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머리가 멍해졌다. 캐서린은 멀거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포트런 마을의 화재는 이미 소식지로 전해 들었다.
신문 한편에 헤드라인이 크게 나왔었으니까. 당연히 캐서린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떼죽음?”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죽었다고.”
“화재 사고로 죽었다고……?”
“사고가 아니었어.”
제임스는 확인사살하듯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냈다.
“조사관들 이야기로는 도적단의 습격이었다나 봐. 도적단도 잡혔고. 놈들이 마을 하나 습격하고 불태웠다는데, 누가 봐도 꼬리 자르기잖아!”
제임스는 짧지만 한 번 머물렀던 동네라고 혼란스러워했다. 캐서린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사람을 보낸다더니 직접 확인한 거야?”
“빠릿빠릿한 놈들로 보냈는데, 답이 늦어서 뭔가 했더니 마을에서 추적까지 붙었나 봐.”
“추적까지 붙었다고……?”
“마을에 감시가 붙은 거야. 이건 도적단 따위가 벌인 규모가 아니야.”
마을 하나가 불탔다. 진짜 생존자가 없을까. 아무리 작은 마을이더라도 마을 하나가 통째로 전멸하기는 힘들다.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 돼.”
캐서린이 작게 읊조리자 제임스도 같이 앓았다. 그 부분을 확인해야 된다는 걸 이미 알면서도, 뒤가 밟힐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추적자가 붙었다니까? 그 마을에 숨길 만한 건덕지가 있다는 거야. 여기서 더 파고들면 위험해. 아가씨 남편도 지금 없잖아?”
“마을에 감시자가 붙었다면서? 그러니까……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해야 된다는 거야. 생존자가 있다면, 어디선가 쫓기고 있다는 거니까.”
작정하고 마을 하나를 지워 버린 거라면, 목격자를 살려 두었을 리 없다. 눈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본 게 아니라서, 캐서린도 몇 가지 추측을 내놓는 게 다였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여전히 찜찜했다.
“쯧! 사람 보내 두면 될 것 아니야!”
제임스는 툴툴대며 니콜을 찾았다. 니콜이 응접실로 오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보내서 조사하겠습니다.”
캐서린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안했다. 니콜은 금방 나갔다.
제임스는 아직도 분에 겨운지 숨을 쌕쌕대며 몰아쉬기 바빴다. 독이라, 독이라. 캐서린은 팔뚝을 흘끔 내려다봤다.
석 달이나 지나서 이제는 괜찮아졌다. 처음에는 시시때때로 화끈거렸지만, 이제는 그런 열상마저도 가라앉았다. 여전히 흉터는 남아 있긴 해도, 그건 옷으로 가려지니까 괜찮았다.
“제임스.”
“응.”
“나 여전히 위험해?”
제임스가 멈칫하더니 답했다.
“딱히.”
“한 번 더 살사초 독에 노출돼도 괜찮을까?”
“이 집 아가씨는 왜 이리 겁이 없어? 그 짓 했다간 이 댁 주인이 가만히 있겠어? 아가씨는 무사하겠지만, 내 목부터 잘라 버릴 거라고.”
제임스는 딱 보아도 위험한 궁리 중인 게 보인다며 캐서린을 타박했다. 제 목숨 귀한 줄 모르는 건 집안 내력이냐는데, 캐서린으로서도 멋쩍게 웃어 주는 게 다였다. 캐서린은 응접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맘때면 이 집을 떠날 거라고 여겼는데, 여전히 이곳에 있다. 그게 새로운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턱을 괴고 창밖을 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마님, 넨시입니다!”
“응. 들어와.”
제임스는 넨시가 오자 이만 가 본다며 몸을 일으켰다. 캐서린은 그런 제임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제임스.”
“왜.”
“고마워. 가만 보면 제임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더라고.”
제임스는 재미없는 소리를 한다며 툴툴대며 떠났다. 넨시는 제임스가 나가는 길을 가볍게 배웅해 주고 문을 닫았다.
“넨시는 무슨 일이야?”
“주인님께서 곧 귀환한다는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로렌디스가?”
“네! 곧 귀환하신답니다. 보좌관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니까, 주인님께서도 이미 외성에 도착했을 겁니다!”
뜬금없이 전해진 로렌디스의 귀환 소식. 캐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이맘때면 돌아올 때가 됐지. 그녀도 기다리던 참이었다.
캐서린은 맑게 웃었다. 무언가 복잡한 일이 터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그의 귀환은 반가웠으니까.
몇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귀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헬렌이 간만에 활기로 북적거렸다.
그의 귀환 소식이 들려온 다음 날이었다. 중앙광장에도 그 소문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돌아올 가족들을 기다리며 들뜬 마음을 추슬렀다.
―쿵
성문이 열렸다. 군마를 탄 기사들이 일렬로 들어섰다. 선두에서는 로렌디스가 그 일행들을 이끌고 있었다.
로렌디스는 주변을 찬찬히 훑고 말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뒤에서 부기사단장이 로렌디스를 불렀다.
“각하, 기운을 좀 죽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설원에서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다간, 영지민들이 겁을 먹을 겁니다.”
몇 달간 전쟁터만 떠돌았더니, 몸의 기운이 멋대로 날뛰었다. 거친 기운을 갈무리하고 로렌디스는 영지를 느릿하게 살폈다.
“내성까지 곧장 달린다.”
“각, 각하, 천천히 가십시오! 그래도 영지민들에게 얼굴을 조금이라도 비춰야 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로렌디스는 적당한 성의를 보여 줬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말을 거칠게 몰았다. 말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고 허리를 박차자, 말이 빠르게 도로를 가로질렀다. 매끄럽게 닦아 둔 길목은 내성까지 쭉 뻗어 있었다.
로렌디스가 멀리서 달려오는 걸 본 기사가 내성 선물을 빠르게 열었다. 로렌디스는 멈추지 않고 내성 안까지 직행했다.
검은 머리칼이 어지럽게 날렸다. 갑옷에 묻은 핏자국은 닦아 냈지만, 거칠었던 전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먼지를 가로지르며 달린 군마가 빠르게 멈춰 섰다. 앞발을 들며 푸르릉거리던 말은 갈기를 만져 주며 진정하며 더운 열을 식혔다. 로렌디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벌써 나와 있었나?”
“온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긴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로렌디스의 뒤로 일행들이 속속히 도착했고, 부기사단장이 질책하듯 로렌디스의 뒤통수를 흘끔거렸다.
‘각하께서도 천천히 좀 가시지.’
로렌디스는 군마에서 단번에 뛰어내렸다. 성큼성큼 다가가자 아내가 팔을 뻗었다. 그는 그녀를 그대로 끌어안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자리를 너무 자주 비우는군.”
“그게 어디 당신 잘못이던가요.”
캐서린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녀의 맑은 눈웃음을 보고 있자니, 힘이 맥없이 풀렸다.
* * *
‘자리를 너무 자주 비우는군.’
로렌디스가 읊조리며 한 이야기는 자책에 가까웠다. 하긴, 떠나기 전까지 캐서린은 독으로 한 번 크게 앓았으니까. 캐서린은 일부러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고, 로렌디스는 그녀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몸이 차가워요.”
“설원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왔잖아.”
“그래도요. 너무 차가운데.”
캐서린이 그의 손목을 감싸 쥐자, 로렌디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 턱에 잘게 입을 맞췄다. 따뜻함과 포근함.
그런 비슷한 것들이 몸 안을 훑었다.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캐서린이 작게 바르작거리자, 부기사단장이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각하, 마님께서 어디 가십니까? 뭘 그리 성급하시게. 큼큼!”
부기사단장은 멋쩍게 구는 수하들을 찬찬히 살피고 앞장서서 이야기했다.
“각하. 저희는 그만 해산하겠습니다.”
“각자 알아서들 해산하고, 부기사단장과 기사단장은 나중에 회의실에서 다시 보도록.”
부기사단장이 짐짝처럼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갔다.
‘수레?’
로렌디스는 부기사단장을 보내 두고, 캐서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몸이 조금 가볍다고 느꼈는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훑어 내렸다. 그러더니 왜 이 꼴로 있었느냐며 작게 타박했다.
“하녀들이 그간 너를 굶기기라도 했나?”
“송, 송구합니다, 각하.”
“죽고 싶어서들 환장했군. 몇 달 자리를 비웠다고 애를 이 꼴로 해 놔?”
넨시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납작 엎드렸다. 캐서린은 애먼 하인들을 그만 괴롭히라며 그의 어깨에 턱을 묻었다. 익숙한 체향이 콧속으로 스몄다. 먼지 향과 옅은 나무 향이 섞였다. 나무 향은 어디서 묻혀 온 거지.
‘무엇보다 애가 아니라니까요.’
캐서린은 자못 억울해졌다.
“오자마자 웬 잔소리예요.”
캐서린은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로렌디스가 가뿐하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가까이 맞닿은 몸에서 익숙하면서도 편안한 기운이 풍겼다.
“당신 몸에서 나무 향이 나요.”
“모닥불에서 묻은 거야.”
“그렇군요.”
“너에게서는 살내음이 나.”
“당, 당신 왜 그래요?”
딱 보아도 하녀들 좀 그만 괴롭히라는 이야기에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것이다. 캐서린은 당혹스럽게 그의 입술을 막았다.
“못하는 말이 없어요.”
“너희는 가서 목욕물이나 준비해 둬. 먼지 속에서 구른 기분이라서 먼저 씻어야겠어.”
로렌디스가 쭈뼛거리던 하인들에게 이야기하자, 너 나 할 것 없이 목욕물을 준비하러 떠났다. 뒤따라 걷는 로렌디스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경쾌했다.
“나는 놓고…….”
“너도 같이 씻어.”
하인들이 한발 빠르게 목욕물 준비를 끝마쳤다. 그는 하인들이 빠져나간 걸 확인하고 캐서린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고 숨을 들이쉬는데, 콧등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벗어 봐.”
“네?”
“상처 나았는지 봐야 하니까.”
캐서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몸을 밀어냈다. 앞뒤 말을 다 잘라 내고 내던지듯 하는 이야기에서 무지막지한 고집이 느껴졌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어깨끈을 손으로 풀어냈다. 약하게 버둥거리며 벗어나려는데 로렌디스의 눈이 어둡게 잠기는 걸 보고서, 캐서린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흉터도 거의 다 옅어졌어요.”
“오래 남는군.”
“살을 도려내듯 했었잖아요. 의료진의 그런 처지가 없었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고요.”
이제는 흔적만 남았다. 가끔씩 화끈거리던 통증도 없고, 그 흔적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괜찮다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을 뻗는데, 딱딱한 갑옷에 손이 닿았다.
“이런.”
로렌디스가 갑옷을 벗었다. 갑옷이 묵직하게 툭툭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캐서린의 옷가지를 한 꺼풀씩 벗겨 내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이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