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캐서린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나른한 햇빛이 내려앉는다. 눈앞에 긴 그림자가 졌다. 그쯤, 투박한 손길이 캐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씩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딸.”
밀던 자작이 캐서린과 눈높이를 맞추며 몸을 수그렸다. 사내가 웃자 캐서린도 마지못해 웃었다.
“응. 아빠.”
“아빠가 미워? 왜 아빠랑 얼굴을 안 보려고 그래?”
캐서린은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중이었다.
“저번에도 다쳤잖아. 이번에도 다치면 어떡해?”
“영광의 상처라고들 하지. 그래도, 내 몸 하나 아끼자고 전우를 위험에 빠트린다면 그게 더 자격이 없지 않을까?”
그런 의무나 책임 따위 모른다. 그런 건 어른들 세계의 일이지, 캐서린에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냥 자리를 자주 비우는 가족의 빈자리가 서운할 뿐이었다.
“은퇴하면.”
“응?”
“은퇴하면 딸 옆에서 살게.”
이제는 잊어서 흐릿해진 기억이다. 그 기억을 추억으로 봐도 좋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움이 뒤섞여서 감정들도 희석됐다.
아픔은 행복보다 오래간다.
그래도 잊으면 흐려진다.
이 모든 게 허상인 줄 알지만, 캐서린은 눈앞의 아버지에게 온 신경을 다 빼앗겼다.
어리광인 줄 안다. 꿈인 줄 다 아는데도, 캐서린은 그날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꺼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가지 마요.”
나 두고 가지 마, 제발. 그냥 여기 있어요.
그동안 잊은 듯 지내서 서로 소홀한 듯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오지 않은 뒤로는 의식적으로 잊고 지내려 했으니까. 떠나간 사람에게 미련을 보이면, 앞으로가 힘들 거니까.
놓아줄 때는 놓아줘야지 떠난 사람도 편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속삭였다.
“딸.”
“응?”
“그러니까 나중에 아빠 은퇴하면 딸은 결혼하지 말고 아빠랑 살자.”
캐서린은 멍하니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너는 결혼하면 삶이 박복할 거야. 예전에 점쟁이를 한 번 봤는데, 점쟁이가 그러더라고. 네 딸아이 인생이 박복하다고.”
“그때도 아빠가 없으면 어떡해.”
그 짧은 물음에 담긴 의미는 하나다. 은퇴할 때까지 내 곁에 없으면 어떡해. 그 이후가 없다면 어떡해. 그 이야기에 아버지는 질색하며 이야기했다.
“죽어서라도 말리러 올게.”
농담인 것 같지만 마냥 웃어 주지 못했다.
‘나는 다시 올 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캐서린에게는 어렴풋하게 남은 추억이다. 이따금 그리워질 때면 꺼내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아버지가 계모를 데려온 이유도 하나다.
홀로 남은 캐서린을 이웃집 아주머니께 부탁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그런 그녀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결국 모든 결정은 캐서린을 위해서였다.
안다. 아는데도 가끔은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가 곁에 있었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잃고 못 오면.”
“그럼, 설원의 주인이 길을 안내해 주겠지. 설원에는 길을 안내해 주는 반신이 있거든. 방랑객이 오면 놀래키기도 하고, 그들을 안내해서 다시 돌려보내 주기도 해.”
“설원에는 야만족이 살잖아. 반신이라니 거짓말하지 마.”
“그러니까 신비로운 곳이지. 반신과 야만족, 북부의 주인이 같이 사는 곳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이니?”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동화 이야기다. 내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나이로 보이냐고, 그를 질책하지만 아버지는 껄껄대며 떠날 뿐이었다.
‘다녀올게.’
아버지는 늘 그랬듯, 다녀온다는 이야기만 남기고 떠났다.
본인은 다시 돌아온다는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캐서린에게는 그런 확실을 주지 못했다.
못 온댔잖아.
다시는 못 온댔잖아.
그래서 가지 말랬잖아.
캐서린은 그 뒷모습만 늘 그랬듯 눈에 담아냈다.
* * *
로렌디스는 침실 앞에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앞에서 우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천천히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울음소리가 멎었다. 로렌디스는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며 침실에 발을 디뎠다.
“설명해라.”
로렌디스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음습하게 퍼진 목소리에는 살기가 묻어났다.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지.”
침실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불을 덮고 누운 아내에게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로렌디스는 손가락을 뻗어서 코밑에 가져다 댔다. 가느다란 호흡이 느껴진다. 그런데 곧 끊어지기라도 할 듯 가냘팠다.
“누구든.”
뚝뚝 끊기는 음절에 분노가 묻어났다.
“설명해야 하지 않겠나?”
데니스가 앞으로 나왔다. 일단 설명을 해야 하니까 설명을 한다지만, 그런다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기에 데니스의 마음도 무거웠다.
“마님은 각하와 다릅니다. 어려서부터 가문의 주치의가 붙어서 전문적으로 독 내성을 쌓아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님의 내성은 불완전합니다. 헬렌의 기사들이야 모두 스스로 독을 태워 낼 만큼 검술이며 체술이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지만…….”
“내 아내는 다르다?”
“헬렌이 아닌 외부에서 자란 아가씨는 다릅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호흡이 불안정했다.
로렌디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야만족이 쓰는 독은 어디까지나 행동을 둔화시키는 효력만 있었다. 잠깐 저릿하면서 몸의 감각이 둔화되는 수준이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전선에서 싸우는 기사들 한정이었다.
“위독하십니다.”
언제라도 심장이 멎을 듯했다.
“제임스는.”
“네?”
“제임스 박사는 어디에 있느냐고.”
데니스는 그제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임스가 진짜 사라졌다. 데니스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조수에게 제임스가 어디 갔는지 물었지만 조수도 모른다고 답했다.
“이놈이 어디를 간 거야?”
“가서 찾아봐.”
의료진이 떠나고 로렌디스는 침대맡에 앉았다. 맞잡은 손이 차가웠다. 그쯤, 그녀의 몸에서 꽃향이 나듯 달콤쌉싸름한 향이 퍼졌다. 로렌디스가 기이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리자, 데니스가 대신 설명했다.
“그게 살사초 독에서 나는 향입니다.”
“뭐?”
“살사초 독에 중독된 사람들 몸에서 난다더군요. 제임스가 알려 주었습니다. 보통은 향이 금방 옅어져서 독에 능통한 사람만 알아보는데, 마님께서는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향이 짙어서 알아볼 수 있었답니다.”
원래도 몸에서 옅은 향이 났었는데 그건 남들이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워낙 옅어서 몸에 은은히 배어 있는 살내음 정도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 향이 갑자기 짙어져서 독에 노출됐다고 깨달은 것이다.
“각하!”
“무슨 일이지?”
“외성으로 순찰을 나갔던 병사들에게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부기사단장이 침실 앞에서 급보를 내밀었다. 브레디는 급보를 받아서 로렌디스에게 건넸다. 붉은색이다. 전선에서 급하게 보냈다는 뜻이었다.
[외성 밖을 순찰하던 중에 설원에서 내려온 야만족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놈들이 한순간에 얼어붙었습니다.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그대로 깨져서 먼지조차 남지 않고 흩어졌습니다.]
급보는 짧고 간결했다. 로렌디스가 브레디에게 급보를 보여 주자, 브레디가 곧장 밖으로 나섰다.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브레디는 지금부터 현장에 사람을 보내서 추가적인 사태 파악을 할 것이다. 로렌디스는 데니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급한 처치는 끝났나?”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습니다.”
“특별한 보고사항은 없고?”
데니스가 잠깐 멈칫했다.
“아, 그게…….”
“뭐지?”
“중간에 한 번 숨이 멎었습니다. 호흡은 금방 돌아왔습니다.”
데니스는 다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님께서 막 혼절한 시점에 심장이 한 번 멎었지만, 빠르게 처치해서 호흡은 돌아왔다. 그다음부터는 가늘게 호흡이 이어지고 있는데, 당장 급한 고비는 넘겼다고.
“꽃향.”
은은히 퍼지는 꽃향이 익숙했다. 캐서린에게서 살내음처럼 늘 은은히 풍기는 그 향이었다. 몸을 섞을 때나, 부부침실에서 같이 시간을 오래 보내면, 그의 몸에도 똑같은 향이 배어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잊고 지냈군.”
그 주변에만 가면 은은히 배어나는 꽃향. 이제는 익숙해져서 무뎌졌다고 봐도 좋다. 그 향이 다시 짙어져서 이제야 실감 났을 뿐.
잊고 지냈다면 잊고 지낸 게 맞다. 평소의 말끔한 낯만 보더라도, 그저 무기력한 여인일 뿐 병약한 기색은 없었으니까.
도망치려고 아등바등 노력하긴 했어도, 살려고 아등바등 노력한 적은 없었으니까. 가끔은 그녀가 시한부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미쳤군.”
손에 이마를 묻은 순간, 제임스가 다시 귀환했다. 제임스는 그의 조수인 니콜과 동행한 참이었다.
“독 성분을 분석하고 오는 길입니다. 일단 살사초 독이 맞습니다. 독성이 내성을 잡아먹었습니다.”
“무슨 뜻이지?”
“지금으로서는 독을 이겨 내지 못한다고요. 억제제로 기껏 눌러놔도 솔직히 버텨 낼지 잘 모르겠습니다.”
헬렌인들 대부분도 솔직히 이 정도면 조금 앓다가 끝날 수준이었다. 적당한 때에 적절하게 치료만 해 주면 된다.
“여기 마님께서 위험한 건, 이미 오래전부터 노출돼서입니다. 그것도 악의적으로요. 그 균형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몸에 잔뜩 부작용을 불러올 거라고요.”
그래서 조심하라고 이야기한 거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그쪽 몸은 시한폭탄이니까 까딱 잘못하면 펑― 터져 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리고 다시, 부기사단장이 급하게 로렌디스를 찾았다. 야만족의 기세가 이상한 만큼, 외성 밖으로 떠날 토벌대를 꾸려야 했다.
“각하, 어쩝니까?”
“무엇이?”
“외성 밖으로 토벌대를 추가적으로 보낼까요? 추가로 인력을 배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때라면 로렌디스도 함께였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주둔지에 추가 인력을 배치해 놔.”
“각하께서는요?”
“지금은 아내 옆을 지키는 게 먼저 같군.”
“각하, 각하께서 자리를 오래 비우시면…….”
“나도 안다. 다시 설원에 설 때가 다가오고 있지. 그러니 나중에 움직이겠다는 거야. 아내가 깨면 가겠다.”
지금은 아내 곁에 있고 싶다.
그는 눈을 감고 부기사단장에게 지시했다.
“부기사단장이 지휘해서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 밖의 지시 사항이 더 있습니까?”
“설원 아래로 내려온 이들이라면, 모두 토벌해. 한 놈도 남겨 두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