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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97)화 (97/129)

97.

그는 설원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눈송이를 쥔 손아귀가 파르르 떨린다. 그건 절망감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왜 안 와. 왜. 왜. 어디로 꺼진 거냐. 당신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을 것 아니냐.

“전하. 이만 가셔야 됩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찾아보겠다.”

“도대체 무얼 찾는 겁니까?”

“그를, 그를 만나야 된다.”

그는 근위대의 이야기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 있는 거냐? 어디로 가야 나와 만나 주는 거냐? 너를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는 거냐?

나는 그냥, 당신 얼굴 한 번 보는 거로 충분하다. 제발, 얼굴 좀 보여라.

그의 소리 없는 기도가 설원에 부딪혀 흩어졌다.

야만인이 내려오는 설원.

그리고 사라진 설인.

그는 그때의 설인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된 거냐고. 씹어 먹힌 것도 억울한데, 내게 이번 이상 현상의 이유는 설명해 줘야 될 것 아니냐고.

“전하!”

설원이 지진으로 흔들렸다. 그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데, 눈이 휩쓸려 내려오는 게 더 빨랐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긴 은발을 봤다. 거기서 의식이 끊겼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북부 영토 위에서였다.

* * *

캐서린은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다. 캐서린이 흐느끼며 침대의 시트를 쥐어뜯었다.

진갈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눈 안에는 눈물이 고였다. 부릅뜬 눈을 가로지르고,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로렌디스가 놀라며 옆에서 일어났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흔들어 깨웠다. 캐서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꿈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겨우 벗어났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왜 그래.”

밖은 새벽이었다. 로렌디스도 캐서린 때문에 깬 참이었는지, 아직 졸음기가 덜 가신 얼굴이었다.

그녀가 어안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로렌디스의 시선이 줄곧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는 듯 그녀와 시선이 부딪쳤다.

“무슨 문제 있나?”

“아, 아니에요.”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보니까 뺨이 축축했다. 캐서린이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맡 탁자 앞에 앉자, 로렌디스가 이불을 거두고 따라 내려왔다. 시선을 맞춰 오는 그의 움직임은 자상했다.

“왜 그러는데, 캐서린.”

멍해진 시야 너머로 로렌디스가 보였다. 캐서린은 마른세수를 하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괜찮아요.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잠자리가 사나워서 그랬어요.”

“요즘 부쩍 자주 깨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죽다 살아난 날도 그렇고, 몸에 기가 허해진 모양이에요. 그런데, 진짜 말도 안 되는 걸 봐 버린 기분이라서요.”

본능적으로 그게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꼭, 그 사람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감정이 동화되어 버린 것 같았다.

캐서린이 의자에 기대 있는데 로렌디스가 긴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뺨 한쪽이 다 덮였다.

“괜찮아. 이야기 안 해도 돼.”

캐서린은 작게 웃었다.

새벽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캐서린이 후원에서 홀로 홍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나른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긴 금발이 어지럽게 나부끼고, 거기에 뎐트가 서 있었다.

뎐트는 캐서린을 내려다보더니 말없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네 남편과 만났어.”

뎐트가 꺼냈던 첫마디였다. 캐서린은 찻잔을 들다 말고 멈칫하고 은은히 웃었다. 넨시가 잠시 멈칫하더니, 눈앞의 뎐트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뎐트도 홍차 한 잔 마실래요?”

“홍차?”

“사람들이 마시는 차 마셔 본 적 있어요?”

“마셔 본 적은 있지만 몇 번 없다.”

뎐트는 캐서린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캐서린이 넨시에게 눈짓하자 넨시가 눈치 좋게 찻잔을 하나 더 꺼내 왔다.

넨시는 뎐트의 뺨을 흘끔거리더니 조심히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데보라도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마셔 봐요.”

“향이 내키지는 않아.”

캐서린은 넨시에게 눈짓을 보내 하녀들을 멀리 물렸다. 이번에는 데보라도 조심히 발길을 물렸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뎐트에게 이야기했다.

“천년 가까이 지내오면서, 다도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가 봐요? 귀족들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내게 와서 차를 대접하던 사람이 없었으니, 크게 관심 가질 일 또한 없었지. 그나마, 헬렌 공작에게 대접을 받았던가?”

뎐트는 고민하더니 이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헬렌 공작에게는 차가 아닌 술을 더 자주 대접받았다. 전장에서 자주 마주쳐서, 놈이 먹던 술을 몇 번 빼앗아 먹은 적 있었지. 놈은 웬 미친놈 보듯 나를 봤지만 말이다.”

“이해되네요. 야만족을 토벌하는데, 주둔지의 막사에서 야만족의 선조께서 수장의 술을 빼앗아 먹으니까요. 물론, 선조라는 건 다른 분들은 모르는 이야기지만요.”

뎐트는 오래된 기억도 아니지만, 괜히 아득해진다는 듯 설핏 웃었다.

뎐트는 설원에서 오래 지냈고, 그만큼 많은 북부의 주인을 만났다. 대부분은 거의 적대적인 관계이거나 무관심한 관계로 끝났는데, 이번 주인이 조금 특이한 경우였다.

“제 아버지가 실종됐으면, 야만족이란 야만족은 다 원망할 법도 한데 올곧았지. 나는 그런 놈이 마음에 안 든다.”

“어째서요?”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거든.”

이끌리는 면이 있다. 막연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 곁에 머물렀고, 그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 오래 산 모양이다. 그래서 머저리 놈 따라서 나까지 이지가 흐려진 모양이고. 뎐트는 그리 속으로 읊조리며 찻잔을 들었다.

“이건 내 입맛에 안 맞다. 헬렌 공작이 주던 붉은색 병에 든 음료가 확실히 더 좋아.”

“붉은색 병에 든 음료면…… 독주요?”

예전에 기사단원들과 섞여서 만찬장에서 식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였던 것 같다. 로렌디스가 붉은색 호리병에 든 독주를 마시던 걸 본 적 있다.

“취향이 고상하시네요.”

뎐트가 눈을 크게 뜨더니 그런 말까지 들을 수준이었냐며 작게 웃었다. 평소의 뎐트보다는 표정 변화도 다양했다.

그의 창백한 피부는 여전히 이질적이었지만, 그 자체로 캐서린에게 거리감을 주는 일 또한 없었다.

“뎐트. 내가 몇 가지를 확인하려는데요.”

뎐트는 캐서린에게 이야기해도 좋다는 듯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의 호의임을 이제는 안다.

그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더니 넨시를 눈짓했다. 넨시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끔뻑거리다가, 그제야 티 포트를 가지고 다가왔다.

“입맛에 안 맞다면서요.”

“취하지도 않고 향도 그윽하지 않으니, 내가 선호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못 먹어 줄 것 또한 없고.”

넨시가 다시 자리를 비키고, 캐서린은 뎐트가 홍차를 마저 음미할 때까지 기다렸다. 세상 따분한 이 친우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 같다.

그래도 따뜻한 찻물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표정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뎐트는 기본적으로 설원의 한기를 타고 났으니 이해된다.

“당신, 페레타 왕을 몰래 찾아간 적 있어요?”

“무슨 뜻이지?”

“페레타 왕 모르게, 근처에서 맴돌던 적이 있었는가 해서요.”

뎐트가 찻잔을 내려두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그건 왜 묻는 거냐?”

“그냥, 그 비슷한 순간을 우연히 보게 된 거 같아서요.”

“이런. 그건 내가 의도한 부분이 아닌데…….”

뎐트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 답했다.

“죽어 가던 거 무의식에서 꺼내 왔더니, 내게 조금 동화된 모양이구나.”

“혹시, 저번에 본 그거요?”

“잊어라.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기억도 아니니까.”

야만족의 공격으로 사경을 헤맬 때, 무의식 속에서 뎐트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뎐트가 나를 꺼내 온 게 거의 확실해지는구나.

“궁금한 게 있어요. 뎐트는 왜 거기서 혼자 그를 돕고 있어요? 페레타가 당신을 만나 보길 바란다고, 알고 있었잖아요?”

뎐트는 먼 허공을 내다보며 답했다. 캐서린에게 하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이제는 이곳에 없는 누군가에게 하는 이야기 같기도 했다.

“때로는 잊고 사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야.”

캐서린은 찻잔을 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허구와도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은 왠지 알 것도 같다.

페레타 왕을 다시 살려 낸 뎐트. 설원을 천년 넘게 지켜온 뎐트.

그리고 이런 뎐트가 캐서린에게 해 줬던 이야기가 있다.

‘이번에는 부디 살아남길 바라.’

캐서린은 저 말을 들을 때부터 직감했다. 저 말은 꼭, 그녀가 이미 한 번 죽기라도 했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죽었던 페레타 왕을 다시 살려 내서 페레타 왕조를 탄생시켰고, 북부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오래 지켰던 설인.

그리고, 그는 그녀의 숨이 멎어 가던 순간 무의식 속에 나타나서 그녀를 꺼내 왔다.

“혹시 뎐트 당신이 나를 살린 거예요?”

뎐트가 맑게 웃었다.

“눈치가 아주 없진 않구나.”

캐서린은 여기가 책 속이라는 가정을 늘 품고 지냈다. 그래서 그녀는 거리낌 없이 제임스 박사의 한라원을 찾았고, 남편이 전쟁을 끝내고 귀환할 거라고 확신했다.

“여기, 책 속이 아니에요?”

“책 속인 것치고는 이곳에 진심이지 않았나?”

“죽었다가 깨어난 것보다는, 그게 더 현실적이었으니까요.”

“다 죽어 가는 거 살려서 데려다 앉힌 적도 있는데 어려울 것 있나?”

“왜요? 어째서…….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의 대화는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를 허무맹랑하다고 비난하는 이도 없고, 믿기 힘들다며 회피하는 이도 없다.

“헬렌 공작이 부탁했었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이들을 모두 찾고, 죽은 줄 알았던 이들이 돌아왔는데도, 그는 시간을 돌렸다. 너 때문에.”

뎐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너를 살려 낸 게 아니라, 시간 선을 조금 만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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