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주둔지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설원에서 야만족들이 내려와서 주둔지에서 마찰이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기사단 재점검하고 곧장 떠날 준비해 놔.”
로렌디스는 부기사단장을 불러 기사단을 재정비하고 갑옷을 챙겨 입었다. 캐서린은 그런 그를 뒤에서 배웅했다.
막 로렌디스가 갑옷을 다 입은 참이었는데, 땅이 크게 한 번 울렸다. 쿵― 그건 무언가 땅 위에 내려앉는 소리 같았다.
묵직한 진동은 지진 같기도 하고, 무언가 무너진 소리 같기도 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뒤에 세워 두고 본성 밖으로 나갔다.
“눈보라가 왜…….”
“무언가 잘못된 건가요?”
“일단은 나가 봐야지 알겠어. 뒤를 부탁할게.”
로렌디스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끝냈다.
기사단이 본성의 앞에 집결했다. 다들 익숙하게 갑옷을 갖춰 입고 말 위에 올랐다.
“늦어질지도 몰라.”
캐서린은 피식 웃었다.
떠날 때면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
“일찍 오리라 기대하지도 않아요.”
로렌디스는 말에서 다시 내리더니, 갈급한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혀가 매끄럽게 입안을 가로지르고, 치열을 더듬었다. 츱츱. 갈급하게 탐하고 적셨다. 턱을 쥔 손이 서서히 목으로 내려가더니 목덜미를 짚었다.
목덜미가 뻐근해져서 목을 뒤로 젖히자, 목덜미를 짚은 손아귀가 도망가지 못하게 그녀를 붙들어 두었다. 입 밖으로 흐르는 타액마저도 모두 삼켰다. 탁한 숨결을 탐하고, 혀를 얽으며 달랬다.
“큼큼!”
부기사단장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로렌디스는 입술을 뗐다. 캐서린은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온갖 시선들이 두 부부를 향했다. 로렌디스는 익숙하게 시선을 받아 내며 다시 말 위에 올랐다.
―츱
말 위에 오르더니 또다시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다녀올게.”
캐서린은 두 손을 더듬거리며 잡았다.
“조심히 다녀와요.”
“기다려.”
로렌디스가 하는 이야기에 캐서린은 잠시 멈칫했지만 매끄럽게 답했다.
“응. 기다릴게요.”
“착하다.”
로렌디스가 두터운 팔을 내려서 캐서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감각을 하나하나 되새기듯 눈을 고요히 감았다. 캐서린은 그의 침묵을 같이 따라서 즐겼다.
* * *
멀리 눈보라가 일었다. 외성 성문이 열리고 로렌디스와 일행들이 빠져나갔다. 말굽이 거칠게 땅을 박차고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먼지가 일었다.
“마님, 뭘 보고 계시는 겁니까?”
“넨시 눈에는 안 보여?”
캐서린은 넨시의 옷자락을 당기며 성벽 너머를 손짓했다.
“안개가 점점 다가오고 있잖아.”
“저게 무슨 일이랍니까?”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외성 멀리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았다. 눈보라와는 다르다. 거칠게 주변을 휩쓰는 게 아니라, 차츰차츰 잠식하는 것 같았다.
“마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넨시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브레디! 거기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영지민들에게 일러서 한동안 바깥출입을 조심하라 이야기해 둬요! 저거, 이상해요. 꼭 이 주변을 잡아먹는 것 같아요.”
무언가 점점 다가온다. 그리고 오싹한 한기가 살갗을 쓸었다. 이건 이때까지 느껴 본 무언가와는 달랐다.
무언가 그녀를 통과해서 지나간 것 같았다.
머리 위로 먼지인지 눈인지 모를 것이 내렸다. 캐서린이 고개를 들자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도서관…….”
캐서린은 작게 읊조렸다.
“도서관에 다녀와야겠어요.”
멀거니 허공을 보던 주인마님이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자, 불안해지는 건 아랫것들이었다.
“마님,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감이 안 좋단 말이에요.”
책이나 글귀로 알 수 있는 사항도 아니었다. 책에 적힌 건 과거의 편린이다. 과거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조각내서 담아 둔 꼴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은 현재의 눈으로 해석하기 어려웠다.
캐서린이 가주의 도서관으로 들어가자, 브레디가 따라 들어왔다. 로렌디스의 직속, 총괄 보좌관이라서 가능했다.
“찾으시는 부분을 말씀해 주십시오.”
“설인 설화예요! 과거……. 설인들이 저주를 받았을 때 시점으로 적힌 이야기들이나, 고대에 학자들이 적어 둔 이야기나, 아무거나 일단은 가져와요.”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그런 판단들은 나중에 해도 될 일이었다.
“마님 혹시 오늘과 같은 일이 과거에도 있었을까 찾는 겁니까?”
“일단은요. 비슷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저 서적들은 금서라서 제가 읽을 수 없습니다. 가주 내외에게만 허락된 금서입니다. 그런데,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지금과 같은 일이 고대에 있었다고 기록된 바는 없는 줄 압니다.”
브레디가 창밖을 내다보며 덧붙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역사서에 나왔을 겁니다. 역사서가 아니라면, 북부의 주인에게만이라도 말에서 말로 전해졌을 것이고요.”
캐서린은 탁자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머릿속이 차게 내려앉았다. 하나둘셋. 호흡을 가다듬고 브레디에게 웃어 주었다.
“일단은 나가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필요해지시면 다시 불러 주십시오.”
무언가 변화가 찾아온다. 이 변화의 시작은 어디일까? 시작을 찾는다면 모든 일의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
‘페레타 왕조’
페레타 왕조의 설립과 기록들. 페레타가 진짜 설화 속에 나오는 ‘아이’ 본인이라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자.
페레타 본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본인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처음 눈을 떴을 때 어땠을까?
‘처음부터 다시 접근하는 거야.’
캐서린은 저번에 읽었던 금서를 다시 꺼냈다. 페레타 1세의 일대기였다. 뎐트를 기다리다 숨을 거뒀던 페레타라면, 그간의 일을 기록해 뒀을 것이다.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누군가는 볼 거라 믿으며 기록으로 남긴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본다면 그건 적어도 훗날의 후손들이거나, 아니면 페레타 왕조가 무너진 뒤에 자리 잡은 왕조일 테지.]
[설원의 야수들이 등장하기 전, 하늘에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았다. 그곳을 뚫고 야수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들은 살과 피를 탐했고…….]
캐서린은 읽던 책을 덮었다.
“안개가 내려앉고 야수들이 내려왔다라.”
여기서 야수는 야만인 같다. 일종의 전조 증상 같은 걸까?
뎐트는 격변을 예고했다. 그리고 이 격변이 끝나면, 이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견도 해 왔다.
그럼 야만인은? 야만인은 이 땅에서 사라진다는 뜻일까? 어디로 어떻게?
“그럼 뎐트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이것 또한 답해 주지 못할 물음이었다.
캐서린은 창가로 가서 창문을 가린 커튼을 열어젖혔다. 하늘은 희뿌연 안개에 흐릿했고, 작은 눈송이가 잘게 흩날렸다.
캐서린은 서재에서 나와서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넨시가 불안한 눈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님, 마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밖으로 나가 보려고.”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브레디가 첨언했다.
“밖이 어수선합니다. 일단은 내성 안에서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외성까지 나간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캐서린은 브레디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밖으로 나왔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에서는 이질적인 기운이 묻어났다.
“브레디, 영지민에게는 바깥 외출을 삼가라는 말을 전했나요?”
“마님께서 지시하셨을 때 사람을 보내 공문을 띄웠습니다.”
영지 주변으로 큰 굉음이 울렸다. 쿵. 쿵쿵. 일대의 대륙판이 흔들리듯 땅속에서부터 떨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뭐가 오려는 걸까요.”
캐서린의 시선이 먼 곳에 닿았다. 불안감 때문인지 브레디의 시선도 흔들렸다.
* * *
로렌디스는 뽑아든 칼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저 위에서부터 쿵쿵대며 내려오는 기척이 한둘이 아니었다.
야만족이 이 일대를 어지럽히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지금처럼 개미 떼처럼 밀려 내려오는 일 또한 흔한 편은 아니었다.
“각하! 옵니다!”
로렌디스는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앞으로 쏘아져 온 놈의 목이 떨어졌다. 로렌디스는 말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개미 새끼들도 아니고.”
우글우글 내려오는 꼴이 지겨웠다. 빠르게 검을 내지르고 놈들의 목을 찔렀다. 급소만 노리며 놈들의 숨을 끊어 놓았다.
“대열을 재정비해라! 섣불리 대열을 벗어나는 멍청한 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그들은 저놈들 손이 아니라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흥분에 겨워서 대열을 벗어나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목덜미를 내놓는 법이다. 이들의 급소만 노려서 단번에 숨을 끊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쏟아져 내려오는 야만인들과, 거기에 섞여서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
설원이 야만인의 피로 뒤덮였다. 대지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흰 눈밭이어서인지 더 눈에 도드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