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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99)화 (99/129)

99.

테슬러는 집무실 모퉁이의 불이 꺼진 모습을 보고 손을 멈췄다. 불이 하나하나 꺼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는 깃펜을 내려놓고 탁자 앞에 두 손을 모았다.

“거기 밖에 누구…….”

테슬러가 말끝을 흐린 건 그 순간이었다. 그는 기함하며 ‘미친놈’이라고 외칠 뻔했다. 로렌디스가 그의 맞은편에서 비스듬하게 기대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폐하 뵈러 온 길이었습니다.”

“기별도 없이?”

“기별을 넣고 올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성벽도 몰래 넘은 참입니다. 제 입으로 직접 이야기한 부분이니, 이 부분 또한 정상참작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뉘우치는 기색이라도 보인다면 모를까. 지금 로렌디스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덤덤했다. 성벽을 몰래 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때도 유감이라는 표정이 다였다. 테슬러는 ‘내 조카 놈이 어쩌다.’라고 조용히 앓았다.

“기별이라도 넣고 와야 할 게 아니냐? 이놈아. 온다는 기별 하나 없이 무턱대고 내 집무실로……. 네놈 들어오기는 어디로 들어온 거냐? 성벽을 몰래 넘다니 미친 거냐?”

테슬러는 오랜만에 보는 조카 놈 얼굴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근위대 눈까지 피해서 들어온 그의 작태를 경계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제 보좌관 말이 맞았습니다.”

“네 보좌관이 뭐라더냐?”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고 그랬습니다. 목소리 낮춰 주십시오. 일부러 몰래 찾아온 길입니다. 이 부분은 용서해 주십시오.”

테슬러는 반쯤 기대를 내려놓았다. 그래그래. 이놈이 순수하게 얼굴이나 보자고 왔을 리 없지. 기대한 스스로가 어리석었다. 제 백부 얼굴이나 보자고 여기까지 먼 걸음 했을 놈이 아니다.

직속 보좌관에게 미친놈 소리를 듣고도 온 정도면, 그만큼 급한 사유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무엇보다, 로렌디스는 지금 집무실 밖에 있는 근위대 귀를 의식하고 있었다. 테슬러 집무실에 근무하는 근위대는 완전히 테슬러의 사람이다. 당연히 로렌디스에게도 호의적이고. 그런데 로렌디스가 지금 근위대를 경계한다는 건, 섣불리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있다는 거다.

“몰래 성벽을 넘을 수준이라면 네게도 급박한 일이라는 뜻이겠지. 시답지 않은 일이라면 뇌옥으로 보내 버릴 테니 알아 두거라.”

“황후께서 야만족과 야합했습니다.”

“네가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하는구나.”

테슬러는 불쾌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로렌디스의 표정이 진심인 걸 보고, 테슬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로렌디스는 테슬러에게 황후와 야만족이 주고받던 서찰을 내려놨다. 보통 이런 증거는 미리미리 치우는 게 맞지만 뎐트가 빼 뒀을뿐더러, 고발자로 나선 것 또한 뎐트였다.

“또한, 황후 폐하께서 야만족에게 무기와 극독을 넘긴 부분을 포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을 하나를 통째로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그때의 생존자 또한 헬렌에 기거 중입니다.”

테슬러는 눈을 고요히 감았다.

“요즘 이상하더라니 이런 짓을 하던 중이었나.”

황궁이 아무리 넓은들 황제의 시야를 온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테슬러도 현 황후가 헬렌에 적대적인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북부가 건전해야 제국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황후가 모를 리 없으니, 경계하더라도 마수의 손을 뻗칠 리 없다고 여겼다.

“헬렌에 야만족 지배자의 핏줄을 잡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놈은 밖에 꺼내 놓을 놈이 아니라서.”

“네가 걱정이 크겠구나.”

“폐하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늦은 밤 대놓고 황궁의 성벽을 넘은 놈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다. 테슬러는 기가 찬다며 혀를 끌끌대면서도, 로렌디스를 꾸짖지는 못했다.

“황후의 눈을 피하려고 몰래 온 거냐?”

“네. 폐하. 야만족과 생존자 아이를 뵙길 원하시면, 빠른 시일 내로 헬렌으로 사람을 보내 믿을 만한 이를 통해서 확인하십시오.”

“평소보다 조심스럽구나.”

테슬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몰래 여기까지 왔다는 건 공식적으로 헬렌을 비우기 어렵다는 뜻임을.

“무슨 일이 있는 게냐?”

“북부 전체가 격변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격변은 또 무엇이냐?”

“설원의 누군가 경고했습니다. 격변이 찾아오리라고.”

테슬러는 손에 쥔 증좌들을 한탄스럽게 내려다봤다. 이 정도만 봐도 답이 나온다. 황후 측에서 철과 무기를 몰래 밖으로 빼돌린 거면, 소펜가 내부 자금 유통도 수상쩍게 흘러갈 확률이 높다.

테슬러는 주먹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너는 괜찮은 거냐?”

“저는 이제 북부를 비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도에 오래 머물기 또한 힘듭니다. 제도에서의 뒷수습은 폐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로렌디스는 테슬러에게 직접 경고했다. 무언가 곧 찾아온다고. 내부를 정비하라고.

로렌디스는 들어왔던 길 그대로 조용히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늦은 오후, 황후궁의 시녀장이 그를 찾았다.

* * *

테슬러는 눈앞의 시녀장을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봤다. 황후궁의 시녀장이 황제를 직접 찾았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너는 황후궁의 시녀장이 아니냐?”

황후궁에서 내부 고발자가 나왔다. 황후를 모시는 황후궁 시녀장이었다.

시녀장은 무릎을 꿇고 황후궁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테슬러에게 이야기했고, 테슬러는 로렌디스가 했던 이야기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야만족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아, 아무래도 위험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서…… 폐하! 저는 그저 황후 폐하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테슬러는 차게 식은 눈동자로 시녀장을 내려다봤다.

“황후가 그딴 짓을 저질렀는데, 그걸 보고만 있었느냐! 북부가 뚫리면 제도가 어떤 꼴이 될지 정녕 몰랐단 말이냐!”

“살려 주십시오. 폐하, 살려 주십시오!”

황제궁에서는 살려 달라는 읍소가 고요히 퍼졌다. 황후궁에서 시녀들의 목이 몇몇 잘려 나갈 무렵이었다.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곪았고, 그건 격변의 시작이었다.

“황후궁으로 간다.”

테슬러는 늦은 오후 황후궁을 찾았다. 근위대 소수만 이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를 찾았던 시녀장의 주검이 있었다.

시녀장은 눈을 뜬 그대로 숨이 끊겼다. 검붉은 혈흔이 목에서부터 흐르고 있었다. 곁에서는 세이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긋나긋하고 온화했다. 세이렌은 발밑의 시신을 툭툭 두들기며 작게 웃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세이렌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됐다. 테슬러는 황후를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신음했다.

“무슨 짓이오, 황후.”

“제 아랫것이 입단속을 잘못한 듯해서 벌했습니다. 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 녀석이니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세이렌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테슬러는 이마를 짚고 팔을 들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근위대가 나왔다.

세이렌은 모두 예상한 듯 크게 분노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일찍 들킨 사실이 유감이라는 듯, 나긋나긋하게 웃는 게 다였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요?”

“어차피 내 아들이 갖지 못할 자리라면, 이 황실이 건재한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이깟 제국의 안위 따위 알게 뭡니까?”

선 황후가 죽은 뒤, 빈자리를 채우듯 이곳에 섰다. 높은 곳을 꿈꿨지만, 선 황후의 흔적들은 여전히 황실 곳곳에 남아 있었다.

황제와 헬렌의 지지를 받는 황태자가 황위 계승권을 지닌다면, 제 아들은 어차피 성년이 되자마자 이곳을 떠날 몸이었다.

“내가 갖지 못한다면 폐하께서도 가지지 못합니다.”

세이렌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퍼졌다. 그건 저주 같기도 했고, 마지막 울분 같기도 했다.

“끌어내라.”

테슬러의 명령이 떨어지고 근위대가 세이렌을 끌어냈다.

* * *

근위대가 세이렌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황궁 깊숙한 곳에 있는 뇌옥. 죄질이 나쁜 죄인들을 수감하는 곳이었다. 근위대는 세이렌을 뇌옥에 가두고 간수를 여럿 붙였다.

뇌옥으로 가는 길목에는 조명 몇 개가 다였다. 뇌옥의 문이 열리고, 그녀는 비틀대며 뇌옥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을 더듬거리며 작게 웃었다.

나를, 나를 끌어내렸구나.

네놈들이 나를 끌어내렸어.

이 박탈감이 익숙했다. 세이렌은 바닥을 더듬거리며 얕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세이렌은 목까지 젖혀 가며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리 잡은 분노와 적의.

악의는 꽃봉오리를 피우듯 내부에서부터 싹을 틔웠다.

어디로 향할지 모를 적의.

그건 스멀스멀 잠식해서 세이렌을 잡아먹었다. 언제부터였더라? 그래. 헬렌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다.

‘우리가 악연이고 서로를 멸하게 될 거라고.’

헬렌 공작을 처음 본 순간, 머릿속이 희게 물들었다. 고리로 엮인 듯, 그녀를 점점 어둠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이유 모를 이끌림이었다. 적의와 악의가 북부를 향했다. 너희가, 왜 너희가 눈에 밟힐까? 헬렌, 빌어먹을 헬렌……!

그 악의는 이유도 없이 시작됐다. 특별한 이유 없이 깊어지고 점점 더 깊게 자리 잡았다. 자신의 악의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나가야 해.”

북부로, 설원으로.

그곳으로, 그녀를 부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설원이 그녀를 부른다. 점점 더 이끌려 바닥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그곳에 답이 있다. 너희를 멸하고 나도 멸하고, 이 제국이 멸하는 답이 말이다.

세이렌의 시선이 뇌옥 밖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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