걸음이 울렸다.
저 야만인들을 이끄는 자가 세이렌이라는 듯이.
“젠장! 마님 아래로 내려가십시오! 놈들이 성 앞까지 왔습니다! 주둔지가 뚫린 것 같습니다.”
지금은 폐후지만 한때는 황후였다. 제국의 어머니였던 몸으로, 제국의 방패를 직접 공격한다고?
브레디가 한 번 더 캐서린을 재촉했다. 그는 여기서 더 늦장 부리면 안 된다고 단호히 경고했다.
“각하께서는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캐서린은 그때까지도 세이렌에게 온 신경을 빼앗겨 있었다.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저 안개도, 저 야만인도 폐후의 작품이구나. 야만인이 폐후의 뒤에 집결했다.
“로렌디스가 뚫린 게 아니에요. 그들은 그냥 발목이 묶인 거예요. 저 야만족은 폐후가 부른 것 같네요.”
주둔지가 뚫렸다기에는 설원에서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다. 한 명이라도 와서 상황을 알릴 법도 한데, 설원에 오른 이들 중 누구도 헬렌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야만족이 집결하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저들은 하나둘 모여서 하나의 군대를 이뤘다.
긴 은발이 날리고 세이렌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고 나른하게 웃는 모습이 기괴했다. 그게 꼭 이쪽을 보며 비웃는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하찮은 이들을 내려다보는 눈짓이었다.
캐서린은 작게 웃었다.
“뎐트가 예고하던 격변이 이거였을까요?”
이걸 답해 줄 사람은 여기에 없다. 뎐트는 자취를 감췄고, 모든 의문은 캐서린이 홀로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캐서린은 손가락을 긁어쥐었다. 손가락을 얼마나 억세게 움켜쥐었으면 손톱이 손아귀를 파고들었다.
로렌디스, 로렌디스……. 당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 성을 내가 지킬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뎐트가 봤다던 미래도 이랬던가요?’
지난 과거에도, 내가 죽고 없던 과거에도 헬렌은 이런 일을 겪었던가요?
“답을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뭘 위해서 싸우고, 뭘 위해서 이 땅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야만족과의 싸움은 도대체 누굴 위해서 이어져 온 건가요? 로렌디스, 우리는 왜 여기서 싸우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헬렌의 외성 경비대가 성벽 밖으로 뛰어 내려갔다. 외성 성문을 열면 혹시나라도 야만족이 성안으로 침입할까, 경비대는 밧줄 하나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로렌디스도 저번에 그러더니, 여기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위기감이 없는 것 같다.
“목숨을 내놓는 걸 무서워 마라. 우리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각하와 헬렌의 기사단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두어야 한다!”
모두를 물리친다는 마음으로 뛰어내린 게 아니다. 저들은 목숨을 걸고, 떠났던 일행들이 돌아올 때까지 버틴다는 마음으로 덤벼들었다.
내성에서 대기하던 2소대 기사단이 도착했다. 2소대가 성벽에서 뛰어내려서 경비대 일행에 합류했다.
캐서린은 성벽에서 천천히 물러섰다. 이 전쟁은 언제까지 이어지려는 걸까? 뎐트가 끝이 곧 다가온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긴 했는데, 이런 의심이 든다.
‘끝이 나긴 할까?’
천여 년 가까이 이어진 다툼이다. 끝이 과연 있을까? 변화는 갑작스러웠고, 이런 변화를 준비하기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 미미하게 느껴진다.
‘안개 너머로 나타났다던 야만인이라…….’
페레타가 기록한 건 그의 기억이다. 기억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기 쉽지만, 그렇다고 그게 다 거짓이라는 건 아니다.
“저 모습을 보니까 진짜인 것 같네.”
넨시는 성벽에서 안 내려가는 캐서린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렸다.
“왜 계속 여기 계시는 겁니까? 마님, 당장 내려가셔야 합니다. 내성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지금 마님의 안위에 문제라도 생겼다간 더 큰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굉장히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몰라.”
캐서린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돼.”
“무슨, 말씀입니까?”
“저 앞이 무너졌을 때 외성 앞이 침범당하는 상황은 막아야 할 것 아니니.”
넨시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넨시가 굳이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
뎐트였다면 캐서린의 머릿속을 곧장 읽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야만족의 저주에 대해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끝난다라.’
캐서린은 가호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 땅이 그녀를 북부의 주인으로 인지하고 수호한다는 뜻이었다.
뎐트가 말한 대로 가호와 저주가 진짜 있다면, 누군가의 목숨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전쟁이었다.
‘이걸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았을까?’
뎐트는 이미 알았다. 그런데, 왜 이제야 이야기했을까?
‘북부의 주인 중 누구도 몰랐던 이야기 같은데.’
북부의 주인 중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미련한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전쟁을 끝냈을 거다.
쾅― 성벽이 울렸다. 야만족이 몰려 내려와서 머리로 성벽을 들이박았다. 무식하다면 무식했다.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달려드는 꼴이 사람이라기에는 괴기했으니까.
땅 아래에서부터 큰 굉음이 계속 연이어 이어졌다. 꼭 이곳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캐서린은 그녀의 뒤를 지키고 선 브레디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들에게 이런 힘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땅 밑에서 울리는 굉음이나 안개처럼, 저런 건 본 적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눈보라나 안개가 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기상이변입니다. 저건, 누가 인위적으로 일으킨 겁니다.”
브레디도 눈앞의 안개와 지진이 자연스러운 쪽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고 있었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워서 함구했을 뿐이다.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쾅― 성벽이 한 번 더 울렸다. 이 진동은 땅 밑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렸다.
성벽이 아래쪽에서부터 금가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해.’
직감이 말해 준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지났다고. 기다림이 더 길어지는 건 의미 없는 희생을 더 늘리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상황이 다급해지면, 로렌디스도 기사들의 희생을 눈 뜨고 볼 리 없다.
“로렌디스는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많으니까, 누군가 희생한다면 그건 내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로렌디스는 남아서 할 일이 있다.
‘내가 떠난 뒤를 부탁해요, 로렌디스.’
혼잣말이 점점 늘어났다. 캐서린은 시선을 멀리 뒀다.
“있네.”
저 멀리서 뎐트가 보고 있다. 까마득하게 먼 곳이지만, 왠지 그곳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캐서린은 성벽에서 등을 돌렸다.
“마님?”
넨시가 캐서린을 불렀다.
“잘 끝낸다면 다행이겠지만 말이다. 혹시나 일이 잘못된다면 다른 이들이 아닌 나를 원망하렴.”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헬렌이 굉장히 좋아. 이곳이 좋고 제임스나 데니스, 그리고 너희에게는 미안한 일들이 많아. 죽고 싶다던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나온 게 너희였으니까.”
로렌디스가 차지하는 영역도 크지만, 너희가 차지하는 영역 또한 크다.
“고마웠어.”
“마님께서도 참, 무슨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넨시가 고요히 읊조리는 이야기에 브레디는 직감한 듯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