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캐서린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뎐트가 그의 손을 내려서 잡았다. 손목에 감긴 손아귀가 차가웠다.
“뎐트.”
캐서린이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뎐트가 책꽂이에 느릿하게 기댔다. 손목을 잡은 손아귀도 금방 떨어졌다.
마치, 네 반응이 재미없어서 흥이 안 난다고 따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캐서린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눈빛은 짙고 탁했다.
“인간미라는 걸 가져 보는 게 어때요. 그럼 당신도 사람들 틈에서 섞여 살기도 좋을 텐데요?”
“금방 죽어 버리는 녀석들 틈에서 섞여 살아보아야 무어 좋을 게 있다고.”
뎐트는 이제 저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냈다. 본인이 누구인지 아니까, 아니 모르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는 그냥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그의 무심함은 그런 부분에서 기인했다. 그가 캐서린을 쿡쿡 찔러보는 건, 발밑에 있는 꽃잎을 밟을지 피해 갈지 고민하는 아이의 것과 닮아 있었다.
“있잖아요.”
“왜.”
“페레타 왕국의 초대 왕 말이에요. 페레타의 초대 왕이 평민이었다던데, 뎐트는 그가 왕이 되는 모습을 직접 봤나요?”
캐서린은 금서를 원래 자리에 꽂아 두었다. 뎐트는 그런 캐서린의 뒷모습을 눈 안에 담아냈다.
페레타 왕국. 이제는 흔적만 남은 고대의 왕국이다. 유례없는 부흥을 이루어 냈지만, 한순간의 빛처럼 빛났다가 사그라졌다.
뎐트는 금서가 꽂힌 책꽂이를 가만히 살폈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책장을 훑었고, 창백한 손가락이 유난히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봤지.”
읊조리듯 하는 이야기는 혼잣말 같았다.
“직접 봤다고요? 혹시 멀리서 본 거예요?”
“가까이서 봤다고 하면 안 믿는 건가?”
캐서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페레타 왕조의 설립이 1000년도 더 됐을 건데요?”
“그럼 내가 이곳에 있은 지 1000년도 더 됐다는 뜻이겠지.”
“당신은 그럼 여기서 얼마나 있던…….”
“적어도 페레타 왕조가 설립되기 전부터 있었겠지.”
평민이었던 페레타 왕이 야만족과 싸우던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 금서는 그저 기록이다. 과거의 편린이 모이고 모인 기록 말이다.
“페레타 왕이 누군가를 기다리던 거 같은데, 뎐트는 누군지 알겠어요? 자서전에 적힐 정도면, 제법 오래 기다린 것 같거든요.”
“누구일 것 같으냐?”
오히려 뎐트가 캐서린에게 되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죠?”
“모른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당당히 하는군.”
캐서린은 질문을 조금 바꿔 보기로 했다.
“페레타 왕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어리석은 놈이었어.”
“어째서요?”
“야만족을 토벌하면서도, 이들을 원망하지 못했으니까. 마음이 단단히 여물지 못한 놈이었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을 머저리 같으니라고.”
뎐트의 목소리는 자책 같았다.
“뎐트.”
캐서린은 그의 이름을 작게 부르며 신음했다. 낮고 어둑한 감정이 너울거리며 그를 덮쳤다. 칠흑 같은 어둠이 안개처럼 퍼졌다.
“당신, 페레타 1세와 알던 사이였네요.”
뎐트는 답하지 않았다.
“그럼, 페레타 1세가 기다리던 게 뎐트예요?”
페레타 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부분이 자서전에 직접 적혀 있었다. 그건 일종의 비망록 같았다.
“맞군요. 페레타 1세가 계속 기다리던 것 같은데, 어째서 안 만났어요?”
“그건 어디서 들은 거냐……?”
“페레타 1세의 자서전에 적혀 있었거든요.”
둘은 만나지 못했다. 왜 만나지 못했을까?
뎐트라면 그 답을 알 것도 같다.
“왜 만나지 못했어요?”
뎐트는 확답해 주지 않았다. 답을 피하는 듯 보이지만, 또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피하는 뉘앙스도 아니었고.
캐서린은 긴가민가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1000년이란 세월을 지나 보냈다더니, 저 속에 깃든 감정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겠다.
“놈을 만나도 해 줄 이야기가 없었으니까.”
뎐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요, 허황한 이야기인 줄 아는데요.”
지금은 허황한 가정만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캐서린은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설화 이야기를 해 줬잖아요.”
“그랬지.”
“설인에 잡아먹힌 아이 말이에요. 혹시, 진짜 그런 아이가 있었던 일이에요?”
“있었지. 1000여 년 전에 말이다.”
“그때 소년은 죽은 게 맞나요? 그으, 설인에게 잡아먹혔다던 소년 말이에요.”
1000년도 더 된 설화 이야기를 한다는 게 묘한 이질감을 불러왔다. 뎐트는 캐서린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답했다.
“죽었지.”
“진짜요?”
“무엇이 궁금한 거냐?”
그 이야기를 하는 뎐트의 표정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아득한 과거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는 것 같았다. 검은 도포가 작게 너풀거렸다. 바람이 불어올 리 없는데, 서재 안쪽으로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
“이제는 죽고 없는 아이일 뿐인데, 뎐트는 왜 그런 표정을 해요?”
“너는 너무 예리해.”
뎐트는 얕게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나는 네가 그럴 때면 싫어.”
뎐트는 속 모를 이야기를 하면서 떠나려는지 창문을 열었다. 캐서린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죽은 게 아니죠?”
“…….”
“그 아이, 살았어요?”
야만족 저주의 시초이다. 그런데 꼭, 그때 죽은 게 끝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든다. 마치 그게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뇌리로 박혔다.
뎐트는 호오? 하며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은은히 웃으며 답했다. 그건 캐서린에게 웃어 주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이곳에 없는 누군가에게 웃어 주는 미소였다.
“그래. 살았어.”
내가 살려 냈으니.
뎐트가 작게 덧붙였다.
“어떻게요?”
“의외로 답은 가까이에 있는데, 너는 아직 느끼지 못한 모양이구나.”
캐서린은 숨을 천천히 고르고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럼요, 페레타 1세가…….”
“설인에게 잡아먹혔던 최초의 인간이었지.”
설인에게 잡아먹혔던 최초의 인간.
페레타.
그리고 설인.
페레타는 모종의 이유로 다시 살아나서 페레타 왕국의 왕이 됐으며, 저주로 죽은 설인은 야만족의 시초가 됐다.
북부의 가호는 거기서 시작됐다. ‘가호’라는 이름이 조금씩 바뀌면서 이어져 왔을 뿐, 태초의 가호는 페레타 왕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페레타의 가호.
북부의 가호.
헬렌의 가호.
그리고 야만족의 저주.
그러니까, 설인에게 잡아먹혔던 어린아이가 모종의 이유로 살아나서 페레타 1세가 됐고, 거기서 북부를 지켜 왔다는 뜻이구나.
“놀랄 것 없다.”
“…….”
“너 또한 여기 있잖느냐.”
이상할 건 없다.
덧붙여 이야기한 뎐트는 홀연히 사라졌다.
* * *
진료동의 복도를 누군가 빠르게 가로질렀다.
니콜은 손아귀에 급보를 꽉 움켜쥐고 스승의 진료실을 찾았다. 진료실에 반쯤 엎어져서 졸던 제임스는 니콜의 방문에 의자에서 쓰러지듯 넘어졌다.
“니콜, 내가 들어올 때는 노크라는 걸 하랬잖아.”
“스승님, 포트런 마을에서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니콜과 제임스는 헬렌을 비우지 못해서, 한라원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놈들을 대신 보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뭔 사달이 났는가 했더니, 이제야 놈들에게서 급보가 도착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제임스는 팔을 뻗어서 급보를 가져왔다.
[마을이 전소됐다. 뭔 개자식들이 엮였는지, 마을에 다녀간 뒤로 추적이 붙어서 따돌린다고 급보를 붙이는데 시간이 더 들었어. 어디 높은 귀족이 엮인 모양인데 괜찮은 거냐? 의사 선생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설치더니 괜한 짓 한 것 같군.]
제임스가 포트런으로 보낸 이들은 한라원을 자주 찾던 음지인들이었다. 행실이 빠릿빠릿해서, 빠르게 일을 해결하기에는 최적 같아서 보냈더니……. 제임스는 급보를 마저 다 읽었다.
[독을 쓰던 공방이 전소됐고, 나무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아서는 맹독류도 다루던 곳인데 텅 비어 있더군. 누군가 공방을 급습하고 거기를 태운 모양이야. 인근에서 머리 잃은 시체도 나왔다. 마을 주민들도 학살당했어. 도적단의 소행이라는데……. 웬 추적까지 붙어서 염병!]
그 뒤로는 욕설만 나왔다. 이딴 일을 시켜서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 * *
캐서린은 덩그러니 앉아서 눈을 깜빡거렸다.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는데, 혼이 쏙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였지…….
“마님!”
캐서린은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넨시가 캐서린의 어깨를 두들기다가 흠칫 놀라며 손을 뗐다.
“놀라셨습니까?”
“아니야. 무슨 일이야?”
“제임스 박사가 찾아왔습니다.”
캐서린이 찻잔을 내려 두는데 응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본래 예법대로라면 밖에서 하인이 한 번 더 기별을 넣는 게 맞는데, 제임스는 예법은 잊어버린 지 오래라며 문부터 열어젖혔다.
“제임스 박사, 마님 앞에서 예의를 차리라고……!”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하죠.”
하녀들을 의식해서인지, 제임스가 말을 높였다. 건들거리던 행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사달이 난 모양이구나. 캐서린은 넨시에게 나가라며 눈짓했고, 그녀는 뭐라고 묻지 않고 하녀들을 데리고 나갔다.
“이야기해.”
“황후라고?”
“제임스, 왜 그래?”
“그 자식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제임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복도에서 괜찮으냐며 하인 하나가 물어왔다. 캐서린은 괜찮다며 답해 주고 제임스에게 목소리를 낮추라 경고했다.
“제임스, 말로 이야기해 줘야지 나도 알아.”
“포트런 마을이 불탔대. 그건 아가씨도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 거고.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들까지 떼죽음을 당했다는데 아가씨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