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뎐트가 다시 왔다.
로렌디스는 뎐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달라진 곳은 없다. 저 얼굴을 보면 할 이야기가 분명 많았는데, 로렌디스는 어떤 말도 섣불리 뱉지 못했다. 뎐트와 마주 보며 작게 신음하는 게 다였다.
뎐트는 그런 로렌디스를 보며 혀를 찼다.
“네게 동정심을 사는 날이 다 오는구나.”
“어딜 다녀온 거지?”
“근처에 있었다. 뭘 계속 찾고 다닌 거냐?”
뎐트는 쓸모없는 짓을 했다며 로렌디스를 타박했다.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서 찾던 중이었는데, 눈앞에 있으니 더 찾을 것도 없었다. 로렌디스는 됐다며 손을 건성으로 내저었다.
“눈앞에 있는 거 봤으니 됐다.”
“헬렌 공작은 아닌 듯하면서도, 내게 애틋하더구나.”
로렌디스는 혐오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듯 표정을 구겼다. 저런 망언이 또 어딨나.
뎐트 본인이 유쾌하다고 웃어넘기는 모습을 보니까, 놈을 걱정했던 일이 무색해졌다. 로렌디스는 턱을 괴고 뎐트와 눈을 맞췄다.
뎐트의 긴 은발은 바람이 없는데도 허공에서 잘게 살랑거렸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그의 신비로움에는 이질감이 있었다.
“브레디. 수습 보좌관들에게 일러서 주변을 비워 둬라.”
로렌디스는 집무실 문을 닫고 뎐트에게 와서 앉으라 손짓했다. 로렌디스는 맞은편에 앉은 뎐트를 빤히 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네놈과 이런 식으로 애틋해지고 싶지 않아.”
“쯧쯧. 각박하긴. 로렌디스 네놈은 좀 더 인간미를 갖춰야겠어. 보통 인간들은 동정심이라는 걸 가지던데, 내게는 왜 그리도 차가워?”
뎐트는 항의하듯 툴툴거리면서도 매끄럽게 웃었다. 뎐트는 한쪽 눈을 감고 이야기했다.
“첫째 지렁이를 죽일지는 네가 택해라. 다만 헬렌 공작……. 그놈을 죽인다고 이 싸움이 끝나는 건 아니다. 지배자의 핏줄은 계속 태어날 거다. 너는 또 설원을 오를 거고, 나는 그런 너를 볼 테지.”
“뎐트.”
“지배자의 아들이 다 죽었으니, 다시 후계자가 태어나겠군. 그럼 너는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
뎐트는 오랜 친우에게 이야기하듯 씁쓸히 읊조렸다.
“나는 네 앞길 또한 평탄하길 기도한다.”
뎐트의 혼잣말이 작게 이어졌다.
“격변이 오려는 것 같다. 설원이 심상치 않구나.”
“설원이 어째서?”
“울고 있어.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깊어졌고, 나무를 스치는 바람에서도 비명 소리가 들린다. 칸도 심상치 않고. 무언가 변화가 오려는 모양이다.”
설원에 변화가 찾아온다. 그게 아직 어떤 의미인지는 뎐트 또한 모른다. 이런 일은 천년이 지난 뒤로 처음이었으니까.
단지, 이번 격변이 끝난다면 이 지긋지긋한 설원을 조금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뎐트는 그런 소소한 바람을 품었다.
“격변을 준비하거라.”
“무슨 뜻이지?”
“이곳을 지탱해 주던 균형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야만족에게 저주를,
헬렌에게는 가호를.
“그 균형이 깨지고 있어.”
“또 번거로운 일이 생기려는 모양이군.”
“꼭 번거롭기만 한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를 이곳에서 지워 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뎐트는 덤덤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나는 북부를 아낀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그래.”
“그러니 이 전쟁이 끝나길 누구보다 바라는 건 나다.”
로렌디스는 뎐트에게 어떤 이야기도 해 주지 못했다.
“나를 동정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네놈 건방진 눈을 찔러 버리기 전에 당장 곱게 눈을 뜨거라.”
뎐트는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의 무덤덤한 표정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로렌디스도 안다. 이건 친우가 친우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뎐트의 표정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 * *
제임스는 눈앞의 아이를 착잡하게 내려다봤다. 자신이 언제부터 보모 노릇을……. 눈앞이 착잡해졌다. 지금 그는 팔자에도 없는 노릇을 하고 있다.
제임스는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연구실에서 연구에 한참 집중할 때인데, 어린아이를 떠맡았다.
‘각하! 더는 못 해 먹겠습니다!’
제임스는 로렌디스에게 따져 물으려고 다시금 그를 찾았다. 그런데 헬렌의 주인께서는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냉혈한이 따로 없었다.
‘보모가 퍽 잘 어울려.’
제임스는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잘 어울린다는 칭찬이나 받자고 큰 용기 내서 그를 찾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힘없는 사람에게는 발언권이란 없는 법이었다.
헬렌 부인에게 한 번 부탁할까? 이 아가씨도 의외로 마음이 약해서 내 부탁……. 아니군. 마음이 약하니까 내가 아니라 꼬맹이 편을 들겠군.
“야! 좀 먹으라고!”
“아니, 그게…….”
“뭘 얼마나 먹었다고 식기를 내려놔. 네 몸집에 살이 안 붙으면, 이곳 주인이 내 목부터 뜯으러 올 거라고!”
로렌디스는 제임스에게 네 목을 뜯어 버리리라 협박한 적은 없지만, 때에 따라서는 존재 자체로 무서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로렌디스도 그런 부류였다.
“왜, 왜 뭐가 맛이 없냐? 네 나이 대에는 입에 가져다 대기만 해도 먹는 것 아니냐!”
“입맛이 없는…….”
“이 집 안에서 입맛이 없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여기 주인님이 가장 싫어하는 게 그 말이다. 여기 안주인께서 걸핏하면 입맛 없다고 식사를 거르거든.”
제임스는 주인내외 욕을 살며시 늘어놓으며 혹시 누가 듣는가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니콜이 그런 제 스승을 착잡한 눈으로 흘끔거렸다.
‘스승님께서도 헬렌으로 오시더니 망가지셨군.’
이런 니콜의 속마음만큼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 니콜이 존경해 마지않던 스승은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변했다.
“마님 몸은 거의 회복이 됐군요.”
“시한부 선고를 내린 지 1년 만에 회복이 됐어.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육체다. 1년 만에 죽으면 죽었지, 회복될 몸은 아니었거든.”
“그러게나 말입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분입니다.”
니콜은 살사초 꽃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마님께서는 진짜 위험 고비를 넘겼고, 살사초 꽃차를 식용으로 즐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숨이 진짜 멎었다가 다시 돌아왔잖습니까?”
“진짜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허리가 오싹하다니까. 의식 회복 안 되면 짐 싸서 도망가야 되나 했다고.”
헬렌의 전장귀가 그를 따라올 게 뻔히 보여서 도망칠 엄두를 못 냈을 뿐이다.
“잠 오면 저기 가서 자라.”
제임스가 하는 이야기에 아이가 터덜터덜 그리로 갔다. 소파에 소침하게 앉은 녀석은 쭈뼛대더니 제임스가 담요를 던져 주자 그걸 덮고 잤다.
“내 연구실이 언제부터 이런 덜떨어진 놈들로…….”
제임스는 의료진이 자리한 연구실을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연구 자료도 다 엉망이고 내용도 죄다 구닥다리다. 접근하는 방식이 왜 죄다 고리타분해.
제임스는 혀를 끌끌 차며, 연구실의 연구 자료를 괜히 들쑤셨다. 그의 동료들은 식겁하며 제임스에게 항의했다.
“제임스 네놈! 연구자료 함부로 손보지 말랬지!”
“왜 멋대로 연구 자료를 손대는 거냐!”
제임스는 저 덜떨어진 돌머리들을 갱생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죽었다 깨어나는 법밖에 없다며, 극단적인 결론을 냈다.
“니콜, 이 스승이 다시 이야기하는 거지만 잘 들어 둬라.”
“네. 스승님.”
“고수익 의뢰에는 그만큼 고위험 요소가 있다. 나처럼 돈에 정신이 팔리면 인생을 패가망신하는 법이다.”
자본을 좇으면 자본으로 패망한다. 그런 섭리를 뒤늦게 깨달은 제임스는 제 삶의 근본을 다시금 되짚었다.
니콜을 착잡한 눈으로 그런 스승을 흘끔거렸다. 그녀는 제 스승이 요즘 많이 힘들구나, 라고 속으로 읊조리며 조용히 연구실 문을 닫고 나왔다.
* * *
황실의 유리 온실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세이렌이 내던진 유리컵이 산산이 조각났다. 유리 파편이 얇게 튀고, 옆에 있던 시녀들이 뺨을 베였다.
그 순간에도 누구 하나 섣불리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세이렌은 파르르 떨리는 손아귀로 깨진 유리조각을 움켜쥐었고, 손아귀는 유리 파편으로 너덜너덜 찢겼다.
흰 백합꽃을 가득 심어 둔 온실에서는 따스한 온기보다는,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시녀들은 머리를 세이렌에게 조아리기 급급했다.
“누가 어디에 잡혀?”
“송, 송구합니다. 폐하.”
“그것들은 걸핏하면 잡히는 거냐? 설인의 야만인이라더니, 헬렌에 일방적으로 놀아나는 수준이구나.”
“북부가 제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제도도 안전…….”
세이렌의 서슬 퍼런 시선이 시녀에게 향한다.
“송구합니다.”
시녀장이 그 아이를 눈짓으로 돌려보냈다. 북부가 제 역할을 하기에 제도가 안전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세이렌에게 제도의 안위는 눈 밖의 일이었다.
“포트런인지 하는 곳에서 놓친 아이도 헬렌으로 갔고.”
“송구합니다.”
“야만족의 후계자라는 놈도 헬렌으로 갔고.”
세이렌은 작게 웃었다.
“역시. 내가 별짓을 다 해도 헬렌과는 맞붙기가 힘들구나.”
“아닙니다. 잘 버틴 겁니다.”
“앞으로는 더 힘들겠지. 그래. 지금부터는 더더욱 방해되기만 할 거야.”
헬렌이 저곳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다면, 내가 헬렌을 품지 못한다면……. 그럼 어쩔 도리 없지.
헬렌 공작이 시골의 이름 모를 가문의 영애와 결혼한 순간 끝났다. 소펜가와의 혼약으로 그를 묶어 내지 못했으니, 다른 방법 또한 없다.
현 헬렌 부인이 일찍이 죽어 버렸다면 모를까, 헬렌 부인도 생명줄이 즐겼다.
“결국은 내가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구나.”
세이렌은 작게 읊조렸다.
“내가 가지지 못할 곳이라면.”
“네. 폐하.”
“차라리 망가트리는 게 낫겠구나.”
시녀장의 눈이 시름으로 잠겼다. 세이렌의 눈에서는 더 이상 탐욕도 보이지 않는다. 욕심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를 끌어내릴 악의만이 남았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시녀장은 눈과 귀를 닫았다. 그런데도 밀려드는 불안감까지는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리 온실에는 따뜻한 공기가 감돌지만, 살갗 안쪽에서부터 서늘한 불안감이 솟았다. 그게 좋은 징조일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