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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78)화 (78/129)

78.

음지의 골목길은 햇살조차 들지 않고 어둑했다. 깨진 벽돌이 바닥에 즐비하고, 길목은 울퉁불퉁했다.

‘포트런의 골목’

포트런으로 불리는 이곳은 제국 남쪽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었다. 꼬이고 꼬인 산길이 모여 마을을 이뤘고, 마을 자체도 외부에서 고립됐다.

고립된 곳은 안쪽으로만 물이 고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곳은 그들끼리의 문화가 생긴다. 그 문화는 보통 폭력적이고 거친 쪽이었다.

“맹독으로 추려서 담았소.”

사내는 수레에 독초와 가공한 독 원액을 담고 손바닥을 탈탈 틀었다. 혹시나 손에 묻을까, 장갑까지 꼼꼼하게 꼈다.

“남부 독이 독하다는 건 어디서 듣고 온 거요?”

“그건 알 것 없다. 수량 확인 다 끝났으면 수레나 넘겨.”

검게 치장한 외부인들이 수레를 챙겼다.

“수량이 많은데, 이런 맹독류는 오래 보관하지 못해. 보관해도 변질하기 쉬워.”

“곧 쓸 거야.”

“어디에…… 됐소. 내가 괜한 걸 묻는군.”

이곳을 찾는 이들이야 깨끗한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의 활용처 또한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쪽에 관심을 두다간 목숨이 달아나기 딱 좋다. 차라리 어딘가 활용할 곳이 있겠거니, 하고 잊어 두는 게 낫다.

“몇 가지 확인 좀 하지. 이 얼굴 아나?”

사내는 외부인이 보여 준 초상화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내 기억에는 없는 사람인데 누구지?”

“중년의 여인이다. 시골 자작가에서 살던 여인인데 지금은 실종됐지. 이 여인이 살사초라는 독초를 사 간 적 없나?”

외부인의 이름에서 익숙한 독초 이름이 나왔다.

“아, 그 사람인가? 그런데 여기서는 아니고, 제도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소. 빈민가에서 며칠 지냈는데, 그때 내게 살사초를 사 갔지.”

외부인은 로브를 벗고 얼굴을 보였다. 객은 신분패를 꺼내서 보여 줬다. 포트런을 방문한 객들은 보통 얼굴을 감추는데, 이번 객은 대놓고 본인을 드러냈다. 그게 오히려 위험했다.

황가의 패.

이런 객은 깊게 얽히면 목숨이 금방 달아나는 법이었다.

“황, 황실 사람이요?”

“잘 대답해라.”

“말, 말씀하십시오!”

“그게 어디지? 여인을 봤다는 곳 말이다.”

“남서부 시골이었는데 백작 영지 안이었습니다.”

“캐빈 백작가?”

“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입에서 구체적인 귀족가의 이름이 나왔다는 건, 번거로운 일에 휘말렸다는 뜻이다.

“그 독초 지금 있나?”

“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는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붉은 꽃잎이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어서 외부인에게 건네자, 외부인이 받아서 향을 맡았다. 이 근방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저 독의 위험을 잘 안다. 예전에 다녀간 미치광이 의사가 알려 준 덕이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독초가 맞나?”

“냄새에 속는 놈들이 많지만 독초가 맞습니다. 몸에 축적되면 죽는 독이라서. 서서히 몸을 죽인다는 면에서 더 악질적이죠.”

남자는 예전에 봤던 여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몇 가지 이야기를 더 꺼냈다. 외부인은 흔쾌히 검을 내렸다.

“중독됐는지 확인하는 법은?”

“보통은 피검사로도 확인하고, 살사초 꽃가루를 몸에 뿌려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중독됐으면 발진이 일어나거든요.”

그 뒤, 외부인들끼리 이상한 눈빛을 이어받았다. 떠날 준비를 끝낸 일행들이 물건 정리를 끝마쳤다.

“다 챙겼나? 다 챙겼으면 이만 가지.”

“나으리?”

“마무리 짓고 정리해라. 다녀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면 안 된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자, 시야가 천장으로 변했다. 칼이 스치고 간 자리에 비명이 소리 없이 묻혔다.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목을 칼날이 꿰뚫었다.

작은 통나무집이 불길에 타올랐다. 맹독성 독은 모두 챙겨서 담았고, 그 이후의 불은 우연히 내린 빗물에 사그라들었다.

* * *

캐서린은 작게 기침하며 목을 추슬렀다.

“감기입니까?”

넨시가 사색이 돼서 물었다. 지금 이 시점에 감기라니. 캐서린은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코끝이 간질간질한 게 가려워서 그랬다.

“각하께서 휴양지 타운하우스를 선물했다면서요? 보좌관이 그 일로 아주 바빠졌다던데 맞습니까?”

“응. 거절하면 더 준다길래.”

“한 번 거절하시지 그랬습니까?”

로렌디스는 캐서린에게 휴양지 건물을 넘겨주고, 만약 거절했다간 다른 건물도 추가로 붙여서 준다며 엄포를 놓았다. 캐서린은 거기서 한 번 거절해야 할지, 고맙다고 인사부터 해야 할지, 부지런히 고민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마님!”

그리고 건물 명의가 변경된 건 탄생일 당일이었다. 그 전까지 모든 절차를 끝내 두고, 로렌디스는 서류 하나를 건네며 캐서린에게 선물이라며 던져 주었다. 그게 제도의 상가 건물이라는 걸 알았을 때, 캐서린은 기함할 뻔했다.

‘이건 왜?’

‘어디든 가고 싶어 했잖아. 건물 명의 바꿨으니까 나중에 가고 싶을 때 가. 휴양지 전경이 좋기로 유명하거든.’

마음에 안 들면 매도해서 개인 재산으로 하라는데, 당신은 내가 못 팔 걸 아니까 해 본 말이겠지.

서류에 전경 사진 몇 장을 핀셋으로 집어서 주는데, 캐서린은 울컥했다. 떠나고 싶다고, 다 지겹다고 나를 놓아 달라고 할 때는 꾸역꾸역 잡아 두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캐서린이 비로소 바닥에서 나왔을 때, 그는 캐서린에게 휴양지 타운하우스 명의를 넘겨주었다.

“마님, 우십니까? 기쁜 날에 왜 우세요?”

“울면 얼굴 붓습니다. 마님,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얼, 얼음주머니가 어디 있더라. 얼음찜질부터 하겠습니다.”

별거 아닌 존재감을 다시 끌어오기까지,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고요히 숨죽이며 살던 아이는 서서히 잊히고, 기억에서 지워진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결국 지워지는 거고.

캐서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배시시 웃자 넨시가 얼음주머니로 눈가를 눌렀다. 혹시나 눈이 부어오를까, 넨시가 민감해진 눈두덩이를 얼음주머니로 식혔다.

“드레스 착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녀들이 붙어서 드레스를 입히고, 장신구를 신중히 골라서 몸에 걸쳤다. 얇게 세공한 귀걸이를 조심히 걸었다. 뺨 옆에서 흰 연꽃이 하늘하늘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오후부터 시작된 치장은 저녁 늦게서야 끝났다. 캐서린이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서 나가자, 복도 앞에 로렌디스가 서 있었다.

“음, 결혼식 때 입은 드레스를 제외하고는 오늘이 가장 화려한 것 같아요.”

“잘 어울려. 그날 너무 급하게 식을 치르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게 후회될 만큼.”

연회장 천장에 흰 레이스를 장식하고, 식탁보와 촛대도 화려하게 꾸몄다. 접시와 식기구도 모자랄 것 없었고, 캐서린에게 닿는 시선에도 호감이 가득했다. 처음 연회를 열 때만 하더라도 부담감이 컸는데, 또 막상 해 보니까…….

‘나쁘지는 않네.’

속으로 고요히 읊조리는데 어느새 연회장 중앙에 서 있었다. 캐서린이 주변을 둘러보자, 여러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았다.

캐서린이 걸음을 딛자 로렌디스가 옆에서 이끌었다. 우리가 걸음을 내딛자 길이 물길처럼 열렸다. 그러자 이제는 익숙해진 사람들이 편안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헬렌 부인, 순백의 드레스가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시나요?”

“마담 더켈리의 작품이라더니, 한 달간 모든 의뢰를 거절하던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그만 눈이 멀 뻔했어요.”

르루 부인과 블레윗 부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이런 좋은 날 무슨 선물을 드리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어렵게 선물을 골랐답니다. 부인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르루 부인이 곱게 포장한 선물함을 내밀었다. 함을 열자 화려하게 세공한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푸른색 브로치는 꼭 바다를 머금은 듯 영롱했고, 그 안에서 물길이 일듯 신비로웠다. 캐서린이 살짝 놀라서 브로치를 만지작거리자, 르루 부인이 캐서린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미신입니다만, 이 보석이 소유자에게 무운을 가져다준다더군요. 두 분께서 같이 하면 좋을 듯해서 선물로 마련해 봤답니다.”

“고마워요. 르루 부인, 연회 즐겁게 즐겨 주세요. 부인께서 즐겁게 즐긴다면, 그것 또한 제겐 기쁜 일이에요.”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선물을 받았다. 직접 준 사람도 있고 하인을 통해서 전달한 사람도 있었다. 모리켄 부인이 선물 받을 때 나눌 인사말과 가벼운 처세술을 알려 주어서 대응하기도 수월했다.

귀족들의 계보도 파악해 둬서 대화 나누기도 한결 좋아졌다. 몸에서도 여유가 묻어나자, 캐서린에게 대화를 거는 이들도 편안히 다가왔다. 캐서린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몇몇 부인들의 눈이 반짝였다.

“귀걸이가 꼭 유리 같네요.”

“음, 그런가요?”

“세상에 세공이 이렇게 정교할 수 있나요? 요즘 공방들은 세공이 다 인위적이어서, 마음에 드는 세공품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캐서린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로렌디스와 눈을 맞췄다.

“남편이 이번 연회 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선물해 줬어요.”

“세상에, 어디 공방에 맡겼는지 나중에 알려 주실 수 있겠어요?”

“그건 남편이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드레스에 맞춰서 개인적으로 마련한 것 같더라고요.”

워낙 많은 선물을 한꺼번에 받아서 어디에 맞췄는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아마도 그걸 물었으면, 똑같은 공방에 다른 세공품을 더 맡겼을 것이다. 로렌디스라면 그럴 사람이었다. 캐서린이 배시시 웃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잘 어울립니다.”

르루 부인이 홀린 듯 하는 이야기에, 주변 분위기가 나른하게 풀렸다.

웅성거리는 소란이 인 건 그 뒤였다. 뚜벅, 고요한 걸음이 울렸다. 그건 일부러 기척을 냈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연회장 한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캐서린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자 꼭 바람이 간질거리듯 장난치듯 몸을 감쌌다. 그리고 뎐트 칸이 걸어 들어왔다.

“뎐트?”

뎐트를 처음 보는 이들은 그의 분위기에 짓눌렸다. 고요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으며, 무던한 표정은 무심했지만 주변을 통제 아래에 뒀다.

“누구입니까?”

“손, 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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