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그 설화요, 당신 이야기예요?”
뎐트는 팔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내 이야기냐고?”
“그런데 당신은 미치지 않았잖아요. 헬렌에도 우호적이고, 또 이지를 빼앗겼다기에는…… 거리감이 있어요.”
아직은 기이한 감이 있다. 해결하지 못한 의문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설인은 어린아이를 잡아먹고 이지를 잃는다. 그리고 저주를 받아서 죽고, 그 자리에서 탄생한 게 야만족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설화이고 전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허황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태초의 설원에는 설인이 둘 있었지.”
“아아-”
“나는 그중 한 명일 뿐이었고.”
“뎐트 이야기는 아니란 거예요?”
“그놈은 이미 죽었어. 놈이 죽은 자리에서 야만족이 태어났고, 나는 죽지 못해서 그냥 있는 거고.”
북부에 설원이 잡았을 때부터 설원과 함께해 온 반신.
뎐트가 스스로를 야만족의 선인이라고 한 이야기도 그러면 설명이 된다.
야만족은 인간의 피를 탐한 죄로 저주받은 설인이 죽은 그 땅 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태초의 설인이 둘이라면…….
“형제 같은 거예요?”
“비슷해.”
“미친 거지 정말…….”
“나는 야만족이지만 야만족이 아니야. 설인이지만 설인도 아니지. 반신의 자리에서 쫓겨난 지 오래고, 놈들과 그냥 여기 있는 거야.”
그는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고, 그저 있었을 뿐이다. 야만족이라 부르지만 같은 야만족이라 칭하기 어려운 관계. 그제야 이 관계가 설명이 됐다.
“무언가 심경이 복잡한 표정이로구나.”
“저주라는 건 뭐예요?”
“내게 내 약점을 알려 달라는 건가?”
뎐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당신 약점을 알려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설인의 저주라는 게 뎐트에게도 해당하는 모양이다. 뎐트가 죄악을 직접 저지른 건 아니지만, 뎐트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뜻이겠지.
“내 심장이 멎었을 때요.”
뎐트는 이야기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 깃든 감정은 캐서린으로서도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주변에 크고 작은 일이 있었는데요. 뎐트는 알아요?”
“어떤 거.”
“기상이변이나 지진, 외에도 설원이 어수선했잖아요.”
뎐트는 입술을 작게 열었다.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더니 캐서린을 내려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건 답해 주지 않겠다는 뜻 같았다. 무언가 이야기해 주러 온 것 같은데, 그는 섣불리 입을 놀리는 대신 캐서린을 가만히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뎐트?”
“이야기해.”
“그건 뭐였어요?”
“답은 이미 나왔잖아.”
네가 도출해 낸 게 답이다. 내게 묻지 말고 네게서 답을 찾아라. 뎐트는 캐서린의 목덜미를 손으로 짚었다. 손가락이 맥박을 재듯 느릿하게 살갗을 쓸었다. 차가운 손끝이 쇄골 언저리에 닿을 때, 캐서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책꽂이를 짚었다.
“결혼식 때.”
“네?”
“결혼식 치렀을 것 아니야.”
결혼식이라면 헬렌에 처음 왔을 때를 이야기하나. 캐서린이 뎐트의 손가락을 밀어내는데, 그가 살짝 웃으며 손을 물렸다.
“네. 결혼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네요.”
“그때 의식을 치르지 않았나?”
“의식이라면……?”
“결혼식 때 보라색 숄을 쓰며 의식을 치렀을 거야.”
캐서린은 모호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식이라고 불릴 만큼 거창한 일이 있었나, 기억에 남는 건 면사포를 쓰고 죽으러 가던 길목이 유난히 길었다는 정도였다. 캐서린은 기억을 곰곰이 되짚었다.
“헬렌의 가호를 받았잖아?”
“아아, 네. 기억나요!”
“너희는 가호를 받았지만, 야만인들은 저주를 받았지. 그 저주가 무엇인가, 고민해 보면 답이 나올 거야.”
뎐트는 그 정도면 충분한 답이 됐을 거라며 손을 휘휘 저으며 일축했다. 헬렌의 가호. 예전에 로렌디스가 이야기해 준 기억이 난다.
헬렌의 가호를 받아 두고 감기에 걸리는 몸이라며, 빈약한 몸이라고 잔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결혼식 날 보라색 숄을 쓰며 치렀던 의식이 헬렌의 가호였다.
헬렌의 가호와 설인의 저주.
한쪽에게는 좋은 이야기지만, 다른 쪽에게는 나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헬렌에게는 보호를, 설인에게는 저주를.’
캐서린이 야만족의 공격으로 숨이 멎었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무언가 변하듯 격변이 찾아왔다.
“야만족은 우리를 공격하면 안 되는 거예요?”
“글쎄. 그런 것치고는 자주 내려오지 않나?”
“맞아요……. 실제로 거기서 죽은 병사들이 있잖아요?”
야만족의 공격 자체는 의미가 없다. 이들 저주가 기사들의 목숨 하나하나에 발동했다면 설원에서 전투를 치를 때마다, 격변은 수십 번도 넘게 찾아왔을 것이다.
헬렌의 가호랬지. 그러니까, 헬렌의 가호를 받는 이들은 헬렌가의 주인 내외이다.
“야만족은 헬렌가를 건드리면 안 되는 거군요.”
뎐트가 멈칫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나나 로렌디스가 그들에게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
“맞나요?”
이들은 헬렌의 주인을 건드리면 안 된다.
“예리하구나.”
뎐트가 히죽 미소 짓더니 입술을 더듬거렸다. 약점을 잡혔다는 얼굴은 아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던했다.
조금의 일그러짐도 없이 편안했다. 단지, 흥미로운 기색이 잠시나마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또 보자꾸나.”
뎐트가 캐서린의 목덜미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한기가 몸 안에 스미는 것 같았다.
“헬렌 공작에게도 안부 전해 줘.”
“네?”
“또, 너무 화내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고.”
* * *
캐서린은 화장대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넨시가 흰 침의를 꺼내 와서 입혀 주고 고요히 떠났다.
로렌디스는 늦은 저녁에서야 기사단과의 회의를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이미 씻고 온 참이었는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캐서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아냈다. 로렌디스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고, 캐서린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회의가 좀 길었네요. 전장으로는 언제 떠나는 거예요?”
“내일 아침에. 나오지는 마. 먼지 날리고 정신없을 거야.”
예전에도 로렌디스는 지금처럼 이야기했다. 결혼식 다음 날, 그는 전장에 오르며 나오지 말라고 캐서린에게 이야기했었다.
“당신은 내게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아요.”
로렌디스가 본인이 언제 그랬냐며 억울한 기색을 내비쳤다. 못마땅하다며 찌푸리는 눈매가 서늘했다. 그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더듬거렸다. 눈동자가 손짓에 파묻혔다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눈동자가 유난히 짙었다.
“당신 혼자 두고 가기에 신경 쓰여서 그랬어.”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어깨에 턱을 묻고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살갗에 닿는 감촉이 매끈했다. 캐서린이 쭈뼛대며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데, 시선이 사선으로 와닿았다. 손가락이 얼어붙은 듯 쪼그라들었다.
손가락을 작게 구부려 시트를 말아 쥐는데, 로렌디스가 목덜미에 숨을 얕게 터트렸다. 그리고는 쇄골 언저리를 이빨로 깨물었다. 짐승처럼 치아를 세우는 모습이 자극적이었다.
“왜일까.”
“네?”
“당신한테서 다른 냄새가 나잖아.”
캐서린은 침대로 몸을 뉘었다.
“무슨 뜻이에요?”
“당신 몸에서 꽃향이 나는 건 아나?”
“음, 제임스에게 이야기를 듣긴 들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맡기는 워낙 옅어서 의식도 못 할 줄 알았어요.”
로렌디스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캐서린은 아리송한 기분을 애써 지워 냈다.
그의 눈이 짙게 물들었다. 어둑한 눈동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사냥감을 잡아낸다. 그리고 그건, 이 침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꼬아 쥐었다.
“살내음과 섞여서 은은히 났지. 잠자리를 갖거나 하면, 당신 체취가 내 몸에도 묻어나거든. 그리고 지금은 말이야.”
로렌디스가 천천히 말을 끊었다.
“눈, 설원에서 자주 맡던 향이 나서.”
“아, 아……?”
“너는 이유를 알 거야.”
캐서린은 짧게나마 고민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뎐트를 만났으며 서재에서 둘이서 잠깐 대화를 나눴다고.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캐서린을 잠에서 깨운 게 뎐트였으며, 서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그런 이야기가 끝나 갈 때쯤 로렌디스가 고요히 읊조렸다.
“선조라.”
로렌디스는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심드렁했다.
“언제부터 짐작했어요?”
“처음부터 다른 것 같다고 느꼈어. 그 껍데기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인간이라기에는 날것 그대로였으니까.”
로렌디스는 낮게 읊조리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허황한 이야기지만 마냥 거짓말이 아님을 알기에, 로렌디스는 설핏 웃어넘기는 게 다였다.
“그가 당신을 깨웠군.”
헬렌을 친우라고 이야기하는 야만족의 선조라.
인연이라는 게 너무 공교롭다.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만, 그의 기운이 네 몸에서 풍기니까 괜히 불쾌해졌어.”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툭, 밀어서 넘어트렸다.
“그 기운이라는 게 뭐예요?”
“설원의 한기 말이야.”
“나는 잘 모르겠어요.”
“놈이 나 맡으라고 묻혀 둔 모양이야. 그것도 온몸에 덕지덕지 묻혀 놨어. 기분 더럽게.”
일부러 그 기운을 풍기며 제 존재를 알렸다. 로렌디스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깊게 마셨다. 그 기운이 위협적이라서 캐서린은 몸을 뒤로 물리며 주춤거렸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무, 무엇이요?”
“다른 놈의 기운을 묻혀 왔잖아.”
안부 인사 전해 달라는 게 이거였나?
화내지 말라고 덧붙인 것도 이거 때문이었고?
“이리 와. 그 기운부터 지워 내야겠으니까.”
방금 전에 들은 말은 다 잊기라도 한 듯, 로렌디스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