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어째서, 나를 되살리려는 시도까지 했어요?”
“나도 그놈의 속은 모른다.”
그저, 도와 달라고 손을 뻗어서 그 손을 잡아 준 게 다였다. 뎐트는 캐서린을 내려다보다가 찻잔만 말없이 들어 올렸다.
“한 가지만 더요. 죽은 줄 알았던 이들이 돌아왔다는 건……. 내가 해석한 뜻이 맞아요?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라면, 로렌디스가 기다리던 전대 공작과 내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판단은 네 몫이다.”
모든 답을 다 내 줬지만, 판단은 네가 직접 내려야 된다.
캐서린은 허탈함에 맥이 탁 풀렸다. 내가 죽었던 삶에서 아버지는 살아남으셨구나. 긴 세월을 건너서 진짜 헬렌으로 오셨어.
“그럼, 내가 죽었던 삶 속에서 아버지는 어땠어요?”
뎐트는 이 순간에 그거부터 물어봐야 되는 거냐며 의아해했다. 그래도, 순순히 답해 주는 모습은 그가 캐서린에게 호의적이라고 알려 주는 부분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건 설원을 헤매던 모습뿐이다. 전생에서는 늦더라도 내려왔던 것 같은데.”
뎐트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다음에는요?”
“나도 이곳의 모든 이야기를 내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사는 게 아니야. 잊을 기억은 잊고 흘려보낼 기억은 흘려보낸다. 내게는 흘려보낸 지 오래된 기억이다.”
뎐트가 손가락으로 캐서린의 이마를 밀쳤다.
“그리고 과거에는 미련 품지 말아라. 인간은 그러다가 과거에 얽매이기 좋더구나. 짧은 삶을 산다면 그만큼 미련 없이 앞을 봐야 할 날도 있는 법이야.”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뎐트는 말을 끝맺으며 몸을 추슬렀다. 캐서린은 일어나는 그를 따라서 시선을 움직였다.
뎐트는 크게 놀라울 일도 아니라며, 이때까지도 덤덤했다. 그러고는 조금 멈칫하는 듯싶더니 이야기했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둬라. 지금 네가 사는 이 순간에 충실하면 될 일이야. 이미 무언가 많이 변했지 않으냐.”
뎐트는 캐서린에게 잊으라 이야기했다. 지금 너는 이 순간에 살고 있으니, 이 순간에 집중하면 된다며 대꾸했다.
“잘 지내라.”
그건 일종의 작별인사 같았다.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할 사람 같네요?”
“글쎄.”
“뎐트, 우리 친구 사이 맞죠?”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냐?”
뎐트가 그런 건 왜 묻냐며 오히려 캐서린에게 되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떠나 버릴 것 같았고, 캐서린은 긴가민가한 마음을 겨우 지워 냈다.
“그냥, 다시 만난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뎐트가 입술을 다물더니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는 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멀어지는 기척에 캐서린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고요한 적막감.
그건 꼭 외로움 같았다.
* * *
뎐트가 떠나는 날이 됐다.
“무슨 그런 표정으로 보고 있어?”
로렌디스와 캐서린은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 헬렌에 머물던 볼모를 친히 두 주인 내외가 배웅하는 모습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그대들의 일부터 해결 보는 게 먼저겠군. 내가 황후를 끌어내릴 명목을 줬으니, 그 뒤부터는 헬렌 공작이 알아서 잘 하리라 믿어.”
“도움 받은 부분은 늘 고맙게 생각한다.”
로렌디스가 이 부분만큼은 진심이라며 뎐트에게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뎐트는 그런 로렌디스와 눈을 맞췄다.
긴 은발이 나부꼈다. 뎐트는 이만 돌아갈 시간이라는 걸 알지만, 왠지 모르게 이곳에 발이 묶인 기분이었다.
‘이게 미련이라는 건가?’
페레타가 그를 찾아다닐 때면 왜 머저리처럼 포기를 모를까 했는데,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될 것 같다.
“음.”
뎐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낮게 웃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캐서린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옅은 장난기가 감돌았다.
로렌디스는 저놈이 또 뭔 짓을 하려고 저러는가 싶어서 한 걸음 다가서려는데, 뎐트가 더 빨랐다. 뎐트가 팔을 뻗더니 캐서린의 어깨를 감쌌다.
“저 미친놈.”
캐서린은 이마를 짚었고, 로렌디스는 노골적인 욕설을 입에 담았다. 뎐트는 캐서린의 어깨를 팔로 가볍게 감쌌다가 풀었다.
“너무 화내지 말아라. 네 표정을 보니 유쾌해졌어, 헬렌 공작.”
뎐트의 행동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는 로렌디스에게도 팔을 내밀었다. 로렌디스가 질색하자 뎐트는 손톱으로 턱을 긁으며 ‘네놈은 싫어?’라고 되물었다. 로렌디스는 퍽 기가 찼다.
“뎐트, 너는 뭘 하려거든 미리 언질이라도 줘라.”
“인간들은 헤어질 때 포옹이라는 걸 하던데, 헬렌 공작은 내게 너무 각박해. 봐 봐. 헬렌 부인도 해 줬잖나?”
캐서린은 이놈 원래 이런다며 로렌디스에게 적당히 장단 맞춰 주라며 눈짓을 보냈다. 가벼운 인사와 가벼운 배웅, 그뿐이면 된다.
로렌디스가 뎐트와 손을 맞잡았다. 둘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더니, 심오한 표정으로 손을 떨쳤다.
“역시 불쾌해.”
뎐트가 중얼거리는 이야기에 로렌디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뎐트는 제 손바닥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더니, 희고 창백한 손바닥을 내려놓고 뒷짐을 졌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조금의 변화도 없는 그런 모습이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뎐트는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로렌디스는 그런 뎐트를 다시 불러 세웠다. 고요한 목소리였지만 뎐트는 그대로 멈춰 섰다.
“어디로 가는 거냐?”
“설원으로 가지.”
“…….”
“로렌디스.”
뎐트가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떨어진 부름에 로렌디스는 시선을 맞추며 호응했다.
“첫째 지렁이의 처분은 그대에게 맡긴다. 첫째 지렁이가 있든 없든, 앞으로의 격변은 피해 가지 못해. 그러니, 저 지렁이라도 써서 주변부터 정돈해 둬라. 황후를 처분하는 게 시작이겠군.”
“그러면 너는 괜찮은 건가?”
“내가 괜찮지 않을 이유 또한 없지.”
뎐트는 떠나는 길에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캐서린에게 닿았다. 창백한 적안이 그녀를 담아낼 때, 캐서린은 은은히 마주 웃어 주는 게 다였다.
“내가 한 이야기를 기억하나?”
“무슨 이야기요?”
“언젠가 네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겠다던 이야기 말이다. 진심이었으니 나중에 언젠가 이야기해라.”
네가 나를 찾는 날, 한 번쯤은 네 부름에 응답해 줄 테니까. 그러니, 잘 지내라.
담백한 작별인사였다.
뎐트가 먼저 떠나고, 둘은 내성 성문 앞에서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따갑게 긁는 서늘함에 몸이 오싹했는데도, 이상하게 이 바람이 우리에게 호의적인 기분이었다.
“이제부터는 어쩔 거예요?”
“황후부터 폐위시켜야지.”
“그다음에는요?”
“격변을 준비해야지. 뎐트가 직접 경고했으니, 조만간 찾아올 거다. 설원의 주인에게 미리 경고까지 받았으니 제대로 대응해야지.”
“그럼, 그다음에는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칼을 작게 쓸었다.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떠올리면 돼.”
* * *
앞으로의 격변을 맞이하기에 앞서 주변부터 정돈하는 게 우선이었다. 로렌디스는 아내를 침실로 보내 두고 복도를 돌아봤다.
몇몇 수습 보좌관들이 복도를 다니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복도 앞도 거의 한산했다.
집무실로 온 로렌디스는 고민에 빠졌다. 황후를 건드리려다가 북부 성이 공격을 받는다면 그게 더 낭패다. 그리고 로렌디스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황후의 머릿속은 뻔했다. 끌어내린다. 그녀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내가 오르지 못할 자리라면, 그곳에 앉은 사람을 끌어내리면 될 일이다.’
황후의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 고스란히 읽히는 것 같다. 야만족과의 야합이 그런 뜻이었고.
북부가 뚫린다는 건 제도가 뚫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런 짓을 벌인 거면, 황후는 이미 결론을 냈다는 뜻이다.
‘공멸한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을 거다. 또한, 그 시기는 우리가 예상한 시기보다 빠르고 촉박하게 다가올 거다.
황후가 택한 공멸은 야만족을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거다. 균형이 깨진 야만족을 자극한다라…….
뎐트가 이야기했듯 설원에서는 이미 어떤 균형이 깨지고 있다. 변화의 방향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좋다고 이야기 힘든 쪽이었다.
“브레디.”
로렌디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부름에 브레디가 즉각 반응했다. 브레디는 제복을 가다듬었다.
심상치 않은 지시가 오갈 거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야만족과 야합한 황후부터 끌어내릴 때다. 그럼 황궁부터 다녀오는 게 옳다.
“헬렌은 섣불리 비우기 힘든데……. 어쩌는 게 좋을 것 같으냐?”
“헬렌을 비우는 일에 조심스러운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후가 알게 된다면 어디부터 노릴지는 눈에 보이잖아. 다 같이 죽자고 덤벼드는 놈을 피하는 게 가장 어려운 법이다.”
싸우더라도 가장 피해가 덜 입는 방향으로 싸워야 한다. 그리고, 황후를 끌어내리는 건 로렌디스가 굳이 직접 할 필요도 없다. 그건 황제, 테슬러의 손을 빌리면 될 일이었다.
“폐하께서 내가 황궁의 성벽을 몰래 넘으면 나를 벌하실까?”
“어디를 넘는다고……? 각하,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그래도 내가 그분의 조카인데, 반역이라고 죽이기야 할까?”
브레디는 잠깐 멈칫하는 듯싶더니 담백하게 답했다.
“망둥이 같은 놈이라고 욕하긴 하겠지만 벌하진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