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02)화 (102/129)

102.

“왔으면 부르지 왜 그러고 있어?”

“훈련에 방해될 것 같아서, 돌아가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부기사단장이 턱을 쓱쓱 만지더니, 로렌디스의 옆구리를 찌르며 ‘제가 붙잡고 있었습니다.’라고 속삭였다. 로렌디스는 못마땅하게 부기사단장을 흘겨보더니 옆으로 건성으로 밀어 두었다.

“들어와.”

훈련장 내부에도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로렌디스는 간이의자를 보더니 잠깐 캐서린과 번갈아보며 고민했다. 저기에 앉혀도 될지 고민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캐서린이 먼저 간이의자로 가서 앉았다.

“시설이 조악해.”

“기사들의 훈련을 봐 주는 곳인데 이 정도면 해도 충분한 휴식 공간이죠.”

로렌디스는 따뜻한 차를 내왔다. 보통은 보좌관에게 지시하겠지만, 훈련장 안까지 보좌관과 동행하는 건 아닌지 오늘은 그가 직접 찻물을 내렸다.

“긴 토벌이 될 거야.”

“당신만 무사히 오면 돼요.”

우리도 본능적으로 느낀 걸지도 모른다.

이 긴 전쟁을 끝낼 때가 왔음을.

“어쩌면, 우리에게도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르겠어.”

“진짜 그럴까요?”

“뎐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아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다른 건 그들도 잘 모른다.

긴 전쟁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짐작하는 게 다였다.

“무사히 끝날까요?”

“걱정하지 마. 고대 때부터 천여 년을 지켜온 땅이다. 이곳이 짓밟힐 일은 없어.”

격변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헬렌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테지.

“각하! 브레디입니다. 여기 계십니까?”

로렌디스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집무실에 있어야 할 브레디가 훈련소 건물까지 그를 찾으러 왔다.

로렌디스는 찻잔을 내려두고 브레디에게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브레디가 문을 두 번 두들기는 절차까지 생략하고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황후의 족적을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로렌디스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발견됐나?”

“설산입니다.”

“미친 건가? 제 발로 거기를 올라가나?”

행방이 묘연했던 황후의 족적이 설원에서 한 번 더 발견됐다. 제 발로 북부를 찾은 것도 괴이한데, 스스로 설원을 올랐다라.

‘진짜 죽을 자리라도 보러 왔나?’

세이렌의 행동은 말로 설명하기 난해한 부분이 있었다. 로렌디스는 추가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며 브레디와 집무실을 찾았다.

“여유롭게 차 마실 시간쯤은 될 것 같았는데 미안해.”

“바쁜 일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결하는 게 마땅하죠.”

캐서린이 괜찮다고 이야기해도, 로렌디스는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표정이었다.

* * *

세이렌은 설원을 느릿하게 올랐다. 로브를 덮어쓴 몸에 흰 눈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일평생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쥐지 못했다. 소펜가도 오라비인 제럴드가 이어받았으며, 가문에서 시킨 대로 황실과의 혼약을 올렸다.

황실 또한 얻지 못했다. 첫째 황자가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어서, 둘째 황자는 언젠가 황실을 다시 떠나야 할 몸이었다.

‘무엇 하나, 그 무엇 하나 손에 쥔 게 없구나!’

헬렌이고 황실이고. 두 세력이 굳건하다면 어차피 쥐지 못할 권력이고 이루지 못할 야망이었다. 덧없다는 사실 또한 일찍이 깨달았다.

―쿵쿵

저주한다.

이곳을 저주한다.

‘모조리 무너지길.’

차라리 모두 무너져 없어지길. 이 땅도 이곳도, 덧없이 사라지고 짓밟히길.

이곳의 안위 따위 상관없다. 사람이 죽든 말든 관심 없다. 이곳이 짓밟혀 쓰러져 가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리고, 세이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디로 걸어야 혼란과 혼돈이 이 땅에 깃드는지.

이건 본능이었다.

이 몸에 깃든 본능이 이리로 오라고 세이렌에게 이야기했다.

악의는 이유 없이 꽃폈다. 작고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됐던 악의가 스멀스멀 세이렌을 삼켰다.

―쿵쿵

설원이 진동하듯 울렸다. 땅 밑이 지진처럼 흔들리고 세이렌은 흰 눈을 긁어쥐었다. 내 몸을 멸해서 너희를 저주할 수 있다면, 이곳의 몰락을 이뤄 낼 수 있다면, 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

그리고, 그런 세이렌 앞에 긴 은발을 늘어트린 사내가 나타났다.

“어리석은 것.”

뎐트는 세이렌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설원의 저주에 오히려 네가 잡아먹혔구나.”

태초의 설인이 만들어낸 저주에 잡아먹힌 ‘그릇.’

인간은 악의와 적의에 약하다. 설원을 떠돌면 쉽게 물들기 마련이고, 그래서 설원에는 길잡이가 필요했다.

태초의 설인의 저주를 담아낼 그릇이 완성됐다. 세이렌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뎐트는 작게 웃었다.

“다시 태어났으면 조금 더 잘 살지.”

이 어리석은 것아.

“또 악의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멸하는 꼴을 보이느냐.”

태초의 설인이었지만 스스로 멸한 과거의 잔재.

천여 년을 거슬러 환생해서 다시 이곳에 섰다.

너는 무엇을 망가트리고 싶은 거냐. 무엇이 그리도 억울해 악의에 사로잡힌 것이야.

야만인은 인간과 섞이지 못한다.

황후가 그들을 써먹은 건, 과거의 잔재가 몸속에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식인으로 반신에서 쫓겨난 태초의 설인.

야만인은 태초의 설인, 야만인은 과거의 잔재에 복종한 것에 불과했다.

“격변이 시작되겠구나.”

세이렌의 머리칼이 은발로 물들었다.

“이 긴 저주가 설원을 더 물들였다간, 북부가 아수라장이 되겠어.”

설원에 깃든 저주가 과거의 그릇을 집어삼켰다. 과거의 그릇이 죗값을 더 쌓기 전에, 긴 전쟁을 끝낼 때가 됐다.

물론, 설원에 깃든 저주가 인간을 탐하는 건 아주 이례적인 경우이다. 보통 이런 ‘그릇’은 설원에서 태어난다.

설원이 불안정한 탓도 컸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또 들려온다. 뎐트는 이 몸에 깃든 악의를 읽어 냈다.

“영혼이 왜 그리 더럽혀진 거냐, 이놈아. 너 스스로 더럽힌 것이냐?”

야만인은 여기서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는다. 식인을 탐한 설인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설원에서 야만족이 죽여도 죽여도 계속 내려오는 이유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태어난다.

지금 ‘이건’ 불안정한 그릇이다. 저주와 가호의 균형이 깨지고, 저주가 북부를 물들였다.

천여 년 가까이 이어진 균형은 서서히 삐걱거렸고, 결국 설인은 인간의 그릇을 탐했다.

“나는 이곳이 좋다.”

이곳의 인간들이 좋다.

“그러니 누구보다 이곳의 안정과 평화를 원한다.”

뎐트는 답이 없는 세이렌에게 고요히 되묻고 손을 뻗었다.

“이리 오너라.”

“…….”

“이 긴 전쟁을 끝낼 때가 됐어.”

너희는 아직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 이 격변이 어디서 어디로 흘러갈지, 어떻게 망하고 어떻게 창조될지. 지긋지긋한 이 굴레를 끝낼 때가 됐다.

* * *

소펜가의 모든 게 짓밟히기 시작했다. 너덜너덜 찢겨 나갔다.

제럴드는 황망히 가문을 둘러보았다. 일하는 하인들에게는 잠시 저택을 떠나 있으라 이야기해 뒀다.

황제는 소펜가를 짓밟는 쪽을 택했다. 황실 근위대가 소펜가의 앞뜰을 짓밟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제럴드는 근위대가 그들에게 닿기 전에, 저택 안을 가로질렀다. 그의 딸아이가 머무는 방이었다. 셀레나는 그가 문을 열어젖히자 울컥하는 얼굴로 돌아봤다.

“셀레나.”

셀레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아, 아버지! 어떡해요?”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 이게 이런 식으로 흘러가서는 안 됐다. 셀레나는 본의 아니게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곳에 발을 디뎌 버린 기분이었다.

세이렌이 폐위되고 소펜가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제럴드는 얼어붙은 셀레나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폐위된 여동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딸아이는 넋 나간 인형처럼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다.

“어, 어쩝니까? 아버지께서는 다 알고 계시던 거죠?”

“무엇을?”

“황후 폐하께서 그런 야만적인 놈들과 야합이라니요? 우리 가문은 어쩌자고 그런 일을 도운……?”

제럴드는 셀레나의 입을 커다란 손아귀로 틀어막았다.

“이 아비도 안 건 얼마 안 됐어. 셀레나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저, 저는 진짜 몰랐어요.”

“세이렌과 따로 만나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을 건데, 세이렌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들은 건 없는 거냐? 네가 뭔가를 안다면 알아야 대처한다.”

“몰랐어요. 진짜 몰랐어요. 예전에 의미 모를 부탁을 받은 적은 있었는데요.”

셀레나는 꽃가루를 받아서 헬렌 부인에게 살짝 뿌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황후 폐하께 이유를 차마 다 묻지도 못했는데, 헬렌 부인에게 알러지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나중의 이야기였다.

“밉기는 해도 악의까지는 없었어요.”

“무언가, 큰일이 닥쳐올 것 같다.”

“무, 무슨 일이요?”

“그건 우리도 모르지. 다만, 북부와 황실이 경계하고 있다.”

셀레나가 울먹거리며 하는 이야기에 제럴드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셀레나.”

“폐하께서 왜 그런 짓을 한 건가요?”

“나도 모른다. 나도 몰라. 어려서부터 속을 감춰 둔 아이긴 했어도 이 정도로 몰상식한 녀석은 아니었다만.”

가문의 앞날이 문제가 아니다. 야만족에게 나라를 짓밟으라고 등 떠민 폐후의 가문이다. 지금부터는 목숨을 온전히 부지하느냐 마냐의 문제다.

이제는 황후가 아니라 더 이상 뭐라고 이름 지어야 할지도 모를 사람.

소펜가의 앞날이 바닥에 처박혔다. 제럴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손톱을 물어뜯던 셀레나는 그대로 피부가 희게 질렸다.

“헬렌, 헬렌은 괜찮을까요?”

“네가 헬렌 내외를 왜 걱정하느냐? 잘 들어 두어라.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너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셀레나, 누가 묻거든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답해라.”

소펜가에 황실의 근위대가 밀어닥쳤다. 제럴드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을 덮쳐 왔다.

근위대가 소펜가의 앞뜰을 채우고 성큼성큼 그들의 땅을 밟았다. 쌓아올린 명예가 한순간에 으스러졌다. 가문의 인장이 근위대에 발에 짓밟힐 때, 소펜가에서는 소리 없는 비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다 짊어지고 가겠다. 그러니 셀레나,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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