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먼저 떠난 아이를 그리워하는 건 부모로 어쩔 수 없다.
밀던 자작은 멍하니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관리되지 않은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집 안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아이들에게 선물했던 보석이나, 집안 살림은 비워진 지 오래였다.
자작은 2층 계단을 천천히 딛고 올라갔다. 거미줄이 쳐진 방문 앞이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그는 문을 느릿하게 열었다.
텅 빈 침실이 그를 반겼다.
그는 삐거덕거리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는 남은 흔적이라고는 이 방이 다였다.
“내가 너무 늦은 거냐.”
차갑게 식은 침대도, 텅 빈 방 안도 한적하기 그지없다. 자작은 침실 안을 눈에 담아내고 곱게 문을 닫아 두고 나왔다.
그리고, 그날 그는 그 집에서 목을 맸다.
너를 잃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
내가 너무 밖으로만 떠돌았구나.
네가 그렇게 홀로 떠나 버릴 줄 나는 몰랐어.
* * *
캐서린은 읽던 신문을 내려놨다. 로렌디스가 옆에서 안경을 쓰고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예전이라면 집무실에서 볼 서류였겠지만, 요즘 로렌디스는 잠 잘 시간이 가까워지면 서류를 들고 침실로 왔다.
캐서린은 신문을 내려 두고 침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사부작거리는 이불을 무릎까지 끌어왔다. 로렌디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안경을 벗었다.
“잠 와?”
“로렌디스 기억해요?”
“뭐를?”
“뎐트가 내게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준댔잖아요.”
로렌디스가 뎐트가 그런 이야기도 했었느냐며 곰곰이 되짚었다.
“언제 그 정도로 가까워진 거야?”
“뎐트와 더 가까운 건 로렌디스 당신이에요.”
“나랑 그놈은 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누가 내게 야만족의 뎐트를 아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이야.”
로렌디스가 말은 그렇게 해도, 뎐트와 심적으로 가깝다는 부분은 알고 있다. 홀연히 사라졌던 뎐트가 다시 나타났을 때, 로렌디스의 얼굴 한쪽으로 퍼지던 안도감을 기억한다.
“설원으로 다시 나가는 시기는 언제가 될 거 같아요?”
“주둔지에서 전보를 보내오면 그때 시기를 확인해 봐야지.”
로렌디스가 서류를 덮어 두었다.
“황후는 곧 폐위될 것 같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건 정해진 수순 같아요. 그 이후부터가 문제지만요. 제도 안팎으로 한동안 시끄러워지겠어요.”
지금도 충분히 어수선했다. 이 어수선한 정도가 나중이 되면 더 심해질 예정이었다. 일단은 헬렌 내부도 어수선했고, 주변이 어수선하면 사람들의 감정적 동요도 심해지는 법이다.
‘안정을 되찾으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겠지만.’
권세가가 휘청거리면 아래로 있는 영지민의 불안도 깊어진다. 그 예시로, 소펜가가 어수선해지자 영지민의 동요도 깊어졌다.
“뎐트에게 부탁할 일은 잘 생각해 둬. 그런 이야기를 잘 하는 놈이 아니니까.”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요?”
“글쎄. 의외로 정이 깊은 놈이라서 아쉬워하는 것 같긴 한데, 나도 잘 모르겠군. 그놈의 속은 암만 노력해도 들여다보기 힘들거든.”
본인 입으로 뭔가를 바란다고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놈이다. 바란다는 것도 작고 하찮은 쪽이었다.
썰매나 인간들의 작은 물품들을 한 번씩 받아 가는 수준이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아버지가 언제쯤 내려오실까요?”
“글쎄.”
“혼자 내려오기 힘들까요? 그때요. 뎐트에게 아버지를 돌려보내 달라 부탁할까, 싶기도 했어요.”
이건 개인적인 욕심 같아서 뎐트에게도 부탁하지 못했다. 그에게 부탁하는 일이라면, 공익을 우선적으로 하는 방향이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캐서린이 작게 읊조리자 로렌디스가 침대로 다가오며 되물었다.
“부탁하지 그랬어.”
“왠지 혼자서 잘 돌아오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달까요? 로렌디스는 뎐트에게 부모님 소식 부탁한 적 없었어요?”
로렌디스가 아득한 과거를 되짚듯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 한 번.”
로렌디스는 말끝을 흐리며 비스듬하게 턱을 기울였다. 예전이라는 건 조금 오래됐다는 뜻이다. 굳이 과거를 되짚어야 기억날 만큼 오랜 기간이 흘렀고, 로렌디스 스스로도 심드렁해진 기억이었다.
“그놈 이야기로는 앞으로도 내 부탁은 안 들어줄 거라더군.”
“어째서요?”
“예전에 이미 한 번 들어줬대. 들어줘서는 안 될 부탁이었다나 봐. 뎐트가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 게 오늘내일이 아니라서 거의 흘려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혼자 중얼거리는 건 뎐트에게 흔한 일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일 또한 아주 흔했고.
* * *
황후의 폐위가 결정 났다. 순식간에 결정 난 일에 제도가 어수선해졌다.
황후의 처분은 사약을 내리는 쪽으로 결정 났고, 황후는 현재 독방에 수감된 상태였다.
“폐하께서 직접 전서구를 보냈으니 믿어도 될 소식이다.”
로렌디스는 전서구가 가져온 급보를 보좌진 앞에 꺼내 놓았다.
“폐하께서 결단력을 보이셨군요.”
“북부를 방관하면 어떤 꼴이 날지 눈에 선했을 거니까 말이다.”
싱겁게 끝났다면 싱겁게 끝났다. 누군가는 끌려 내려왔고, 지금은 어수선할지라도 앞으로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너무 싱겁게 끝났어.’
회의실에서 전략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캐서린은 회의실 앞을 배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습 보좌관이 어색하게 캐서린에게 물었다.
“마님께서 왔다고 안에 전할까요?”
“나도 잠깐 들른 참이에요. 굳이 전할 것 없으니까 볼일 봐요.”
수습 보좌관은 언제든 필요하면 찾으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마님.”
캐서린은 복도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발걸음이 창가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다시 느릿하게 회의실로 향했다.
캐서린은 회의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복도 한쪽에서 가만히 들었다. 안에서는 북부의 경비를 재확인하고 있었다.
“국방 예산이 더 필요하겠어. 지금보다 1.5배 정도는 더 높이고, 무기나 갑옷도 확인해서 못 쓸 물건들은 분리해 둬.”
“액수를 더 높이겠습니다. 갑옷에 기름칠도 해 둬야겠군요.”
“성벽 내부 보수도 꼼꼼히 해 두고, 특히나 외성이 뚫릴 일 없도록 안팎으로 한 번 더 점검해 놔.”
로렌디스의 지시가 이어지고, 캐서린은 복도를 빠져나와서 처마 밑으로 갔다. 소복이 쌓였던 눈이 녹았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다시 한번 더 내릴 건데, 화창한 하늘에서는 눈송이 하나 날리지 않는다.
“마님.”
넨시가 캐서린을 찾아왔다.
“저택의 카펫이나 커튼을 한 번 바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벌써 그럴 때가 됐나?”
“네. 화사한 색상으로 바꿔 보는 게 어떠십니까?”
캐서린은 넨시의 이야기에 카펫과 커튼으로 쓸 원단을 확인하고 제작을 의뢰했다. 아마도 몇주면 의뢰한 물품이 올 것 같으니까, 분위기 변화를 한 번 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소펜가가 이번 일에 휘말려 작위를 빼앗겼다더군요.”
“결국은 그렇게 됐나?”
“황후께서 죄목을 직접 인정한 부분이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황후를 모시던 시녀장이 거기서 죽어 나왔다더군요.”
황실에서 은폐하더라도, 권세가들 사이에서 퍼지는 이야기까지 막기는 힘들다. 황실에서 보낸 전서구도 있으니, 로렌디스는 황실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고.
“아랫사람을 너무 쉽게 죽였구나.”
“시녀장이 직접 폐하께 밀고한 모양입니다.”
“살 길을 열겠다고 밀고한 모양인데, 그 전에 황후께서 먼저 손을 썼어.”
황후의 폐위까지 순식간에 결정된 이유에, 시녀장의 죽음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각하! 각하! 각하!”
누군가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브레디였다. 복도에서 잘 뛰는 법 없는 브레디가 로렌디스를 급하게 찾는다는 건,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마님…… 괜찮겠죠?”
“넨시는 걱정할 것 없어.”
“그래도요.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넨시가 걱정스럽게 캐서린을 불렀다. 캐서린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회의실에 다시 다녀와야겠어.”
캐서린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빠르게 회의실 쪽으로 다가갔다. 수습 보좌관이 캐서린을 보고 놀라서 길을 비켰다.
회의실 문이 열려 있었다. 먼저 들어간 브레디가 숨을 고르고 제복을 가다듬고 있었다.
“각하께 보고 올립니다. 현 시각, 폐위된 세이렌 소펜의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뇌옥에 수감된 황후의 행방이 묘연해질 일이 있나?”
“간수가 금품을 받고 폐후를 빼돌렸답니다!”
폐위된 황후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럼 저절로 이 일에 연루된 사람들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소펜가의 짓인가?”
“소펜가도 모르는 일이랍니다. 소펜 공작도 폐후의 행방을 모른다는군요.”
소펜가에서 세이렌의 행방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세이렌이 뇌옥에서 빠져나와서 사라졌다는 것. 거기에 집중할 때였다.
“각하 대비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일이 틀어질 것 같습니다.”
브레디의 경고에 회의실 안에서 나지막한 긴장감이 흘렀다. 캐서린은 배꼽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난장판이네요.”
로렌디스가 그제야 캐서린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는지 입술을 다물었다.
“캐서린 네가 왜…….”
“브레디가 급하게 뛰어가더라고요.”
세이렌은 왜 빠져나왔을까. 다 같이 죽자고 덤벼 두고 자기 목숨은 귀했을까. 그런 이유는 아니리라 본다.
캐서린은 직감했다. 황후는 제 목숨을 내던져 헬렌에 잿더미를 뿌리기로 마음먹었다고. 그 방향 또한 극단적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