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제임스는 며칠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늙어 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포트런 골목에 사람을 한 번 더 보내고 온 길이라 전했다. 대형화재로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산적들의 약탈로 마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사람을 이미 한 번 보내서 정황을 알아보긴 했다만, 포트런 내부 상황이 이상하니만큼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
“그놈들 미쳤어.”
캐서린은 흠칫하며 넨시에게 손짓했다.
“넨시는 잠가 나가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하녀들을 모두 물리겠습니다.”
하녀들을 모두 물리자 제임스도 터놓고 이야기했다.
“그때 쫓기던 이들에게서 다시 연락이 닿았어. 한 번 더 보냈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뒤를 밟아서 쫓았다더군. 진짜 죽일 작정이었나 봐.”
“여전히 포트런 마을에 사람이 붙어 있다는 뜻이구나.”
사람만 붙어 있는 게 아니다. 목적 또한 불순했다. 캐서린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생존자는.”
“그게 문제였어. 생존자를 찾았는데, 그 어린아이인 모양이더라고. 그 애까지 챙겨서 다니느라고 목숨 걸고 쫓겨 다니나 봐. 빈민굴에서 시비 걸리면 손목이나 잘라 봤지, 누구 지키는 쪽에는 재능 없다며 욕만 잔뜩 보내왔어.”
제임스의 말을 요약하자면 생존자가 있다. 그런데 아이만 있다는 건, 아이의 부모는 이미 희생됐다는 뜻이다.
톡톡. 상념이 깊어지면서 손가락이 탁자를 두들기는 박자감도 점점 빨라졌다. 제임스도 지금은 방해하면 안 되는 걸 아는지, 침묵하고서 머리를 헝클였다.
‘나가고 싶다.’
제임스에게서 그런 의지가 보였다. 캐서린은 푸스스 웃어 버렸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임스는 진짜 밖으로 보내 줘야 되지 싶다.
그는 이곳에 적응하더라도, 한라원에서 누리는 자유나 풍요로움이 더 좋은 모양이다.
“한라원은 헬렌 3골목에 있잖아. 위치 자체가 빈민 쪽인데, 제임스는 연구자금이나 그런 건 무슨 수로 해결해?”
“돈이 무슨 문제겠어. 치료 오는 놈들 멱살 잡고 치료비로 뜯어내면 돼.”
제임스는 놈들 사정 따위 알 바냐며 툴툴거렸다. 가볍게 분위기를 풀어 주려고 꺼낸 이야기였는데, 제임스가 잘 대답해 준 덕에 긴장감이 풀렸다.
캐서린이 후우-숨을 내쉬는데, 제임스가 도통 모르겠다며 팔짱을 끼고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황후는 왜 이렇게까지 하지? 얻는다면 좋지만 얻지 못할 때는 잃는 게 더 많잖아.”
잃게 된다면 모든 걸 잃지만, 얻게 된다면 모든 걸 얻을 거니까.
캐서린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예정대로라면 캐서린이 죽고, 헬렌 부인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도 황후와 야만족은 야합했을까? 그때는 아닐 것 같다.
셀레나 소펜이 늦게나마 헬렌 부인이 돼서 다시 자리를 잡을 때, 황후는 외척세력을 더 공고히 했을 것이다.
‘내가 살아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나?’
북부는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폐쇄적이었고, 그 권력은 황권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에 있었으니까.
헬렌 부인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면, 황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괜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후일을 도모했을 것이다. 후계자 하나 없는 북부는 다리가 하나 없는 건물과 같았으니까.
“결국은 내 존재가 흐름을 바꿨구나.”
“아가씨는 가끔 본인 존재감에 과한 의미를 품는 듯 보여.”
제임스가 툴툴대며 흐름을 끊어 두었다.
“사람이 왜 그리 삶을 복잡하게 살아. 머릿속이 복잡하면 세상살이도 복잡해져. 이것 봐 봐. 얼마나 단조롭고 단순한 세상이야?”
“그러는 제임스는 고민이랄 게 없어 보여.”
제임스는 아픈 부분을 건드린다며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네 사람들에게 전해.”
그 사람들을 계속 밖으로만 돌릴 수 없으니까. 빠른 시일 내로 다시 헬렌으로 불러들이는 게 맞다.
“그들을 따돌리는 대로 아이를 데리고 헬렌으로 복귀하라고.”
제임스는 본인은 이런 일에 휘말린 이유를 모르겠다면서도, 선선히 캐서린의 지시에 따랐다.
일단은, 로렌디스에게 이야기부터 해 둬야 된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리 방지해 두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제임스는 할 일이 남았다며 금방 떠났고, 넨시가 캐서린에게 홍차를 내올지 물었다. 캐서린은 한쪽 눈을 감고서 나른하게 답했다.
“차는 로렌디스에게 가서 마실게. 기별 좀 넣어 줘.”
* * *
로렌디스는 그녀가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그는 보좌관을 내보내 차를 내오라고 이야기하고, 캐서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짜 차나 마시자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차 마실 시간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당신이 요즘 워낙 바쁘니까.”
얼굴 보기 힘들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 같다. 서재에서 너무 오래 지내긴 했지. 캐서린은 미안하다며 작게 중얼거리다 배시시 웃었다.
“로렌디스, 있잖아요.”
캐서린은 제임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로렌디스에게 간략히 전했다.
로렌디스도 이미 포트런 마을의 화재는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는 일 없이 무던하게 들었다. 눈을 감고서 캐서린의 이야기를 듣던 로렌디스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고서야 다시 눈을 떴다.
“당신 뜻대로 해.”
“음, 외부인을 내성에 들이는 거니까요. 아무래도 이런 건 안전적인 측면도 있고, 당신에게 허락을 받는 게 좋지 싶었어요.”
“어린애 하나 못 지킬 거면 성벽은 왜 쌓았겠어. 내 목숨 하나 지키자고 세금 거둬 가며 영지민들 보호하는 줄 아나?”
툴툴대면서도 하는 이야기였지만, 속뜻은 문제없으니 그대로 진행하라는 의미였다. 그는 한쪽 턱을 괴고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집무실에서 그는 꼿꼿하면서도 단정한 인상이었는데, 오늘은 그의 기운이 삐뚜름하게 삐뚤어진 기분이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뎐트 놈이 어디 갔는지 안 보여서.”
캐서린은 아차 싶어서 입술을 다물었다. 야만족의 후계자가 지금 헬렌에 있으니까, 어디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가 모습을 대놓고 숨긴다는 건 만남을 회피한다는 뜻이었다. 항상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더라니…….
“어디 갔나?”
캐서린이 작게 읊조리는데, 작은 바람이 스치듯 집무실 안을 훑었다.
“가까이 있는 것 같네요.”
“어째서?”
“그냥, 왠지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로렌디스는 실없다며 작게 웃었다.
홍차는 따뜻했다. 찻잎은 외부에서 수입하는 편이라는데, 수입품의 질이 월등히 좋아서인지 향이 모두 고급스러웠다.
찻잔에 입술을 묻고 숨을 깊게 마셨다. 따뜻한 내음이 콧속을 훑었다. 붉은색 찻물은 예전의 무언가를 연상시키게끔 했다.
“생존자가 여기로 오면, 황후는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될 거야.”
“아무래도요. 황후의 사람들이 움직인 거라면,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부딪치겠죠. 다만, 우리는 잃을 게 없어요.”
황후가 작정하고 군사를 보내서 헬렌을 무너트리는 게 아니고서야, 헬렌은 잃을 것도 없다. 그저 어수선한 수준으로 끝날 테지.
다만, 황후는 다르다. 세이렌 발러하드 황후는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마침내는 폐위될 것이다. 둘째 황자도 신분을 잃고 황궁에서 쫓겨날 거고.
무려 북부의 야만족이다. 세이렌이 이들과 접촉했다는 건 제도의 안위는 관심 밖이라는 방증이었다.
그건 즉, 황후가 황족으로서의 책무를 위반한 거니까 책임 또한 무거울 거다.
“폐하께 직접 말씀을 올릴 건가요?”
“응. 이대로는 긁어 부스럼 만들 일만 더 늘어나지 싶어서. 기회 될 때 치워 두는 게 낫지 싶어. 뎐트가 확고한 증거도 얻어 왔고.”
“그가 왜요?”
“첫째 놈을 다시 돌려 달라는 거야. 그 거래의 표시로 황후를 끌어내릴 증거 또한 주겠다는 거고.”
로렌디스는 떠올리기만 하면 답답하다는 듯 미간 사이를 찌푸렸다.
“뎐트는 대놓고 싫어하면서도, 제 일족을 벌레 챙기듯 챙기더군.”
“성격 같아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내심 잔정이 깊더라고요. 오랜 세월을 살았다더니 성격도 무뎌진 모양이죠.”
로렌디스는 대충이나마 짐작했다.
뎐트는 첫째를 다시 데려가기 위해서라도, 또 다른 무언가를 내올 것이다. 그게 보상일 수도 있고, 뇌물일 수도 있다.
로렌디스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예정대로라면 황후에게 곧장 쳐들어갔겠지만, 지금은 시간적 여유를 뒀다.
‘마음이 쓰이는군.’
눈을 감더라도 모든 게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받은 도움들이 좀 많았어야지.”
“기형적인 관계네요.”
“놈도 그걸 알 거야. 그래서 첫째를 데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한 걸 다시 내줄 거야.”
그게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로렌디스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 줘야겠지.”
“무엇을요?”
“저놈도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할 거니까. 세상 무던해 보여도, 의외로 또 예민한 놈이라서 말이야.”
로렌디스는 창가 쪽에 시선을 잠깐 뒀다가 거뒀다.
작은 바람이 또다시 불어왔다. 산들거리는 산들바람이었다. 뺨 한쪽을 스치는 바람은 한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마냥 차갑거나 따갑기보다는 포근했다.
로렌디스는 눈을 감고서 혀를 찼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창가 한쪽으로 긴 은발이 비쳤던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