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지난 전투와 똑같았다. 대신, 이번에는 설원이 산사태로 드문드문 무너졌고, 낙뢰의 흔적인지 나무 몇 그루가 검게 그을렸다.
로렌디스는 야만인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주변을 훑었다. 너무나 싱겁게 이어지는 전투는 학살이라고 봐도 좋았다.
헬렌이 일방적으로 야만인을 도륙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제 일족이 죽어 나가지만, 자신의 도끼를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죽을 곳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방이나 마찬가지였다. 타들어갈 줄 알면서도, 그 속에 뛰어들어서 몸을 불태웠다.
“각하께서 저기압이시군.”
레너드는 칼을 가볍게 휘두르며 로렌디스를 흘끔거렸다. 제 주군은 무의식에 가까운 솜씨로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게 놈들의 목만 노려서 도려낸다는 게 더 기가 막혔다.
“각하! 뒤에!”
레너드가 소리치기도 전이었다. 로렌디스는 매끄럽게 몸을 돌려서 칼을 박아 넣었다. 뒤에서 도끼를 휘두르던 야만인이 맥없이 쓰러졌다.
“죄송합니다. 괜한 오지랖이었군요.”
“나는 신경 쓸 것 없으니, 레너드 네 목숨이나 잘 챙겨라.”
레너드는 무심하게 대꾸하는 주군의 모습에 흠칫했다. 서늘하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그 칼날에는 야만족의 피가 묻어났고, 그가 걷는 길 곳곳이 움푹 파였다.
로렌디스는 검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고민했다.
야만족과 설인,
북부의 가호와 야만족의 저주,
그리고 아버지의 실종.
헬렌에 우호적인 뎐트 칸.
야만족은 헬렌가의 주인을 건드리면 안 된다. 그것은 금기이며, 금기를 어긴다면 큰 대가를 치른다.
야만족은 이곳에서 죽을지언정, 승리해서 안 되며 이곳에서 죽어 나갈 운명이다. 설원을 벗어나서도 안 되며, 북부 영지를 침범해서도 안 된다.
설원에서만 지내는 일족.
저주받은 일족.
로렌디스의 칼이 우뚝 멈췄다. 어둑한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쳤다. 그를 집어삼킬 듯 위에서 덮쳐온 그림자는 무식하면서도 솔직했다.
살기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 맞아 주기도 어려웠다.
“각하!”
“레너드, 목소리 좀 낮춰라. 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두통까지 나려 한다.”
로렌디스는 몸을 크게 휘둘렀다. 뒤에서 달려들던 이의 복부에 발을 박아 넣고 거칠게 찼다. 바닥에 나뒹굴던 놈의 목은 수하가 꺾었다.
이들에게 목숨을 내어 주고 증명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아내의 숨이 멎었을 때, 그 순간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됐다.
“전장입니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놈이라면 그리되게 안 둘 것이다.”
로렌디스는 묘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죽어 버리면 제 일족이 모두 죽어 버리니까, 너는 나를 보호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 처지구나.
뎐트는 지금 이곳에 없다. 그런데도 가까이서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친우라.’
우리를 친우로 봐도 좋은가. 모호한 관계이다. 친우라기에는 적대관계에 더 가깝고, 앙숙이라기엔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다.
“이 일대는 정돈됐나?”
로렌디스가 짧게 일축하는데, 부기사단장이 일대를 정돈하고 다가왔다.
“네, 정돈됐습니다. 더 위로 움직이겠습니까?”
“곧장 움직인다.”
“수하들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로렌디스는 그간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흰 눈길이 붉게 물들었고, 곳곳에 쓰러진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아내고 고요히 떠났다.
* * *
몇 달 뒤.
캐서린은 읽던 책을 덮었다. 넨시가 찻잔을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 표지를 훑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로렌디스가 간 뒤로 헬렌은 고요했다. 그게 꼭 그가 안전하다는 이야기 같아서, 캐서린도 은연중에 긴장감을 놓았다.
“요즘 뭘 찾으시는 겁니까?”
캐서린이 먼 허공만 올려다보며 사색에 잠겨 있길 얼마, 넨시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리가 왜 싸우나 하는 그런 이야기.”
“네?”
“그냥, 이 긴 싸움을 이어 나가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어. 어딘가에는 답이 있을 것 같은데, 다 동화 속 이야기니까.”
어디서 그 근본을 찾고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할지. 모호한 게 한둘이 아니다. 여전히 캐서린에게는 어려운 세계이고, 설명하지 못할 영역이었다.
허구와 사실이 섞여서, 무엇이 허구고 무엇이 사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솔직히 실감되지 않는데, 여기서 허구와 실상을 구분하기란 더 어려웠다.
“100여 년이 더 됐어.”
“네?”
“제국이 이 땅에 자리 잡고, 영주들이 북부를 지킨 기간만 100년이야. 고대 왕국이 설립되고 몰락한 시기까지 합친다면, 못해도 천여 년은 저곳에 있었을 거야.”
고대 왕국이 몰락하고 새 왕국이 자리 잡고, 그 왕국이 다시 몰락하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이 북부를 지켰다.
이런 과거가 지금껏 이어져 온 곳이 북부이다. 북부는 그동안 여러 흥망성쇠를 이어 왔고, 야만족은 늘 같은 곳에서 자리를 지켰다.
“금서를 보면 나올까.”
캐서린은 서재에 있는 금서를 떠올렸다. 금지된 책이라는 게 묘한 어감이었지만 거기라면 답이 나올 것도 같다.
‘금서.’
일반적인 경로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길을 택하면 된다. 캐서린은 창밖을 내다봤다.
우리는 전서구를 따로 보내는 대신, 무소식으로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소식이 없으면 잘 지내고 있거니 여기라는 뜻이었다.
“얼마나 됐어?”
“무엇이요?”
“로렌디스가 떠난 지. 몇 달 지난 거 같거든.”
“넉 달쯤 지났네요.”
넉 달이면 시간이 제법 흘렀다. 저번 토벌은 반년 가까이 진행되고 마무리됐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시기에 마무리될 거다.
“보좌관들이 곧 끝난다고 그랬으니까, 남편의 귀환 소식도 슬슬 들릴 때가 됐지.”
브레디가 승전식을 준비한댔으니까, 로렌디스도 곧 돌아올 것이다. 가주의 빈자리 때문인지 브레디는 캐서린에게 급한 안건들을 대신 결재해 달라며 가져오곤 해, 브레디에게서 종종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잠깐 서재에 다녀올게.”
“또요?”
“아직은 석연치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아.”
금서에도 종류가 많다. 보통은 고대 왕국이나 북부의 주인들이 어떤 식으로 멸망하고 성장했는지를 보여 준다.
캐서린은 고대 왕국이 북부에 자리 잡았을 적의 책을 찾았다. 고대어였지만, 한때 교양으로 배워 뒀기에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페레타 왕국의 흥망성쇠》
북부의 역사와 근본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서 깊게 관심을 두지 않았건만. 나는 이제 여기서 이들의 역사를 되짚고 있구나.
캐서린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오래된 책 특유의 낡은 종이 냄새가 났다. 직접 글씨를 적었는지, 군데군데 잉크가 번진 자국도 가득했다. 노랗게 바랜 종이는 손때가 묻어서 반들반들했다.
“고대 왕국의 초대 황제가 평민 사냥꾼이었다고.”
캐서린은 책의 서문을 찬찬히 읽었다.
[초대 왕 페레타는 왕국을 감싸는 성벽을 쌓아 올리고, 왕국 국민을 보호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보내서 야만족을 토벌하게끔 했고, 거기서 얻은 부산물들로 왕국을 부흥시켰다.]
책의 인사말이었다. 뒤에는 왕이 직접 적은 일기가 있었다.
[왕국은 부흥하고 왕국민들은 안전하다. 나는 곧 죽어도, 왕국은 부흥할 거다. 아무리 나라도 노화는 피해 가지 못하는군. 이번 생에는 그래도 오래 살았으니 됐지. ……여, 당신은 언제가 돼야 만날 수 있는 거요? ……여. 당신은 어디 있는 거요?]
캐서린은 손수 한 글자씩 적은 듯 보이는 글귀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잉크가 번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왕이 자서전처럼 적었지만, 왕이 죽은 뒤로는 다른 사람이 이어 적은 모양이다.
[페레타 왕이 서거하시고, 서기관이 그의 행적을 본 책에 담는다. 페레타 2세가 본 왕국을 이어받았으며, 왕국은 유례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서남부의 땅을 개척했으며…….]
캐서린은 사색이 돼서 책을 덮었다.
‘제국 땅이 고대 왕국의 땅이었어?’
금서가 금서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될 영역이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제도 안팎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북부가 페레타 왕국의 땅이면, 서남부 제도는 종속된 영지라는……. 그럼, 얘들 왜 망했어? 잠시만, 망한 기록이…….”
고대 왕국의 몰락은 페레타 4세 왕이 일찍이 단명하고, 어린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았다가 숙부가 반역으로 왕위를 찬탈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숙부의 폭정을 참지 못한 왕국민들이 내분을 일으키면서 왕국은 몰락하고, 새 왕조가 탄생한다.
“진짜 야만족 때문에 멸망한 게 아니구나.”
“내가 말했잖아. 우리는 그저 있을 뿐이라고.”
캐서린은 멈칫하며 몸을 홱 돌렸다.
뎐트가 또 창문에 앉아서 캐서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로 들어왔어요?”
“창문.”
“사람이 왜 창문으로 다녀요?”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아.”
뎐트는 무던하게 문제될 게 없다며 대꾸했다.
“문으로 다니면 사람들이 볼 거라서.”
“그게 왜요?”
“귀찮아. 여기도 네가 빨빨대며 다니기에 신경 쓰여서 와 본 거지. 너는 뭘 또 뒤적거리고 다니는 거냐?”
뎐트가 창턱에서 내려오자 창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리고 그는 느릿하게 걸어서 캐서린 앞에 섰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서 턱을 쥐더니 웃으며 물었다.
“또 그 짓을 해 두면 놈이 싫어할까?”
차가운 한기가 몸 안에 스미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