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제임스가 다시 왔다.
이야기했던 대로, 포트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를 데려왔다. 곁에는 아이를 같이 이끌었던 그의 지인이 같이 있었다.
“성격 나쁜 놈이 의외로 멀쩡히 데려다 놨군.”
외부인이 은밀히 진료동을 찾았다. 험악하게 굳은 얼굴에 긴 칼자국이 남은 사내였다.
“젠장! 의사 선생, 내게 이딴 일을 두 번 더 시켰다간 내가 한라원의 문짝을 잡아 뜯어 버릴 줄 알아.”
“네놈이 이미 잡아 뜯은 문짝만 하더라도 수십이 넘는다. 니콜, 저놈 내보내고 진료원 앞에 소금을 잔뜩 뿌려 두어라!”
제임스는 지인 사이라고 더 친근한 법은 없다. 그나마 캐서린 앞에서는 귀족이라고 조금 더 예의를 갖추고 있던 모양이다.
“안녕?”
캐서린은 사내의 뒤에 숨은 아이를 빤히 내려다봤다. 진료동에 있다기에 만나러 왔는데, 아이는 숨어서 빵과 우유를 먹고 있었다.
제임스는 그런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복장을 두드렸다.
“마음 편히 먹어라! 여기서 네 음식 빼앗아 먹을 만큼 궁핍한 사람도 없어!”
“죄, 죄송해요.”
“애가 밥 좀 먹는다는데, 뭘 다 보고 서 있어!”
제임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아이를 옆에 앉혔다. 성질이 더럽다기에는 또 츤츤거리는 면도 있고.
제임스도 많이 변했지 싶다.
캐서린은 잠시 입술을 다물고 침묵했다.
귀족의 세력 다툼에 너희가 휘말려 고생이 많구나.
결국에는 권력 다툼에 휘말린 희생일 뿐이었다. 캐서린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사내에게 시선을 뒀다.
“사람이 제법 붙었다더니 용케 따돌렸구나.”
“어유, 말도 마십시오. 이 꼬맹이까지 데리고 온다고 괜한 고생만 더했지. 수당 똑바로 계산하십시오. 의사 선생이 부탁해서 들어준 거지, 귀족들이랑 얽히는 일이라면 질색이었으니까.”
캐서린은 보좌관에게 말해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하고, 그 밖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여기로 오기까지 급습만 다섯 차례였고, 이들이 눈앞에서 죽인 이들만 수십이었다.
“로브를 쓴 사람들이 마을에 다녀갔어요.”
“그랬나?”
“그 뒤로 큰불이 났고요. 저는 마을 뒤쪽으로 채집을 하러 나가서 자리를 피했지만…….”
아이는 뒷말을 흐렸다. 이 뒤에 이어질 말은 뻔했다. 이번 일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홀로 남겨졌구나. 남겨진 이의 서러움이라, 그건 캐서린이 가장 잘 안다.
“일단은 쉬어.”
여기까지 쫓겨 오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듯하니까. 헬렌 내부라면 아무리 황후더라도 대놓고 접근하기 힘들다.
북부의 성문을 열려면 내부에서 승인이 있어야 되며, 타지역의 기사들이 북부의 문턱을 밟으려면 신고부터 해야 된다.
‘폐쇄적인 구조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됐네.’
진료실 문이 열리고, 로렌디스가 들어왔다. 그는 내부에 사람이 많은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캐서린에게로 다가왔다.
“많군.”
그는 시선을 내려 아이를 보더니, 제임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저 아이는 박사가 책임지고 돌봐.”
“각하? 저는 애라고는 키워 본 적도 없습니다만?”
“적임자가 박사뿐이야. 아직 내부에서도 기밀이니까. 진료실 안에서만 조용히 돌봐. 혹시나 포트런 마을의 ‘포’ 자라도 나왔다간 제임스 박사 때문으로 간주하겠어.”
로렌디스는 엄포를 놓듯 이야기했고, 제임스는 억울함에 입술만 달싹였다.
물론, 여기서 저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는 건 맞다. 그의 보좌관에게 일을 맡길 수도 없고, 하인에게 맡기기에는 혹시나 이야기가 새어 나갈 수 있으니까.
황후가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최대한 그 기한을 늦추는 게 우선적이었다.
제임스도 그걸 아는지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알긴 아는데, 그래도 내가 왜!’
제임스는 로렌디스에게 이야기해 봐야 안 될 걸 아는지, 캐서린만 흘끔거렸다. 캐서린 네가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보아라, 하고 간청했지만 캐서린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제임스가 수고해 줘.”
“너, 이거 배신이다! 고객님, 내가 고객님에게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서 치료에 임했는데……요!”
로렌디스의 눈이 낮아지자, 제임스는 스스로 다시 존대를 붙였다.
결론이 났다. 제임스가 아이를 돌보기로 하고,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데리고 나왔다. 로렌디스는 제임스를 한 번 돌아보더니 은은히 웃으며 대꾸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안다.”
“그럼요?”
“그래도, 그대가 가장 적임자이지 싶어. 저 아이에게 거리낌 없이 대할 사람이라면 그대뿐이니까.”
아이는 그제야 제임스를 알아봤는지 얼굴빛이 변했다. 포트런 마을에서 아이들이 살사초에 중독될 뻔한 적이 있댔는데, 제임스가 마을에서 구호활동을 할 때 봤던 모양이다.
‘선생님!’
하고,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울렸다.
제임스는 졸지에 골치 아픈 문젯거리를 이어받은 듯 이마를 짚었다.
* * *
로렌디스와 진료동에서 나왔다. 그는 캐서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회중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식사는?”
“아직이요.”
“저 아이 식사는 잘 챙기던데, 네 식사는 아직도야?”
로렌디스가 너는 정말로 한결같다며 중얼거리더니, 캐서린의 손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그는 하인에게 일러 후원에 식사자리를 마련하라고 하고, 캐서린을 거기에 데려다 앉혔다. 흰 탁자에 식탁보가 깔렸다.
캐서린은 식욕이 적은 편이었다. 식사는 천천히 해도 돼서, 식사 때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빈속으로 자주 있곤 했더니, 그는 이따금 그녀를 억지로라도 식탁 앞에 앉혀 두곤 했다.
“당신 식사부터 챙겨 가며 남을 챙기든 해야 될 것 아니야.”
이 짧은 말 몇 마디에 여러 잔소리가 담겼다. 그래도 그의 잔소리에 자주 노출됐더니,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수준에 다다랐다.
“그만 좀…….”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식사를 마저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보좌관이 그에게 한 번씩 귓속말을 전했지만, 그는 식사자리를 계속 지켰다.
“바쁜 거예요?”
“사람을 보내서 뎐트를 찾으라 했는데 아직도 찾지 못해서. 일단은 어디 갔는가 조사하라 했더니, 보좌관 측에서도 모른다고 하더군.”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게 자주 있는 일이라지만, 이번에는 감이 조금 다른 모양이다.
캐서린은 식기를 내려 두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하늘이 유난히 높다. 구름 한 점이 없는 하늘은 푸르게 빛을 비추었다. 또 며칠 뒤면 지겹도록 눈이 내릴 모양이다.
캐서린은 홀로 상념에 잠겼다가 흠칫 놀랐다. 내 입에서도 눈이 지겹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감회가 새롭네요.”
“식사 다 했어?”
“네. 당신도 보좌관이 또 찾는 것 같은데 이만 집무실로 가 보세요. 나 때문에 집무실 비운 거예요?”
침묵은 곧 긍정이다. 캐서린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보좌관을 손짓으로 부르자, 로렌디스도 마지못해 보좌관을 따라나섰다.
늦은 점심 식사를 끝내 두고 홀로 후원을 걷는데, 긴 은발이 눈앞을 스쳤다. 캐서린은 아주 잠깐이지만 입가에 설핏 미소를 머금었다.
넨시에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오라 하고, 은발이 살랑거리며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뎐트.”
그는 캐서린을 보더니 벽 한쪽에 기대섰다.
“왜 그리도 찾아다녀?”
“나는 그냥 당신이 보여서 온 건데요. 당신을 찾던 건 내 남편이었어요.”
“그대의 남편은 나를 왜 계속 찾는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겠죠? 뎐트가 피해 다니는 지금 그 이유 말이에요.”
뎐트는 이미 안다는 얼굴이었다. 집무실이 위치한 위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뎐트는 피곤함이 짙어진 얼굴로 웃었다.
“다 던질까.”
“네?”
“다 던져 버리면 내 속이라도 편하지 싶어서 말이다.”
“뭘 던지고 싶은 건데요?”
“다…… 던질까 싶어.”
뎐트는 숨을 깊게 내쉬더니 작게 읊조렸다. 따분해. 뒷짐을 지고 서 있던 그는 캐서린을 놔두고 홀로 걸었다.
“슬슬 지겨워질 때도 되지 않았나 해서.”
긴 은발이 허리 아래에서 바람에 나부끼듯 살랑거렸다. 왜 지금에서야 이런 느낌이 든 건지는 잘 모르지만,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고독스러워 보였다.
“당신 잘못 아니에요.”
“…….”
“뎐트 당신 잘못 아니라고요.”
우뚝 선 뎐트가 뒤로 돌았다.
“곤란한 입장에 놓인 건 안타깝게 생각해요. 또, 미안해요. 도와 드릴 게 없네요.”
“네가 왜 미안하지? 내게 잘못한 것도 없잖아.”
“내 친우라면서요? 생일 선물이라며 가져다준…… 내가 그때 뭐 받았던가요? 보석이던가요?”
“나도 기억 안 난다. 그냥 눈에 보이는 거로 던져 준 거라서.”
당신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였구나. 캐서린은 푸스스 웃으며 대꾸했다.
“처음에는 당신이 싫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 친우니까요.”
뎐트에게 해 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야만족과의 악연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또 꾸준히 부딪칠 거니까.
“퍽 위로되는군.”
“뎐트……?”
“네게 동정받을 입장은 아니니까 그딴 눈으로 보지 말아라.”
사람 사이에 얼마나 섞여 지냈다고. 괜한 인연을 쌓아 두었다.
페레타.
그 이름이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
친우라. 친우라. 뎐트는 그 부분을 읊조리다가 걸음을 내디뎠다.
“네 남편에게 가 보아야겠다. 계속 찾는 눈치인 거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