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이 푸르게 갰다. 캐서린이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젖히는데, 방문이 열렸다.
“넨시입니다.”
넨시가 신문 하나를 가져왔다. 지금 막 도착한 소식지인지, 종이가 빳빳했다. 캐서린은 시큰둥하게 팔을 뻗어서 신문을 가지고 갔다. 언뜻 스치듯 본 신문에서는 화재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무언가 급변하는구나.”
신문에는 간략한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다.
[포트런 산맥 화재. 마을 인근 쑥대밭. 화재 이틀 뒤에 수습됨.]
포트런이면 어디지. 캐서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넨시가 마음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답했다.
“남서부의 산입니다.”
“여기서 멀어?”
“멀긴 멉니다. 제도를 지나서 더 남쪽으로 가야 하니까요.”
캐서린은 신문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뒀다.
무언가 급격하게 변한다. 그리고 헬렌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다. 자칫 잘못하다간 휩쓸려서 눈보라 속에서 허우적거릴지도 모른다.
캐서린은 눈을 감고 신문을 툭툭 두들겼다.
“고요하던 헬렌이 어수선해졌구나.”
그간은 폭풍전야였다는 듯, 하나둘 스멀스멀 불안한 기운을 풍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본 뎐트만 하더라도, 캐서린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꿈속을 헤집고 들어와서 의식을 깨웠으니까.
뎐트. 뎐트. 뎐트 칸.
스스로를 칸이라고 소개한 ‘그.’
캐서린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무언가, 무언가 더 있다. 모든 답이 이미 나왔다. 그것을 조합하면 될 일이었다.
“설화라. 설화라…….”
어지럽던 머릿속이 단번에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스스로를 선조라고 설명한 사람. 야만인의 선조이자,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삶의 흥미를 잃어버린 ‘그.’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고 설명했으며, 설화로 남은 야만족의 시작을 이야기해 주었다.
‘설인의 죄악.’
사람의 피를 탐해서 반신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피를 탐하는 악인이 되었다는 설인.
머리가 멍했다. 캐서린이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는데 문이 열렸다.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로렌디스가 제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넨시와 하녀들은 자리를 비켜 줬다. 지금은 괜찮다고 이야기해 줘도 이들에게는 썩 믿지 못할 이야기인 모양이다. 이들은 눈앞에 둬야지 안심이 되는 사람처럼 자리를 지켰다.
“왜 앉아 있어?”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깨어나자마자 또 뭐가 당신 속을 복잡하게 했을까?”
속 복잡할 일이 있거든 눈앞에서 치워 버리기라도 할 모양이다. 그는 일부러라도 더 캐서린 곁을 지켰다.
“식사는요?”
“기사들과 같이 하고 온 길이야.”
“바쁜 거죠?”
“응. 곧 떠나야 하거든.”
알던 사실이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전쟁이요?”
“응.”
“언제, 떠나요?”
“며칠 뒤면 바로 떠나야 돼. 당신이 눈을 일찍 떠서 다행이야.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떠날 뻔했어.”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그만큼 안 좋은 거예요?”
“외성 앞까지 놈들이 내려왔잖아. 토벌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야.”
아마도. 캐서린이 너무 늦게 깨어났다면, 그는 그 얼굴 또한 보여 주지 못하고 떠났을 것이다. 북부의 경계선을 너무 오래 비워 뒀으니까.
외성 앞까지 야만족이 계속 내려온다면, 그 주변의 피해가 더 커질 것이다. 이쯤에서 토벌대를 보내서 한 번 더 정돈하는 게 맞다.
‘전쟁.’
제국에서는 이를 전쟁이라고 이야기하고, 기사단은 토벌이라고 이야기했다.
결국은 짐승 떼처럼 달려드는 야만족을 모조리 학살하는 일이었으니까. 그게 북부의 국경선을 지키는 헬렌가의 일이었다.
“수하들은 어쩌고 있어요?”
“주둔지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당신을요?”
“내가 아닌 토벌을. 싸우기를 기다리는 거야.”
“무섭진 않아요?”
“늘 해 오던 일인데 무서울 게 뭐 있어. 조금 귀찮을 뿐이야.”
로렌디스가 매끄럽게 답하는 이야기에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캐서린도 어렴풋이 느꼈다. 지금 로렌디스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남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거라고. 캐서린은 혼잣말을 고요히 읊조렸다.
“진짜, 떠나는구나.”
안정기가 지나가면 격변이 오듯, 혼란은 천천히 땅 위를 잠식했다.
“그리고, 당신도 이미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어떤 이야기요?”
“외성 앞까지 내려온 야만인들 대부분 얼어붙었어. 살갗이 얼음으로 뒤덮여서 손가락으로 건들기만 해도 깨진다더군.”
“그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어요?”
“내가 듣기로는 없었어. 당신 숨이 멎었을 때, 난생처음으로 겪었어.”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면, 아무리 헬렌이라도 자연 자체를 공포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만큼 이번 기상이변은 이례적인 수준이었다.
도시 문명이 발전하는 데는 최소한의 안전이 담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 안전에는 자연재해나 외부침입으로부터의 보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헬렌이 자연재해와 침입으로부터 영지민을 보호해 줬기에, 영지민들도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거였다.
“별일 없을 거야.”
“네에-”
“왜 우울한 표정이야.”
“그냥, 주변이 어수선해서 그런가 봐요. 깨어난 지 좀 됐으니까 슬슬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로렌디스는 그 뒤로도 캐서린과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로렌디스가 떠날 무렵에는 진료동에서 의료진이 나왔다. 니콜과 제임스가 의료가방을 내려두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낯빛이 어둑해진 게 휴가라도 줘야 할 모양이다. 한라원에서 납치되듯 끌려오자마자 진료동에서 잡혀 지냈으니, 이들에게도 바쁜 나날이었을 것이다.
“염병!”
“왜 또?”
“노인네가 사표 수리를 안 해 줘. 사표 수리가 되기도 전에, 내 목부터 먼저 달아날 지경이라고!”
니콜은 엄살이라며 깊게 담아 두지 말라며 캐서린에게만 속삭였다. 제임스는 이미 귓속말을 훔쳐 들은 듯 보이지만, 어깨만 한 번 으쓱이며 넘겼다.
“스승님!”
“왜!”
“포트런 마을의 소식은 들었습니까?”
니콜의 입에서 익숙한 마을 이름이 나왔다. 제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캐서린은 저 이름이 왜 니콜의 입에서 나왔는지 물었다.
“니콜이 포트런 마을을 알아?”
“예전에 스승님을 따라서 의료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거든요. 의료봉사가 아니라, 엄밀히는 방랑 생활이었지만요.”
제임스는 음지 생활을 오래 한 만큼, 이따금 복잡한 사건에 연루된다 싶으면 의료원 문을 닫고 어디 멀리 다녀오는 날이 많았다.
“포트런은 살사초가 자주 나는 산지야. 남쪽에서 나는 독초랬잖아? 예전에 잠깐 거기서 은닉했었는데, 독을 다루는 공방을 알게 됐지.”
폐쇄적인 동네라서 이방인이 오면 금방 소문이 나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빈민가의 아이들이 독초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모습을 보고 잠깐 이들에게 관여한 적이 있었다.
“시기가 공교롭군.”
제임스는 손등을 툭툭 치며 고민에 빠졌다. 캐서린은 작게 이야기했다.
“저들도 공격받은 거야.”
“응?”
“외부에서 공격받은 거라고. 살사초가 외부로 유출됐어. 이번에 야만족이 살사초 독을 썼잖아? 북부도 아닌 남서부에서 나는 독을 놈들이 어디서 얻었겠어?”
로렌디스는 뒤에서 움직이는 게 황후라고 했다. 현 황제는 로렌디스에게 우호적이니까, 황후 혼자서 독단으로 저질렀을 것이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이 황후 귀에 들어갔댔으니까. 시기도 적절히 겹쳤어.”
“번거롭게 됐군.”
제임스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이며 고개를 젖혔다.
“니콜.”
“네. 스승님.”
니콜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바깥에 좀 다녀와. 그놈들에게 포트런 마을에 다녀오라고 해 봐야겠어.”
* * *
캐서린은 서재에서 설인 설화를 한 권 꺼냈다. 그리고 찬찬히 읽었다.
책을 덮자 서재의 커튼이 일렁거렸다. 닫힌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닥치는 것 같았다. 캐서린이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는데, 창문이 덜컹대며 열렸다.
은은히 불어닥친 바람은 누군가 나타나면서 잔잔히 사그라들었다. 캐서린은 그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왔어요?”
하녀들을 떼어 두고 온다고 나름 고심한 끝에 고른 장소였다. 가주의 서재는 주인 내외만 올 수 있는 공간이니까, 하인들을 떼어 두기에 제격이었다.
“나름 노골적으로 불러내는군.”
뎐트는 뒷짐을 선 자세로 책꽂이에 기대 있었다.
“기다리던 것 아니었어요?”
“그건 아니지만 솔직히 궁금하긴 해.”
뎐트는 심드렁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캐서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짐짓 무심한 눈에는 오랜 세월을 지나 보낸 흔적이 묻어 있었다. 적색 눈동자가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눈동자를 깜빡거리자, 그의 주변으로 느른한 기운이 퍼졌다. 긴 은발이 바람에 나부끼듯 살랑거렸다.
캐서린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뎐트가 나를 깨웠나요?”
“잠을 오래 자기에 깨웠을 뿐이야.”
“어째서요?”
“그대가 더 늦어지면, 헬렌 공작도 감정적으로 예민해지거든.”
뎐트는 캐서린을 흘끔거리며 돌아보더니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놈이 예민해지면 설원이 울어.”
“무슨 뜻이에요?”
“예민해지면 더 거칠어지거든.”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선뜻 그 의미를 되묻기엔 그의 표정이 어두웠기에, 캐서린은 모르는 척 넘기는 쪽을 택했다.
“설인의 죄악이 뭐예요?”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인간 아이의 피를 탐한 것 외에요.”
“피를 탐한 게 아니야. 식인이었지.”
뎐트는 무던한 어조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아이의 피를 탐한 게 아니라 식인이었노라고. 목덜미가 오싹한 기분에 서늘해졌다. 목덜미를 더듬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하는데, 서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