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뎐트는 뒷짐을 지고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로렌디스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긴 은발이 허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검은 도포 대신에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뎐트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제복에 있는 휘장과 견장을 보니까, 일반적인 기사 가문의 자제 같았다.
“왔나?”
“왔지.”
로렌디스는 표정을 얕게 찌푸렸지만 금방 갈무리했다.
“헬렌의 손님이에요.”
캐서린이 웃으며 이야기하자 주변이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뎐트는 호오? 하며 미소 짓더니 껄껄대며 로렌디스에게 갔다.
“내가 흥을 깬 건지 모르겠어.”
“어떻게 왔지?”
“걸어서 왔지. 헬렌 거리는 언제 봐도 화려해. 거기서 길거리 음식을 먹었는데 저번에 먹던 맛이 안 나. 왜 그런 거지?”
로렌디스는 저 미친놈이라며 혀를 내젓고, 캐서린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손님이라고 포장해서 헬렌에 머무르던 건 사실이지만, 당당하게 걸어서 들어올 줄이야. 그를 알아본 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함구했다.
‘여기서 저놈의 신분을 말했다간 혀가 잘린다.’
뎐트는 로렌디스와 작게 대화를 나누더니 몸을 틀었다.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어 주었다. 고요한 걸음이 멎었고, 뎐트가 캐서린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왜 여��는지 묻고 싶나?”
“네?”
“걸어서 왔다니까. 말뜻 그대로 이해하면 돼.”
뎐트가 캐서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캐서린은 그 모습을 보며 숨을 골랐다. 흰 레이스로 감싼 손등에 서늘한 촉감이 닿았다. 긴 은발이 흘러내렸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손등을 스쳤다.
“눈이네요.”
누군가의 속삭임에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천장이 유리로 돼서 하늘을 올려다보기 수월했다. 흰 눈꽃이 뭉게뭉게 내렸다.
* * *
사람들이 흩어지고 캐서린은 홀로 남았다. 그쯤 다시 뎐트가 접근했다.
“뭐예요?”
“선물.”
“나한테요?”
이 사람이 선물을 챙겨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뜻밖이었다. 캐서린은 붉은 함을 손아귀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손바닥 하나에 다 들어올 만큼 작은 함이었는데, 붉은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꽃잎 하나하나를 세공한 게 정교했다.
“연회는 마음에 들어요?”
“술과 노래는 흥겹고 사람들은 바글바글한 게 지겹지.”
“그런데 왜 왔어요?”
“새로 생긴 친우에게 전해 줄 게 있어서. 그건 줬고, 그래서 나랑 같이 떠나기로 한 제안은 이번에도 거절인 거야?”
캐서린은 손바닥으로 귀를 가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듣는다면 오해하기 좋은 언사네요.”
“너와 간다면 나름 흥미로울 것 같은데.”
“흥미 좇으려다가 목숨 내놓을 수는 없어요.”
뎐트는 흥이 식었다며 뒷짐을 지고 멀어졌다. 그 모습을 눈에 담아내던 캐서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야만족이라고 만나 본 건 뎐트가 유일무이하지만, 다들 저런가…… 하는 막연한 걱정이 든다.
“셀레나 소펜 양.”
캐서린은 그녀에게서 익숙한 향을 맡았다. 내가 이 향을 어디서 맡았더라. 코끝을 배회하던 향은 점점 옅어졌다.
“부인, 오랜만에 다시 인사드리는…….”
캐서린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건 본능이다. 몸 안에 각인된 감각이 그녀를 경계한다.
“실례할게요,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서요.”
“어머, 손수건을 빌려 드릴…….”
“사양할게요.”
셀레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소펜 영애.”
가까이 오지 마라. 당신 지금 내게 안 좋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이니까. 내 옆에서 기웃대지 말고 당신 찾는 사람들 옆으로 가라. 셀레나는 은발 사내를 떠올리며 캐서린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다녀간 분은 누구신가요?”
“아아, 헬렌의 오랜 손님이에요.”
“처음 뵙는 분인데…… 헬렌 부인과도 친분이 두터운 듯하고요. 은발이라, 은발……. 어디서 온 분인가요?”
숨을 고르고 찬찬히 속을 다스렸다. 시선은 사선으로 입술은 여유롭게. 턱은 꼿꼿하게 들되 고개를 부드럽게 옆으로 기울였다.
“영애.”
이전에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 내 영역을 침범당하고 있음을. 너는 왜 스스로를 바닥에 놔두고 남을 네 머리 위에 올려두었니. 그럼 누가 너를 존중해 주겠니. 캐서린, 네 것들을 빼앗기지 마. 네 영역을 짓밟게 두지 마.
“나를 심문하시나요?”
“네, 네?”
“심문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혹시 오해였다면 미안하지만요.”
그래도, 이런 오해를 빚게 됐으니 당신도 조심해야 할 거랍니다.
“유학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새로운 문화에 녹아든 건 이해합니다만. 잊지 말아요. 내가 영애보다도 어른인데, 우리 서로 예의를 갖추는 게 어떨까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다. 캐서린은 속에서 무언가 뜨뜻미지근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였다.
“대화 중이야?”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
셀레나가 급하게 물러났다. 무언가를 들켰다는 느낌이었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뎐트는 호오? 하며 숨을 가다듬고,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빤히 내려다보며 뺨을 만지작거렸다. 엄지가 입술을 스쳤다. 붉은 생기가 감도는 입술에 온기가 닿았다.
“술 먹었어?”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요?”
“뺨이 상기된 것 같아서.”
캐서린이 그의 손가락을 끌어 내리며 눈을 가늘게 뜨자, 시선들이 하나둘 멀어졌다. 로렌디스는 아니면 됐다며 손을 내렸다.
“입술 닦였어.”
“진짜…….”
“하녀 불러 줄게.”
캐서린은 상황이 정돈된 걸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핀으로 고정한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로렌디스가 그 모습을 눈에 담아내며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손짓했다. 다녀와.
넨시가 기겁하며 다가오더니 캐서린을 챙겨 파우더룸으로 갔다. 파우더룸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데, 모리켄 부인이 왔다.
“세상에 각하께서도 참.”
“으음, 왜 웃으시는 거예요?”
“소펜 영애와 대화가 길어지니까 끊으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대화가 갑자기 끊기더라니 일부러 그랬나. 모리켄 부인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파우더룸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오던 길에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셀레나가 멈칫하며 ‘죄송합니다.’라고 속삭이더니 그녀의 가족들과 복도를 지나갔다.
‘셀레나?’
캐서린이 고개를 돌리자 셀레나는 유유히 멀어진 뒤였다.
무언가를 마신 거 같은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캐서린은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 * *
“셀레나 왜 그러니?”
소펜 공작은 사색이 된 딸아이의 뺨을 세심하게 살폈다. 심성이 여린 아이라서 품에 끌어안고 지낸 세월이 스무 해가 지났다. 조금 자라고서야 먼 타지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았다만. 오늘 딸아이는 낯선 구석이 많았다.
“아니에요. 아버지.”
“괜찮으냐?”
“이만 집으로 가요. 피곤해졌어요.”
소펜 공작은 딸아이를 눈에 담아내며 복잡미묘한 기분을 애써 지워 냈다.
* * *
기이한 기분이 사그라든 건 잠시 뒤였다. 빈객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을 반쯤 바깥에 빼 두어야 했다.
“마님.”
모리켄 부인이 캐서린을 불러 세웠다. 캐서린이 고개를 들자 부인이 캐서린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눈짓했다.
“손등이 조금 붉어지신 듯해서요.”
“그러게요. 손등이 조금 뜨겁네요.”
“혹시 무슨 알레르기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조금 가렵나? 알레르기는 없는데 이상하네요.”
다른 이들도 캐서린을 눈짓했다. 흰 레이스 장갑을 벗자 손등이 열기로 붉어졌다. 살짝 화끈거리는 것도 같고. 손등을 휙휙 뒤집어 보고 캐서린은 반대쪽 장갑도 마저 벗었다.
“열 때문인 거 같아요.”
“하긴 난방이 유독 따뜻하네요.”
“각하께서 이번 연회에 마음을 크게 썼군요. 부인께서 감기라도 걸릴까 유심히 신경 쓴 게 보이네요.”
캐서린은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아 세웠다.
“샴페인 한 잔 부탁해.”
하인은 눈을 부릅떴다.
“각하께서 보고 계시는데요. 마님?”
“뭐, 어때. 거리도 멀고, 저기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한 잔쯤은 마셔도 될 거리야.”
하인에게서 샴페인을 받아서 한 모금 마실 때쯤, 로렌디스도 캐서린을 발견했다. 쟤가 지금 뭘 마시는 거야? 캐서린 손에 들린 잔이 술잔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로렌디스가 빠르게 다가와서 술잔을 낚아챘다.
“좀.”
“네?”
“이건 안 먹으면 안 되나?”
캐서린은 고개를 나른하게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돼요?”
샴페인 향이 입안에 퍼졌다. 톡톡 쏘는 탄산이 입안을 깔끔하게 씻었다. 혀끝에서 술맛이 진하게 풍겼지만, 나중에는 은은하게 향이 잡혔다. 화하게 퍼지는 알싸함에 캐서린이 눈을 크게 뜨자, 로렌디스는 못 말린다며 머리를 헝클였다.
“연회는 이 정도 자리 지켰으면 됐으니까 가자.”
“마무리는…….”
“마무리는 하인들이 남아서 할 거야. 주인이 자리를 비켜야 이들도 편안하게 즐기다 갈 사람들도 가지.”
적당한 때에 기회를 봐서 빠져나왔다. 우리가 나가자 기회를 보던 사람들 몇몇이 연회장에서 나왔다. 달빛이 스며들고 하늘이 물안개 끼듯 뿌예졌다. 흰 눈송이가 흩날리고, 캐서린의 머리에 닿아서 녹았다.
“당신도 같이 나온 거예요?”
“지루해. 저기 있으면 여기저기서 기웃거리는데 썩 유쾌하지 않거든.”
“사람들이 당신을 잘 따르는 건데 대화 좀 해 주다고 오지 그랬어요.”
뎐트와 가깝게 지내는 게 이상하다고 여기던 참이었는데, 의외로 둘의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발길에 채이는 개미를 보듯, 세상 무던한 표정을 보니까 세삼 그의 위치가 실감 났다.
“콜록.”
캐서린이 작게 기침하자 로렌디스가 코밑을 대신 닦아 주었다. 캐서린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눈을 매섭게 떴지만, 로렌디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추워?”
“아니요. 코가 살짝 간지러워요.”
캐서린이 코끝을 만지작거리자 로렌디스가 툭 쳤다. 콧등이 저릿하게 울렸다. 눈을 질끈 감고 그를 노려보려는데, 간질거리던 숨이 터졌다.
“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