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헬렌에서는 긴급대책회의가 이어졌다.
보좌실에서는 폐후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로렌디스의 표정이 단조로워졌다. 수많은 고민과 갈등이 스쳐 지나가고, 표정은 오히려 담백해졌다.
“어디로 가십니까, 각하?”
“뇌옥으로 간다.”
로렌디스는 습한 뇌옥의 복도를 걸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뇌옥의 벽에 걸린 촛불이 일렁거렸다.
브레디가 빠르게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로렌디스는 혼잣말인 듯 아닌 듯 고요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근위대의 목숨도 여럿 끊겼겠구나.”
“돈 받고 빼돌린 이들의 목숨은 그 자리에서 폐하께서 직접 취했답니다.”
일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건, 그들이 바란 적 없던 일이 앞으로 일어날 거란 징조였다.
뇌옥 가장 깊숙한 방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는 지배자의 첫째 아들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놈의 웃음은 흥분에 겨워 있었다.
“드디어, 나를 죽이러 왔구나.”
분명 이놈도 제 죽음이 눈앞에 가까워졌음을 이미 깨달았다. 그런데도 놈은 기껍게 목까지 젖히며 웃고 있었다. 놈은 붉은 눈알을 희번덕 까뒤집었다.
“내가 죽으면 모두 끝났으리라 여기느냐?”
놈이 이야기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나도 알고 있다. 끝나지 않았음을.”
“곧, 그분이 오신다.”
놈은 확신에 차서 속삭였다.
“너희는 몰락할 거고.”
“…….”
“북부는 그분 손에 무너질 거다.”
로렌디스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뎐트가 이야기한 격변이 곧 도래할 것임을.
로렌디스는 그걸 끝으로 놈의 목을 벴다. 긴 은발이 허공에 흩날리고, 시신 한 구가 맥없이 쓰러졌다. 검 끝에는 검붉은 혈흔이 맺혔다.
* * *
로렌디스가 헬렌 밖으로 순찰을 다녀왔다. 갑옷을 벗은 그는 수하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더니 성큼성큼 본성으로 들어왔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본성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캐서린을 찾는 거였다. 오랜 기간 성을 자주 비워서였을까.
로렌디스는 본능적으로 어디를 다녀오면 캐서린부터 찾았다. 얼굴만 한 번 보고 가기도 하고, 캐서린이 낮잠을 자고 있으면 옆에서 잠깐이나마 쉬었다 가거나 하는 식이었다.
“잘 다녀온 거예요? 보좌관들이 요즘 당신의 빈자리가 늘었다고 점점 죽어 가는 거 같아요.”
“브레디가 유난히 고생이 많긴 했지.”
“로렌디스에게 상의할 게 있어서요. 잠시 시간 돼요?”
로렌디스가 괜찮다며 캐서린을 그의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상의할 일이라는 건 뭐야?”
“제임스 박사와 니콜에게 슬슬 결정권을 넘겨줘야지 싶어서요.”
제임스는 일방적으로 여기까지 끌려온 쪽에 가깝다. 캐서린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제임스는 진료동에서 바쁜 세월을 보냈다. 니콜도 한라원 문을 닫고 진료동에서 같이 머무르는 중이고.
“저도 몸이 슬슬 회복됐으니, 그들에게 여기 머물지 한라원으로 다시 갈지 선택할 기회를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조금 더 시기를 두고 지켜보는 게 낫지 않나?”
“아직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은 미리 생각해 두라고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임스 본인도 여기를 떠나길 바라는 것 같다. 워낙 자유분방한 영혼이라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로렌디스도 언제까지고 헬렌에 잡아 둘 마음은 없었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이야기할까?”
“아니에요. 제임스가 당신 어려워해요. 한라원 문짝 뜯어서 납치하듯 데려왔다면서요.”
“그건 내 기사들이 한 일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니었어.”
당신 기사들이 한 일이었지만, 제임스는 누구보다 당신을 제일 어려워한다. 캐서린은 이 부분을 지적하며, 제임스에게는 그녀가 직접 이야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소펜가에서는 어쩌려는 걸까요?”
“그들도 딱히 대책이랄 게 있어 보이진 않던데.”
소펜가에서는 정말 세이렌의 행방을 모르는 눈치였다. 폐후를 찾으려고 사병을 풀었던 정황이 포착됐다.
“폐후의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뜻인데 제정신인가 모르겠어.”
로렌디스는 고민하길 포기했다. 일단은 더 기다려 봐야 뭐든 나올 것 같다. 그 방향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든, 일단 헬렌이 정중앙에서 그들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 * *
캐서린은 제임스의 연구실을 찾았다. 제임스는 이유 없이 찾아온 그녀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두 팔을 다급하게 뻗고 표정을 왈칵 찌푸리는데,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도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두자고!”
이런 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우리가 그간 많이 괴롭히긴 했던 모양이다. 제임스는 뭐지, 뭐냐? 하고 캐서린에게 물으면서도 캐서린이 뭐라고 답하려고 하면 말문을 막아 버렸다.
“나도 별다른 이야기 하러 온 건 아니고.”
“아가씨가 여기 올 때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하나씩 터지는데, 내가 간이 쪼그라들지 않고 배기나?”
제임스는 포트런 마을에서 데려온 아이를 품 한쪽에 끌어안고, 네가 보기에는 뭔 것 같냐며 아이에게 되물었다. 캐서린은 푸스스 웃어 버렸다.
“보모가 됐다더니 확실히 그렇네.”
“떠맡기듯 나한테 맡겨 두고 애는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어떡하냐? 못난 제자 하나 더 기른다는 마음으로 품든 해야지.”
제임스는 툴툴대면서도, 못난 놈 쿠키 하나 더 챙겨 준다는 마음으로 거둔다며, 꼬마의 콧등을 때렸다.
포트런의 꼬마는 함묵증에 걸린 듯 말수가 없어졌지만, 다행히도 제임스 앞에서만큼은 작게라도 귓속말을 나눴다.
“니콜.”
캐서린이 니콜을 찾자 연구실 복도를 지나가던 니콜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니콜은 익숙한 얼굴에 반가워하면서도, 때아닌 부름에 의아한 기색이 다분했다.
“찾으셨습니까?”
“아이 좀 잠시 데리고 나가 줄래?”
“알겠습니다. 이리 오렴. 언니랑 연구 자료나 보러 가자.”
아이가 본다고 알 것 같지는 않지만, 아이는 흥미로운지 니콜을 곧장 따라나섰다. 제임스는 몸을 축 늘어트리며 소파에 맥없이 기댔다.
“헬렌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요즘은 또 잘 적응했나 봐?”
“나는 헬렌을 떠난다는 게 아니라, 이 집 주인님이 워낙 무서워서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어. 그런데, 이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왔어?”
제임스는 이런 이야기가 괜히 나올 리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캐서린은 이미 답을 던졌다. 제임스는 멀거니 있더니 뒤늦게 깨달은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쫓겨나는 건가?”
“응?”
“나 여기서 쫓겨나는 부분이냐고, 아가씨?”
제임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캐서린은 이런 제임스의 반응이 의아했다. 이 댁 주인 무서워서 힘들다던 게 조금 전이었다.
“예전부터 여기서 나가고 싶댔잖아?”
“그랬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쫓아내는 거 아니냐고.”
“선택권은 제임스에게 줄 거야. 떠나고 싶을 때 떠나면 돼. 그래도, 일단은 어수선한 게 정리되면 밖으로 나가길 추천해. 요즘 안팎으로 어수선하잖아. 헬렌 3번 골목도 어수선할 거야.”
한라원이 외진 골목길에 있으니 어수선한 흐름을 피해 가기 힘들다.
“나중에 제임스가 떠나길 바랄 때면 이야기해. 퇴직금까지 챙겨서 보내 줄게.”
“아가씨는 무슨 작별인사를 그 정도로 살벌하게 해?”
제임스는 캐서린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긴가민가한 기분을 지워 내지 못했다. 제임스 스스로도 느꼈다. 그는 여기에 너무 잘 적응해 버렸다.
‘물들어 버렸어.’
이 빌어먹을 집안에 물들어 버렸다. 잡혀 있을 때는 여기서 나가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근질했는데, 막상 나가라니까 이 댁 마님이 눈에 밟혔다.
‘단단히 꿰였어.’
제임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툴툴댔다.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내쫓는 것도 아니고.”
제임스도 캐서린이 뜻하는 바를 안다. 그는 한곳에 묶여 있기보다는 자유롭게 다니는 쪽에 더 어울린다.
제임스는 처음부터 강제로 끌려왔고, 니콜도 제임스를 따라서 반강제적으로 여기 머물고 있으니까.
‘선택권을 준다는 거군.’
제임스도 인정하는 바이다.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한라원에서 지낼 때도 바깥 왕진을 많이 다니던 편이었는데, 본성에 온 뒤로는 연구실에서만 거의 지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게.”
“그래. 제임스가 편할 대로 해.”
“아쉬운 거 하나 없다는 얼굴이군. 제법 오래 알고 지냈는데 말이지.”
제임스는 섭섭한 기분에 움찔했다. 이 댁 아가씨가 보내 줄 때 여기서 챙길 것들 모조리 다 챙겨서 멀리 날라야 하는데, 이 아가씨는 뭔데 또 눈에 밟힐까.
“헬렌에만 너무 머무르기도 했지.”
제임스가 작게 읊조리는 이야기에, 캐서린은 은은히 웃어 주었다.
“제임스가 잘 고민하고 결정해.”
캐서린은 제임스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연구실에서 나왔다. 진료동 내부는 의료진으로 가득했다. 최근에 캐서린이 크게 앓기도 했고, 연구 자료를 활발히 분석 중인지 퀭한 눈으로 복도를 지나다녔다.
캐서린은 진료동에서 나와서, 갑옷과 무기를 점검 중인 훈련장 건물을 지났다. 부기사단장이 캐서린을 발견하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마님 오셨습니까!”
“여러모로 바쁘군요.”
“각하께서 두루두루 평소에 잘 살펴주셔서 바쁠 것도 없습니다. 평소에 하는 일보다 손이 한두 번 더 가는 수준입니다.”
부기사단장은 특별히 더 할 일은 없다며 심상한 어조로 답했다. 허허허 웃는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우락부락한 체격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각하께서도 마침 여기 계십니다. 마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부기사단장이 안으로 들어와도 된다며 길을 열어 주었다. 캐서린은 훈련장 내부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손목 보호대를 차던 로렌디스가 별안간 고개를 홱 돌렸다. 그건 본능적이었다.
“캐서린.”
로렌디스는 단숨에 그녀를 찾아냈다. 캐서린이 훈련장 입구에서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로렌디스가 성큼성큼 걸어서 캐서린에게 다가왔다. 기사들이 물결처럼 옆으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