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손등에 열기가 고였다. 목욕을 끝내고 잠드는데 새벽쯤 몸이 가려웠다. 손등을 긁적이며 잠을 설치다가 깨자, 이른 아침이었다. 캐서린은 옆에서 엎드려 잠든 로렌디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탁
손목이 금방 붙잡혔다. 로렌디스는 눈을 느릿하게 떴다가 다시 감았다. 아직 졸린 기색을 온전히 몰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나 잘 때 건드리면 안 된다니까.”
로렌디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캐서린이 다시 누우려는데, 로렌디스가 다시 손목을 붙잡았다. 캐서린이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부었잖아. 왜 부었어?”
“부었어요?”
“응. 손등부터 손목까지 붉은데.”
“여기 어제도 그러더니.”
캐서린이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앉자, 로렌디스가 설렁줄을 당겼다. 넨시가 노크를 두 번 하고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피부에 바르는 약을 가져와.”
약을 바르자 열기는 금방 가라앉았다. 화한 감각이 손등을 감싸고 시원해졌다. 기침도 괜찮아졌고, 나른하니 가라앉던 몸도 괜찮아졌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는데, 로렌디스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캐서린은 그대로 멈춰서 그 모습을 눈에 담아냈다. 등 근육이 잘 짜인 조각처럼 제자리를 찾아갔다. 몸의 균형이 어깨에서부터 골반까지 떨어지면서 올곧게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는데 눈이 다시 마주쳤다.
“왜 훔쳐보고 있어?”
“당신 몸을 똑바로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잠깐 넋 노고 보고 있었네요.”
로렌디스가 묵직한 손길로 머리를 헝클여서, 한쪽 눈을 감으며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하녀 불러 줄 테니까 씻어.”
다 씻고 오전 늦게야 제임스의 진료를 받았다. 제임스는 무언가 이상한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건 또 뭐야, 하고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제임스는 혈액 한 방울을 샘플에 넣어서 확인하더니,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스승님 뭐가 이상하세요?”
니콜이 차를 내오고, 진료동의 직원들이 분주히 진료동 복도를 지나다녔다. 이들은 니콜을 보며 ‘저 독한 연놈들.’이라고 혀를 찼다.
“여전히 직원들과는 사이가 나쁜가 봐.”
“무능한 놈들 업어다 다시 가르치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쯧쯧쯧.”
졸지에 무능한 놈들이 된 직원들이 복도를 빠져나가고, 니콜이 진료실 문을 닫았다.
“아침에 피부 발진 났었지?”
“어, 그 이야기도 하려던 참이었어.”
“이거도 면역반응이야. 몸에서 독 기운을 지워 내려고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건데, 갑자기 왜 그랬지?”
발진이야 금방 가라앉았다. 그것도 피부가 약간 붉게 그을린 수준이었다. 손등을 만지작거리는데 제임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했다.
“고객님은 내 모든 예상과 연구 표본을 벗어나. 시한부라고 선고했더니 보란 듯이 낫고, 한동안 안정적이었잖아. 그런데 왜 또 면역반응일까? 내가 아니라면 진짜 아니거든. 어째서지? 뭐 못 먹을 거라도 먹었어?”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박사이자 연구자이다. 직업은 의료 쪽에 두었지만, 연구진의 피 또한 흘렀다.
연구 자료와 사례 표본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에 제임스도 혼란스러워졌다. 샘플을 보는 표정이 복잡미묘했다.
“나 어디 안 좋아?”
“아니. 똑같아. 그냥 잠깐 감기 앓는 수준이야. 그것도 반나절쯤. 아주 가볍게 지나가는 미열이지. 워낙 순식간에 끝나서 뭐를 느낄 겨를도 없었잖아.”
캐서린은 니콜이 챙겨 준 억제제를 먹고 숨을 골랐다. 제임스가 됐다며 손을 휘휘 젓는 걸 보니까 별일 아니구나 싶다. 캐서린이 소파에 목을 기대고 목을 젖히자, 소파 뒤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 * *
“저번에 각하께서 미리 말씀하신 부동산 서류입니다.”
로렌디스의 보좌진이 다녀갔다. 로렌디스가 공작가 소유의 부동산 몇 개를 캐서린에게 위임했다는 서류를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서류는 총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서류는 휴양지의 타운하우스였다. 이 부분은 이미 이야기됐기에 캐서린도 가볍게 읽었다. 문제는 그다음 서류였다.
“상가 건물이요?”
“중심 상가 건물 중에 각하의 명의로 된 건물이 몇 채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마님께 소유권 위임했습니다.”
수습 보좌관은 예정대로 서명을 끝내고 물러났다. 나중에 알게 된 내용이 타운하우스를 위임하면서, 개인 소유의 상가 건물도 같이 위임한 것이다. 건물 관리는 대리인이 맡아서 하는 중이라, 소유권만 위임됐다.
‘나중에 처분해서 개인 재산으로 해.’
수습 보좌관이 다녀가고 캐서린은 약간 이해하지 못할 혼란에 빠졌다. 탄생일 기념연회를 치른 뒤에야 현실감이 몰려왔다. 다녀간 사람들에게 보답으로 작은 선물과 엽서를 보내고, 그날을 기억했다.
“그냥 태어난 날일 뿐인데 그날을 기념한다는 게 이상했거든요.”
수습 보좌관이 다녀가고, 그냥 막연하게 로렌디스가 떠올라서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떠올랐다.
캐서린이 속삭이듯 하는 이야기에 로렌디스가 서류를 확인하다 말고 눈을 맞췄다. 로렌디스가 집무실 탁자에서 깃펜을 꺼내서 서류에 서명을 기입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야?”
“당신이 이것저것 챙겨 주니까요. 내 삶에 나를 이만큼 챙겨 주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는 막연한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여기서 내 사람을 만들고 내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새삼스럽게 다시 와닿았다. 캐서린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바깥을 내다보자, 로렌디스의 시선도 같이 따라갔다. 어제저녁 눈이 내리더니, 오늘도 하늘이 맑다.
“나갈래?”
“어디를요?”
“건물 위임받았으면 확인하러 가야지. 대리인 세워도 대리인이 수수료를 중간에서 갈취하는 경우가 있어서 감찰 겸 다녀오는 게 좋아.”
대리인이 수수료를 갈취한다면, 당신이 더 가지고 있는 게 맞지 않나요. 캐서린이 방황하는 사이에, 로렌디스가 넨시를 찾았다. 넨시가 로렌디스의 부름에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아내랑 외출할 거니까 적당한 옷으로 갈아 입혀 줘.”
넨시는 캐서린을 이끌고 가더니 가벼운 외출복을 입혔다. 외출복에 외투까지 입고 나오자, 로렌디스가 식사는 밖에서 하자며 따라 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선선했다. 마차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달그락대는 바퀴가 덜컹거리고 멈췄다. 캐서린은 엉덩이를 살살 문지르며 창밖을 내다봤다. 마차가 중앙광장에 섰다. 중앙광장 주변으로 상가가 모여 있어서, 여기서부터는 걸어 다니기로 했다.
“식사부터 할까?”
“뭐 먹을 거예요?”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뒀어?”
“음. 나는 잘 모르겠어요. 바깥에서 식사를 해 보기는 또 처음이라서요.”
“근처에 유명한 곳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식사는 상가 근처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로렌디스가 꼭대기 층을 통째로 빌려서, 둘이서만 느긋하게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접시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속속들이 담겨 나왔다. 색감도 좋았다. 그래서 호기심에 평소보다 음식을 더 맛봤다.
“음식 입에 잘 맞아?”
“향이 은은하네요. 허브 향이에요?”
“응. 거북해?”
“아니요. 은근히 잘 맞아서 놀랐어요.”
식사를 가볍게 끝내고 상가 건물을 찾았다. 대리인은 이미 소유주가 바뀐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건물 밖으로 마중 나왔다. 로렌디스는 장부를 확인하고, 캐서린에게도 그 방법을 알려 주었다.
“어려울 건 없으니까 원장부 확인하면서 감찰 정도만 해도 돼.”
나머지는 대리인을 앞세워 처리하면 된다며, 로렌디스가 가볍게 일축했다. 캐서린은 대리인에게 당신이 고생이 참 많네요, 라고 답하고 밖으로 나왔다.
“믿어도 될 사람이죠?”
“아마도. 제 목숨이 아까운 줄 알면, 돈 몇 푼 얻겠다고 목숨을 걸지는 않을 테지. 지금까지는 잘 했는데 설마 그런 미친 짓을 벌일까. 캐서린 너는 걱정이 과해.”
중앙광장이라고 마차가 분주하게 다녔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감싸고 인도 안쪽으로 이끌었다.
“각하.”
레너드가 로렌디스를 찾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침잠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바깥에 소란이 인 것 같습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어깨를 감싸고 침묵에 잠겼다. 무언가 상황이 나쁘게 흘러간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가서 확인하고 와.”
검은 눈동자가 주변을 샅샅이 눈에 담아내더니, 레너드를 불러 지시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 곁을 지켰다. 잠시 뒤, 로렌디스를 찾은 건 레너드가 아니라 휘하의 기사였다.
“적색경보입니다. 내부에 침입자 세 명. 레너드 경이 현재 진압 중입니다.”
로렌디스는 머리를 헝클이며 되물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상인으로 위장해서 들어왔답니다.”
로렌디스는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어서 수하에게 건네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그리고 뒤늦게 캐서린을 발견했다. 캐서린은 난처해하는 그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다녀와요.”
“괜찮겠어?”
“당신이 지키는 헬렌이에요. 별일이야 있겠어요?”
로렌디스는 수하 하나를 가리켜서 캐서린 옆에 붙여 두었다.
“아내를 마차로 데려가. 멈추지 말고 내성까지 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