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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86)화 (86/129)

86.

캐서린은 침대 위를 더듬거리며 그의 손을 피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위압적으로 흐르는 기운은 여전히 그녀에게 부담이었다. 캐서린은 아랫배를 꽉 누르듯 압박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일부러 덕지덕지 묻혀 두고 성질을 긁는 건, 일부러 나를 자극하겠다는 뜻이겠지.”

로렌디스는 뎐트의 이름을 읊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는 캐서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서 목덜미와 쇄골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묻자 서늘한 한기가 묻어났다. 역시나, 직접 맡으니까 더더욱 불쾌했다.

“가만히 있어.”

“잠, 잠시! 으응!”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입술로 살갗을 머금었다. 그 적나라한 접촉에 등골이 오싹했다. 허리를 뻣뻣하게 젖히는데, 그가 이빨을 세웠다. 그곳을 따끔하게 깨물고 혀로 축였다. 뭉툭한 혀가 목덜미를 쓸 때, 숨이 턱 끝까지 막혔다.

읏!

쇄골까지 내려온 입술이 움푹 파인 우물 안을 지분거렸다. 아픈 게 아니라 몽롱했다. 머릿속을 강하게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몸을 휘감는 긴장감은 금방 가셨다. 대신 발가락 끝에 적기가 관통한 듯, 세포 하나하나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자극은 몸에 감각을 수놓듯 집요하면서도 노골적이었다.

캐서린이 울먹거리며 목을 젖혔다. 목 안에서 터진 울음은 금방 삼켜졌다.

캐서린은 바르작거리며 몸을 섞었다. 어느 틈엔가 몸에서 로렌디스와 똑같은 체향이 나고, 뒤섞인 몸속에서 열기가 끓었다. 아랫배에 열기가 가득 고이고, 그가 몸을 겹칠 때마다 짙은 체향이 몸 안에 스미는 것 같았다.

그는 캐서린에게서 난다는 한기인지 기운인지 하는 것을 모두 덮어 버릴 작정이었는지, 집요하게 야금야금 그녀를 탐했다.

* * *

로렌디스는 갑옷을 입고 캐서린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이만 떠날 때가 됐다. 그는 무던한 손길로 손목보호대를 다시 점검하고, 그녀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찔렀다.

지난밤의 이야기는 그가 의식하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한쪽으로 미뤄 뒀던 사실이기도 했다.

지배자의 둘째.

둘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

로렌디스로서도 짧지 않은 시간을 지켜봤지만,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곁에 두고 지켜본 것일지도 모른다.

헬렌가를 보호하는 가호와, 야만족을 억누르는 저주.

가호는 헬렌가가 북부에 있기 전부터 전해져 왔다. 그건 고대 왕국이 북부에 자리 잡았을 때부터, 그 이후에 다른 귀족들이 북부를 스쳐 가는 순간순간에도 북부와 함께 했다.

‘하긴, 고대 왕국은 핏줄들끼리 싸우다가 내분으로 멸망했고, 다른 귀족들은 반란 등으로 몰락했지.’

이들이 몰락하고 멸망한 사유는 다양하지만, 야만족이 그 몰락의 직접적인 사유는 아니었다. 야만족은 그저, 그들의 자리만 지켰다.

뎐트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거다. 그놈은 침묵하면 침묵했지, 거짓말로 본질을 흐릴 놈이 아니다.

“헬렌의 가호랬지만……. 본질은 북부를 가호하는 거야. 그럼 야만족은 북부의 주인을 건드리면 저주를 받는다는 건가?”

야만족 하나가 캐서린을 건드렸을 때, 설원 일대가 얼어붙었다.

그녀의 심장이 멎은 순간도 몇 초가 다였다.

그 몇 초 사이에 설원 일대가 고요해졌다. 이변은 아주 찰나였지만, 그 몇 초 동안 설원이 뒤집혔다.

설원 인근 주둔지에서 보낸 급보에 의하면, 외성 근처까지 내려갔던 야만인은 모조리 얼어붙었다고 했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렌디스는 눈을 감고, 이제는 이곳에 없는 ‘그’를 떠올렸다.

“아버지께서 실종됐을 때는 이러지 않았지.”

그날은 고요했다.

야만족은 설원에서 꾸준히 내려왔으며, 로렌디스는 급하게 작위를 이어받았다.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다른 의미로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야만족에게 죽은 건 아니군.’

전대 공작 또한 헬렌의 가호를 받았다. 그게 북부의 주인을 보호하는 가호라면, 공작이 야만족에게 죽었으면 이번과 같은 일이 있어야 됐다.

‘그럼 왜 못 오신 겁니까.’

로렌디스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야만족에게 죽은 게 아니라면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로렌디스는 굵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캐서린.”

로렌디스는 고요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 *

캐서린은 고요한 부름에 눈을 떴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목덜미로 내려오고,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내려왔다.

찬찬히 더듬는 손끝이 거칠었다. 굳은살이 박여서 이제는 보드랍게 돌아오지 못할 손이었지만, 그간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든 만큼 로렌디스라는 사람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한 손이었다.

“왜요.”

캐서린은 웅얼거리며 그의 손을 피했다. 지난밤 시달리던 몸은 아직도 졸음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피곤해. 그만 괴롭혀. 어제도 충분히 괴롭혔잖아. 칭얼거리듯 꺼낸 목소리는 금방 묻혔다.

“이제 떠나야 돼.”

“으응.”

“얼굴 안 보여 줘?”

캐서린은 베개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서 마주 본 그의 낯이 유난히 또렷했다. 지난밤 짙게 물들었던 눈동자는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거친 기운은 여전했다. 캐서린은 그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베개에 뺨을 묻었다.

머리로는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캐서린은 주섬주섬 몸을 추슬렀다. 느른하게 잠들었던 감각이 스멀스멀 깨어났다. 그러자 척추에서부터 근육통이 일었다. 아파.

“몇 달간 얼굴 못 보잖아.”

“으읏.”

“이해 좀 해 줘.”

침대에 주저앉아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데, 로렌디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당신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웃음이 헤픈 사람이 아닌데 왜 점점 웃음이 많아지는지 몰라요. 캐서린은 그의 어깨를 약하게 밀어냈다.

“언제 나가요?”

“지금.”

“그럼 언제 와요?”

“나중에. 이번에는 좀 늦어.”

몇 달이면 빨리 오는 게 아니었나. 설원으로 한번 떠나 버리면 몇 년씩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다더니. 결혼을 기점으로 로렌디스도 변한 모양이다.

토벌 일정을 몇 달 내로 정리하고 온댔으니, 그는 약속대로 빨리 끝내고 돌아올 것이다. 이전 그의 일정에 비하면, 몇 달은 늦은 것도 아니었다.

로렌디스가 예전처럼 몇 년씩이나 영지를 비우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어땠더라. 하녀들 이야기에 따르면, 몇 년씩 자리를 비우는 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로렌디스는 짧게는 반년부터 길게는 3-4년까지도 영지를 비우곤 했다.

물론, 이따금 한 번 영지를 들르기는 해도, 다시 훌쩍 떠나기 일쑤였다.

‘달라졌구나.’

캐서린은 뻐근하게 무거워진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로렌디스는 멀거니 앉아 있는 캐서린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더니, 어린아이에게 설교하듯 이야기했다.

“폐하께서 찾으시면 적당한 말로 둘러대고 거부해.”

“나는 로렌디스가 아니에요.”

“북부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으면, 안주인이라도 빈자리를 지켜야지. 당신까지 자리를 비워 버리면, 두 주인이 모두 북부를 비우는 꼴이잖아.”

명분이야 만들면 될 일이고. 네가 황제의 부름을 거역하더라도 불충이라며 꾸짖을 사람도 없어.

로렌디스는 명확하게 짚어야 할 부분이라며 캐서린을 엄하게 타박했다.

“북부 비우지 마.”

“알았어요.”

로렌디스는 그제야 흡족하게 캐서린을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캐서린이 설렁줄을 당기자, 넨시가 서둘러 들어왔다. 넨시는 침실 안에 퍼진 녹진한 분위기에 멈칫하더니 곧장 캐서린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어요, 마님?”

“채비를 도와줘. 출정식에 가 봐야 해.”

넨시는 가볍게 치장을 돕고 긴 금발을 올려 묶었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가려우면서도 시원했다.

진한 남색 드레스를 걸치고 거기에 흰 숄까지 덮자 치장이 끝났다. 넨시는 드레스 모양을 잡아 주고 캐서린이 나가는 길이 열어 주었다.

“각하께서 저기 계시는군요.”

기사단과 마지막 회의를 끝내고, 로렌디스가 출정식에 올랐다. 그는 캐서린을 보고 멈칫하더니 말에서 뛰어내렸다.

로렌디스의 곁에는 익숙한 기사들이 몇몇 보였다. 레너드부터 만찬장에서 봤던 기사들이 대다수였다.

캐서린이 작게 알은체를 하자, 이들이 반갑게 웃었다. 전장으로 떠난다는 이들의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거친 기운이 넓은 땅을 짓눌렀다.

“왜 나왔어?”

“안부 인사를…… 못 나눴던 것 같아요.”

“인사야 나중에 다녀와서 나눠도 돼.”

로렌디스는 굳이 먼지 밖으로 나왔다며 캐서린을 타박했다. 대충 흘려들어서 잘 모르겠지만, 반 이상이 잔소리였던 것도 같다.

로렌디스는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이더니 다시 말에 올랐다. 흑마가 뒷발을 차며 푸르릉거렸다. 로렌디스는 말의 갈기를 만져 주고 캐서린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섰다. 말의 주둥이를 만져 주자, 말이 그녀의 손바닥에 콧등을 비볐다.

캐서린이 그의 곁에서 고개를 들자, 로렌디스가 팔을 뻗었다. 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감겼다.

“로렌디스?”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금방 묻혔다.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쥐고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매끄럽게 머금고 혀를 축인 뒤 다시 떨어졌을 때, 캐서린은 신음하듯 앓았다.

“다녀올게.”

몇 달간 떠난다는 사람치고는 가벼운 인사말이었다.

* * *

로렌디스는 눈앞의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 덮인 설원에 얼음 동상이 여럿 있었다. 외성 앞까지 내려온 이들의 흔적이었다.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얼어붙은 듯, 눈을 뜨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무언가 이전과는 다르군.”

로렌디스가 손을 뻗자 얼음이 손끝에 닿았다. 그러자 얼음이 깨지더니 먼지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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