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내성까지는 금방 갑니다!”
마차가 빠르게 달려 나갔다. 캐서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차 벽을 짚고, 창밖을 흘금거렸다.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 뒀지만, 틈새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보였다. 그 자체로 위압감이 흐르긴 충분했다.
―뚜둑!
어디선가 비명이 울렸다. 캐서린은 그대로 커튼을 젖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 얕게 탄식했다. 머릿속이 희게 질렸다. 도끼를 휘두르는 야만인들이 헬렌의 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아아.”
캐서린은 입술을 가리고 신음하듯 앓았다. 그 순간에도 마차는 빠르게 굴러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적색경보 이야기하면서 세 명이라지 않았나? 그런데 저기 보이는 사람만 하더라도 세 명이 넘는다.
“마님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무, 무슨 충격인지 설명을 해 주셔야죠!”
캐서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쾅― 묵직한 굉음과 함께 내부도 충격으로 어지러워졌다.
―쿵!
그리고, 마차의 바퀴가 부러지면서 주저앉았다. 쿵쿵거리는 충격음에 머리가 울렸다. 컥-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울리고, 호위기사가 마차 창문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요.”
“젠장! 마님, 놈이 마차 위로 올라탔습니다. 문밖으로 뛰어내리십시오!”
마차 천장을 뚫고 도끼날이 희번득 빛났다. 날카로운 날이 천장을 쪼개고 쩌적― 하며 갈랐다. 소파를 짚은 손아귀가 떨렸다.
캐서린이 밖으로 몸을 날리자, 기사 하나가 캐서린을 붙잡고 옆으로 굴렀다. 도끼날이 머리 옆으로 스쳤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도끼날이 바닥에 박히고, 검붉은 액체가 거기에 스몄다. 캐서린은 그 틈에 바닥을 더듬거리며 기었다.
“마님을 무조건 내성으로 모셔야 한다!”
“몇, 몇 명이나 더 있는 건가요!”
“일단 세 명입니다!”
“주변에 더 있을지도 몰라요. 꼼꼼하게 확인하세요!”
캐서린은 바닥을 더듬거렸다. 어쩐지 팔뚝이 지끈거렸다. 어깨를 더듬거리며 팔뚝을 만지작거리자, 선분홍빛 피가 묻어났다.
‘다쳤나?’
캐서린은 팔뚝을 손으로 감싸고 주변을 살폈다.
“레너드 경께서 처리 중인 세 명 외에, 추가 침입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방금 마지막 한 명 정돈했습니다! 추가 침입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은빛 갑옷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려서, 캐서린은 넋 놓고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머리가 약간 멍해진 것 같다. 눈앞이 살짝 흐릿해졌다가 밝아지고, 또 어지러워지길 반복했다.
‘이제 괜찮네.’
다시 괜찮아졌다. 바퀴가 내려앉은 마차로는 더 이상의 이동이 힘들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말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캐서린이 말 위에 올라타자, 기사가 그녀의 뒤에서 말고삐를 붙잡았다.
“더 없군요.”
“이상하네요. 고작 이 몇 명끼리 숨어들겠다고 성벽을 넘었다고요?”
“그건 확실히 이상하군요. 내성으로 가는 대로 각하께 말씀드려 조사하겠습니다.”
* * *
로렌디스는 매정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의 손짓에는 자비란 없었으며, 손짓 하나하나에 적의 목이 단번에 달아났다.
로렌디스는 뒤에서 달려드는 이들을 가볍게 제압했다. 그는 시큰둥하게 칼을 휘둘러 놈의 목을 베어 내고, 칼에 묻은 혈액을 털어 냈다.
“고작 세 명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서 급습을 허용해?”
“아, 아니. 그게……. 제가 처리하려 했는데, 각하께서 오신 겁니다.”
레너드의 억울한 목소리는 금방 묻혔다.
“주변에 따로 수상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나?”
“따로 발견된 흔적은 없습니다. 워낙 눈에 띄잖습니까? 그리고 상인으로 위장한 건, 기존에 헬렌으로 오던 상인을 습격해 이들의 짐을 갈취한 모양입니다. 그 짐이 인근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침, 기사단에서 버려진 수레를 수습해서 처리하는 중이었다. 로렌디스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칼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입었던 로브를 벗었다. 로브를 벗자 말끔한 제복이 드러났다. 그의 제복은 짧은 전투에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그는 제복에 앉은 흙먼지를 털어 내고 골목길에서 나왔다.
“이런 수작을 벌이는 놈들이 아닌데 이상하군.”
“성문을 맨몸으로 공격하는 경우는 봤어도, 지금 이건 놈들답지 않습니다. 황후와의 야합이 놈들에게 무슨 영향을 준 모양입니다.”
야만족은 1차원적인 놈들이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우며, 워낙 충동적인 녀석들이라 전술도 없었다. 그냥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고 붙이는 산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렌디스는 허리춤에 매단 검집을 툭툭― 두들겼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양상이라서, 로렌디스로서도 퍽 당황스러웠다.
“추가 침입자는?”
“마님 쪽으로 몇 명 더 간 것 같은데 금방 정리됐습니다.”
“그 밖의 피해 상황은 없나?”
“금방 정리돼서 괜찮습니다. 다만, 마님께서 탔던 마차가 바퀴가 내려앉았답니다. 그래도 중간에 말로 갈아타서 내성으로 복귀하셨답니다. 그 부분은 마님을 내성 앞까지 배웅했던 기사 하나가 돌아와서 보고했습니다.”
레너드가 고갯짓으로 골목길 밖에서 수레를 수거하던 기사를 가리켰다. 로렌디스는 알겠다며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단정하게 제복을 가다듬었다.
“새 로브 가져와.”
레너드가 로브를 가져다주자 로렌디스는 심드렁하게 새 로브를 입고 수하들과 합류했다. 수하들이 수거한 수레를 로렌디스 앞에 가져다 놨다.
“짐은 뭐였지?”
“솜과 이불 원단입니다. 헬렌에서는 워낙 자주 사들이는 품목이라서, 경비대에서도 의심 없이 열어 준 것 같군요.”
로렌디스는 성문을 열고 나가서 외성 인근의 야만족을 모두 토벌하는 게 먼저일지, 아내에게 가는 게 먼저일지 고민했다.
어차피 곧 토벌하러 가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 시기를 더 미뤘다간, 야만족이 외성 앞까지 내려와서 피해가 더 극심해질 것이다.
“설원에 다녀올 때가 되긴 했나 봐.”
“어우. 이 지긋지긋한 족속들은 우리 얼굴을 하루라도 안 보면 애가 탄답니까? 뭐 반가운 얼굴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내려온답니까?”
로렌디스가 머리를 헝클이며 중앙광장을 가로지르는데, 내성에서 사람이 나왔다. 사색이 된 그는 로렌디스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는 기이한 쪽으로 흘러갔다.
* * *
캐서린은 약간 몽롱해진 기분으로 눈을 비볐다. 의식이 흐릿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옷을 갈아입는데, 넨시가 캐서린의 환복을 도와주다가 팔뚝에 난 상처를 보며 놀랐다.
“마님, 다쳤습니까?”
“응. 데니스 교수 좀 불러 줄래? 교수께서 없으시면 제임스 박사라도 불러 줘.”
캐서린이 몽롱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부탁하자, 넨시가 하녀를 시켜서 사람을 보냈다. 곧이어 제임스가 툴툴대며 왔다. 뒤이어 데니스 교수까지 의료가방을 들고 같이 왔다. 데니스는 캐서린을 보며 짠한 눈빛을 빛냈다.
“이번에는 또 어디를 다쳐 온 겁니까?”
“내가 다친 건 오늘이 처음 같은데요. 데니스, 비약이 심하네요.”
데니스가 캐서린의 상처를 대신 보고 얕은 상처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얕게 그을린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건.”
데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얕은 상처였지만 주변의 흔적이 심상치 않다. 그 흔적을 눈여겨보던 데니스는 제임스와 눈을 맞췄다. 제임스는 골치 아프다며 욕지거리를 뱉더니 침실에서 나갔다.
“마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언가 일이 안 좋게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캐서린이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서 이들을 기다리는데, 한 번 더 두통이 저릿하게 울렸다.
“마님, 마님 정신 차리십시오. 마님 의식 놓으시면 안 됩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팔뚝에 뭔가를 두르는 느낌이 들었다. 데니스가 무슨 처치를 하자, 팔뚝이 화끈거렸다. 싸한 통증이 어깻죽지까지 퍼졌다. 눈을 뜨자 눈앞이 흐릿했다. 시선을 내리자 팔뚝이 붉게 물들었다.
“붕대 가져와!”
“지혈제 가져와, 지혈제!”
생살을 찢는 느낌이 들었다.
“독이 묻은 상처를 도려내는 겁니다. 혀 깨물지 않게 이빨 단단히 깨무십시오!”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 원래 이맘때쯤 생사를 넘나드는 시기긴 하지. 그런데 그게 여기서 이런 꼴로 죽는다는 건 아닐 건데 이상하다. 캐서린이 식은땀을 흘리자, 넨시가 마른 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괜찮은 겁니까?”
“머리가 몽롱한 것만 빼면 괜찮아.”
“의식 놓지 말고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싸한 한기가 몸을 스쳤다. 팔뚝에서부터 스멀스멀 목덜미까지 노리는 기분이 섬뜩했다. 캐서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임스가 피를 닦은 헝겊을 챙기더니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니콜 있느냐!”
“네! 스승님!”
“당장 가서 무슨 독인지 알아봐! 알아보고 살사초면 억제제, 아니, 일단 아니더라도 억제제부터 왕창 가지고 와! 먹는 거 말고 주사 억제제다. 피에 직접 주사해야 돼!”
니콜이 억제제를 가져오고, 제임스가 곧장 주사를 놨다. 데니스가 기함하며 헝겊을 떨어트렸다.
“아니, 이놈아 확인도 안 하고 그걸 놓으면!”
“뭘 확인합니까? 이미 방 안에 살사꽃 꽃향이 가득하잖습니까! 그거 일일이 확인하다가 처치가 늦어지면 스승님께서 책임지실 겁니까?”
옥신각신하는 것 같다. 무언가 고성이 오가고 캐서린의 의식이 끊겼다. 필름이 끊기듯 소리가 차단되고, 몸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