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머리가 멍하다. 줄곧 이런 상태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듯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몸의 감각도 점점 흐릿해지고, 캐서린은 눈을 감았다.
내가 이혼하고 떠났으면 이런 일도 없었으려나.
적당한 때에 몸이 치료되고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다.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 보려 했는데, 또 한 번 죽게 생겼다.
머리를 들쑤시던 울렁거림도 없다. 캐서린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서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찰박하며 물을 밟는 소리가 났다.
“너는 왜 또 여기서 홀로 죽어 가고 있냐.”
“뎐트?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뎐트가 캐서린의 이마를 툭 밀쳤다. 캐서린은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검은 어둠 속에서 뎐트와 캐서린의 모습만 또렷했다. 캐서린이 바닥을 더듬거리자 꼭 바다 깊은 곳에 있는 듯 손끝에 담는 감촉이 울렁거렸다.
“나 죽었어요, 설마?”
“죽어서도 나를 보려고? 끔찍하군. 헬렌 공작이 저승까지 따라와서 내놓으라고 시위할 듯싶어.”
“힘들어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이야기했잖아. 네 앞길은 가시밭길이고, 꽃이 피어도 한철이고 맨발로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처지라고.”
저주하듯 하는 이야기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없다. 그저,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듯 담백했다. 소름 돋을 만큼 서늘한 한기가 그의 주변을 감돌았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고, 뎐트는 또 왜 여기 있고.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내 후손이 저지른 짓이라서 그 수습 또한 내 몫이니까.”
“무덤덤한 어조로 후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거면, 본인은 그들의 선조라도 되는 듯이 들리는데…….”
예상하기는 했다. 오랜 기간을 살아온 듯한 행동이며 습관이며, 모든 게 평범한 부류와는 궤를 달리했으니까. 그가 누구인지는 이미 답이 나왔다. 캐서린은 이미 그 존재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일까. 무엇일까. 나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뎐트는 뒷짐을 지고 캐서린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여기는 네 무의식이고, 여기서 오래 헤매면 네 몸에도 안 좋다.”
“뎐트?”
“그러니까 나가라. 밖에서 걱정을 많이 한다.”
바닥에서 무언가 일렁였다. 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밑에서부터 손이 끌어 올라와 몸을 끌어 내리는 것 같았다. 캐서린이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며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 들자, 뎐트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만 일어나.”
“…….”
“내 친우가 슬퍼해.”
은은히 감도는 목소리가 잠겼다.
* * *
캐서린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눈앞의 잔상이 흐릿했다. 팔을 뻗어서 눈앞을 휘젓자,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손끝이 보였다. 손톱이 희고 동그랗게 정돈되어 있었다.
“으응.”
머리가 지끈거렸다. 캐서린은 침대를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팔뚝 한쪽이 잘린 듯이 아려 왔다. 손을 더듬거려서 팔뚝을 짚자, 피가 잔뜩 밴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 맞다.”
그대로 혼절해 버린 것 같은데 이제야 깼구나.
“넨시?”
캐서린은 캐노피를 들추고 넨시를 불렀다.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누워서 이불 위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 꿈을 다 꿨네.”
거의 잊고 지내던 기억이었다. 그런 날도 있었지. 이제는 옛일이 됐지만, 아버지께서 예정대로 은퇴하셨다면 캐서린도 급하게 결혼할 일 없이 평범하게 지냈을 것이다.
멍하니 천장을 보는데 무언가 쨍― 하며 떨어졌다.
“마님!”
넨시가 물 쟁반을 가지고 오다 말고 바닥에 엎어졌다. 일어나서 도와줄 기력이 없다. 팔을 뻗자 팔뚝이 저릿하게 당겼다.
어깨를 움직이자 붕대에 피가 더 배어났다. 몸 상태가 영 꽝이더라니. 마지막 기억이 데니스와 제임스가 처치하던 기억이었으니까, 상처 치료는 끝났을 거다.
“왜, 그래?”
“세상에! 나흘 동안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언제 그렇게 흘렀어?”
목덜미가 쭈뼛쭈뼛해졌다. 나흘이나 쓰러져 지냈으면 시간이 제법 흘렀을 것이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려 하자 머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마치, 커다란 종이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았다.
비틀대며 주저앉자 넨시가 급하게 캐서린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세상에 데니스 교수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제임스와 데니스가 들어왔다.
“그럴 것 없습니다. 이미 왔으니까.”
데니스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제임스는 어딘가 억울한 기색이 다분했다. 니콜이 곁에서 의료 가방을 챙겨서 따라왔고, 그 외의 의료진이 조수로 따라붙었다.
“사람 여럿의 목숨이 마님 앞에서 오고 갔습니다. 아십니까?”
“내가 병약해서 데니스가 고생이 많아요.”
“심장이 실제로 멎었습니다. 급하게 소생술로 살려 냈지만, 심장이 실제로 멎었다는 건 그만큼 극한의 상황이 오갔다는 뜻입니다.”
캐서린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창밖을 봤다. 햇살이 내리쬐는 게 날씨가 좋았다. 로렌디스가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현재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캐서린이 그의 행방을 찾는 걸 느꼈는지, 넨시가 대신 답해 줬다.
“주인님께서도 근처에 계십니다.”
하녀 하나가 로렌디스에게 다녀온다며 자리를 떠났다.
실제로 숨이 멎었다라. 그럼 진짜 죽음 앞에서 돌아온 거였나. 무의식 속에서 뎐트와 재회하고, 또 실제로 등 떠밀리듯 다시 깨어나고.
“마님?”
캐서린은 넨시의 부름에 눈을 크게 떴다. 상념에 잠겼던 머릿속이 뿌연 안개 속에서 헤쳐 나온 듯 대번에 또렷해졌다.
“내 숨이 멎었다고.”
캐서린이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 로렌디스가 갑옷 차림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캐서린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다가 로렌디스와 시선을 맞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음. 당신도 걱정이 컸던 모양이에요.”
“데니스, 다시 확인해.”
로렌디스의 고요한 지시에, 데니스는 다시 캐서린을 진단했다. 진단을 다 끝내고, 회복됐다고 이야기를 하고서야 곁에서 작은 탄식이 들렸다. 로렌디스는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미치겠군.”
“음, 걱정 많으셨어요?”
“당신은 깨지도 않고, 설원의 기세도 심상치 않고.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팠어.”
로렌디스는 캐서린에게 가까이 다가오려다가 갑옷 차림인 걸 보고 주춤했다.
“왜요?”
“차림새가…….”
“잘 어울려요. 은빛 기사님 같거든요.”
주춤하던 그는 어느새 그런 기색을 지우고 가까이 다가왔다. 손목 보호대를 찬 손이 캐서린의 머리를 툭-두들겼다. 규칙적으로 툭툭 두들기는 손짓을 빤히 올려다보는데, 로렌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사람을 항상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가더라.”
그의 손끝이 가슴 언저리에 닿았다.
“데니스, 제대로 확인한 게 맞나?”
“의식 완전히 회복하셨고 몸도 안정 되찾았습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에게 팔을 뻗어 보이며 멀쩡하다는 마음을 피력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보여 주자, 로렌디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뭐라고 타박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럼 됐어, 라고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에요?”
“외성 순찰. 경비를 더 강화하는 김에 외성 순찰 빈도수도 더 높였어. 당신 이러고 있으니까 나도 별수 없잖아. 토벌대에 합류하진 못하고, 외성 주변만 살피고 다녔어.”
넨시와 하인들이 물밀듯 빠져나갔다.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복도 밖으로 밀려나듯 고요히 떠났다.
“내가 그냥 여기에 자리를 잡고 지내?”
“왜요?”
“왜 내가 자리를 비울 때면 그런 일이 있느냐고.”
삐뚜름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외성 주변을 순찰했다더니, 그는 갑옷 차림이었다.
그런 로렌디스를 가만히 눈에 담아내던 캐서린은 눈을 감고 웃어 버렸다.
“약간.”
“왜.”
“이런 평화로운 날이 계속될까, 하는 걱정이 드네요.”
캐서린이 배시시 웃자 로렌디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 * *
캐서린이 깨어나고, 로렌디스는 미뤄 뒀던 토벌 일정을 다시 잡았다.
“바깥이 요즘 어수선한가 봅니다.”
“그러게. 로렌디스도 바쁜 듯 보이고.”
캐서린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아팠던 게 무색하게도, 몸을 운신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침실에 앉아서 안정을 취하는데, 하녀가 식사거리를 가져왔다.
“마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식사부터 하세요.”
넨시가 침대 위에 식사 자리를 마련해 줬고, 따뜻한 수프와 부드러운 요리들이 대부분이었다. 캐서린은 침대에 앉아서 끼니를 해결했고, 넨시는 그녀의 식사를 챙겨 주며 창밖을 걱정스럽게 흘끔거렸다.
“괜찮겠습니까?”
“뭐가.”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그러게. 그간의 안정기가 끝나고, 혼란기가 찾아온 것 같아.”
야만족 토벌은 이미 예전부터 다녀와야 할 일정이었는데, 캐서린의 심장이 멎으면서 일정이 지연됐다. 캐서린이 다시 깼으니, 토벌 일정이 본격적으로 잡힐 것이다.
캐서린이 스푼을 내려놓자, 넨시가 뜨악한 표정으로 다시 건넸다.
“마님, 식사를 똑바로 못 챙겼다간 제 목이 달아납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 여기서 더 먹었다간 탈 날 거야.”
캐서린은 멀거니 앉아서 발목을 까딱거렸다. 넨시가 옆에서 그간의 상황을 대신 설명해 주었다.
“마님 쓰러져서 있는 동안, 외성 밖으로 낙뢰가 쳤어요.”
“응?”
“무슨 사단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니까요? 마님 심장이 한 번 멎었는데, 그때 이 일대에서 낙뢰가 치고, 뿌연 안개가 설원을 덮었대요.”
이 일대가 뒤집히기라도 하듯, 주변의 자연환경이 심상치 않았단다.
설원 일대에서 지진으로 눈사태가 일어나고, 그 주변 야만인 여럿이 눈 속에 파묻혔다. 또한, 낙뢰가 치면서 그 위를 뒤덮고, 눈보라로 희뿌연 안개가 가득 찼다. 꼭 종말이라도 게 내려온 세계 같았다며 이야기했다.
자연재해는 흔한 일이다. 대신, 모든 재해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일은 절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헬렌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첨탑 위에서 본 하늘이 심상치 않았거든요. 주둔지의 병사들이 급보를 보내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로렌디스도 그 시기에 외성 밖을 순찰하며 경비를 강화했다. 그 자리를 오래 비우지는 못하고, 일대의 안전을 다시 살폈다.
“영지민들은 그게 꼭, 야만인들을 벌주는 것 같았대요.”
“벌이라…….”
“그런 기상이변은 흔치 않은 일이니까요. 모든 게 갑자기 뒤섞여서 설원을 덮었다니까요.”
넨시는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상이변으로 설원 주변은 어지럽지, 내성도 소란스럽지, 마님께서는 아직 의식이 온전치 못하지.
“누구 하나 죽어 나가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그 모든 순간들은 캐서린이 의식을 회복하며 차례대로 진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