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복도에 분주한 발걸음이 울렸다. 브레디는 집무실 문턱을 넘으며 외쳤다.
“각하께서는?”
“방금 막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브레디가 급하게 로렌디스를 찾자, 집무실에서 근무하는 수습 보좌관이 길을 비켰다. 예법대로라면 노크를 두 번 하고 누구인지 밝히는 게 먼저이지만, 브레디는 문을 열면서 이야기했다.
“각하, 브레디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로렌디스는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브레디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로렌디스는 깃펜을 내려 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노크는 잊었나?”
“급해서 그랬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브레디는 안경을 올려 쓰며 작게 신음했다. 그는 서둘러 챙겨 온 소식지부터 로렌디스에게 건넸다.
로렌디스는 브레디에게서 소식지를 건네받고 안경을 꺼냈다. 탁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서 소식지를 읽던 로렌디스는 그대로 소식지를 내던졌다. 소식지에는 헬렌의 소식이 담겨 있었다.
“헬렌의 성문이 뚫렸던 게 왜 여기 소식지에 올라가 있어?”
어디까지나 예전 일이다. 지금 와서 크게 문제될 건 없다.
“황후가 퍼트린 이야기 같습니다.”
“이걸? 뭣 한다고?”
“헬렌이 지금 위태롭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옛날 일을 지금에 와서 꺼냈는지.”
야만족이 헬렌 외성까지 들어와서 거리를 휘저은 적이 있다. 그때, 설원 주변에서 기상이변까지 생기며 헬렌 내부에서도 위기설이 언급됐었다.
지금은 겨우 조용해졌지만, 캐서린이 독에 당해서 생사를 헤매던 순간 이 일대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폭풍이 몰아닥치기 전의 해안가 같았다.
“그리고 포트런에서 데려온 아이를 우리 측에서 보호 중이라는 사실이 황실 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일찍 새어 나갔구나. 내가 분명 진료동에서 똑바로 관리하라 이야기해 둔 것 같은데.”
“진료동에서 노력해도, 일행들을 쫓던 게 황후의 세력이었잖습니까? 족적이 헬렌에서 끊겼으니, 헬렌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을 겁니다.”
땅으로 갑자기 꺼진 게 아니라 헬렌으로 간 게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황후에게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기까지 며칠의 여유가 있을 줄 알았더니…….
“하긴. 직접 못 봤어도 뻔하군. 우리 말고는 그 꼬맹이를 찾아서 데려다 쓸 놈이 없구나.”
“그들이 알더라도 당장 어쩔 수는 없을 겁니다.”
“다 같이 죽을 각오로 허튼짓을 할지도 모르지. 애초에 그럴 각오로 덤벼든 것 같고. 조금 더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대놓고 북부로 접근할 마음조차 품지 못했을 거다.”
브레디는 적극적으로 제 주군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제국의 황후에게 대놓고 욕설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로렌디스는 소극적으로 고개만 몇 번 끄덕인 게 다였다.
“보좌관들과 다음 행동을 예측해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이상행동을 보이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지금 황후는 둘째 황자의 황위계승권을 자리를 놓고 내게 접근한 게 아니야.”
로렌디스는 차분하게 세이렌의 머릿속을 읽어 냈다.
“나까지 끌어내릴 작정으로 접근한 거다.”
* * *
헬렌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이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성을 찾는다는 의미였다.
캐서린은 후원의 대리석 기둥 아래에 기댔다. 연보랏빛 드레스가 살랑거리며 다리를 감쌌고, 넨시가 캐서린을 조심히 불렀다.
“요즘 손님들이 성을 자주 찾습니다.”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그런 것 같아. 로렌디스도 부쩍 바빠졌잖아.”
캐서린이 작게 웃으며 하는 이야기에도, 넨시는 걱정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야지. 그분이 괜찮지 않다면, 누군가의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선문답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캐서린이 한 대답은 어떤 의미로든 다 통했다.
헬렌이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면, 로렌디스가 건재하는 한 헬렌은 괜찮다.
로렌디스가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면, 그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앞으로 헬렌의 여기저기에서 일이 생길 것이다.
넨시는 야만족이 이만큼이나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는 처음이라며 작게 시름을 토했다. 야만족이 이 땅에 있던 역사는 오래됐지만, 노골적으로 부딪치며 이 정도로 위기감을 불러온 건 처음이었다.
“제도에서는 주인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불순 종자들도 나온대요. 지금껏 북부의 성벽을 지키던 게 주인님이었는데 말이에요.”
“북부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을 때 초래될 결과를 봐야 그들도 정신 차릴 거야. 물론, 그때면 이미 제도까지도 초토화되어 있겠지만.”
제국은 헬렌이 있었기에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헬렌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제도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로렌디스에게 다녀와야겠어.”
“기별을 넣을까요?”
“그래. 부탁할게.”
“그런 건 제게 부탁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잖습니까?”
넨시가 로렌디스에게 기별을 넣고, 캐서린은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요즘 들어서 자주 찾아오는 곳이었다.
수습 보좌관이 캐서린을 발견하고 기쁘게 반겼다. 웃음이 만면한 걸 보니까, 이들의 표정에는 근심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넨시가 기별을 넣었다고 했긴 했는데, 로렌디스의 일정이 괜찮을까요?”
“각하께서도 지금 막 접견을 끝냈습니다. 바로 들어가 보시면 됩니다.”
수습 보좌관이 길을 열어 주자, 로렌디스가 이미 그녀가 온 걸 알았다는 듯 문을 열어젖혔다. 캐서린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손목을 잡아서 집무실로 끌어당겼다. 수습 보좌관은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그 자리에서 시선을 피했다.
문이 무겁게 닫히고,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목덜미에 뺨을 묻었다. 캐서린은 무언가 불안한 직감이 솟았다.
“로렌디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거예요?”
“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로렌디스의 표정에 작은 당혹감이 일었다. 왜 그런 결론이 났는지 묻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대뜸 목덜미에 뺨부터 묻는데, 내게도 불안감이 생길 만하잖아요. 캐서린이 작게 항변하자, 로렌디스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당신이랑 침대에서 뒹군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좀, 머리가 이상해지신 것 같아요. 얼마 전에도 잔뜩…… 했잖아요.”
“바빠서 당신이랑 시간 보낼 틈이 없었다고. 여유만 됐으면 더 좋았을걸. 빌어먹을 야만인 놈들이 계속 설원에서 내려와서 애먼 시간만 계속 보내잖아.”
“그게 당신이 하던 일이었잖아요. 그리고 언제 당신이 억누르고 지냈다고 그래요?”
캐서린은 로렌디스에게 당신 충분히 본능에 충실했다며 대꾸했다.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로 사람 마음 복잡해지게 이런다. 캐서린이 그의 어깨를 약하게 때리는데, 딱딱한 근육에 손목이 지끈거렸다.
“손목에 힘도 없으면서 괜한 곳에 또 힘을 쏟아.”
로렌디스는 캐서린에게 괜한 짓 한다며 작게 타박했다. 그는 미세하게 찌푸린 그녀의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찌르고, 미간 사이에 주름진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문 한쪽에 밀어 두고 짧게 입술을 맞췄다. 경건한 입맞춤이었다. 담백했고, 윗입술을 쓰는 그의 혀가 느릿하게 입안을 가로질렀다.
“당신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요.”
“내게 큰일이라고는, 당신이 요즘 더 살집이 붙지 않아서 내 마음이 복잡하다는 수준이 다였어.”
실없이 하는 이야기는 농담조다. 캐서린이 그의 어깨를 약하게 두들기자, 로렌디스가 그녀의 콧등을 손등으로 툭툭 어루만졌다.
“나는 당신 걱정하느라 여기까지 달려왔는데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헬렌 내부가 어수선하다고 하녀들끼리도 걱정이 많아요.”
“지금까지와는 달라서 어수선한 걸 거야. 당신이 걱정할 만큼 상황이 최악인 건 아니니까, 일단은 내려놔.”
하녀들끼리 나누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그들의 눈에 떠오르는 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불안해할 것 없어.”
“황실에서 괜히 이상한 신문을 발간해서, 여기까지 소란스러워진 것 같아요. 나 때문에 그런 면도 있고요.”
“그게 왜 당신 탓이겠어. 놈들은 제 욕심 못 버리고 몰래 숨어들다가 멋대로 자멸한 거다. 뎐트 또한 그렇게 이야기했고.”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옷자락을 당겼다. 로렌디스는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라며, 캐서린을 소파로 이끌었다.
“뎐트는 다녀갔어요?”
“그래.”
“무슨 이야기 나눴어요?”
“평소와 똑같은 이야기 나눴어. 특별히 달라진 곳도, 특별히 신경 쓸 곳도 없었어. 진짜 평소와 똑같았지.”
특별히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물론, 뎐트는 평소에도 감정적인 동요가 큰 편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늘 덤덤했고, 그의 표정이 변할 때라고는 흥밋거리를 찾을 때가 다였다. 대부분의 그는 따분하다는 감정이 지배적이었다.
“무언가를 정리라도 하는 것 같군.”
그런 예감이 든다. 뎐트가 무언가를 준비하지만, 그게 뎐트에게 좋은 쪽은 아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네.”
“그걸 끝내려는 게, 꼭 우리만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로렌디스가 하는 이야기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고요히 퍼지는 혼잣말이 그녀의 귓불에 닿으며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