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서재를 찾은 건 두 번째였다. 서재를 찾을 일도 잘 없었고, 가문의 금서가 있다는 이야기에 일부러 발길을 끊었다. 그러니까 반년하고도 더 됐다.
“책 좋아해?”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캐서린은 푸스스 웃으며 답했다. 실없이 터지는 웃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런 모범적이고 근면 성실한 사람은 아니다.
“글자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너는 좋아할 줄 알았지. 혼자서 가만히 있거나 조용한 곳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니까. 독서도 좋아하지 않을까 했어.”
서재 문을 열자 거대한 서재의 규모가 눈앞에 펼쳐졌다. 책장에서 익숙한 목재 향이 짙게 풍겼다. 처음 왔을 때도 나무 향이 풍겼는데 이건 그대로구나. 양장본을 옆구리에 끼고 발을 딛자 서재 문이 쿵― 닫혔다.
“금서 쪽은 어때?”
“금서라면 금지된 책 아니에요?”
“금서를 수집하는 건 가문의 권력을 보여 주는 측도가 되기도 하거든. 보고 싶으면 저쪽 책꽂이로 가면 돼.”
캐서린은 울컥할 뻔했다.
“나는 위험한 이야기에 관심 없어요, 로렌디스.”
“딱히 위험한 이야기가 아닌데, 위험하게 들렸어?”
캐서린이 귀를 막아 버리며 눈을 흘기자 로렌디스가 그녀의 눈을 손끝으로 휙, 쓸었다.
“서재 한 번 찾는 데 큰 용기를 낸 사람 같아서, 금서를 들추려고 그러나 했더니 아니었어? 그럼 용기 낼 것도 없잖아.”
“제도에서는 서재를 안주인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그게 의외로 큰 의미를 가지는가 봐요.”
제도에서 서재란 가주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서재를 허락한다는 건 가주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도의 이야기였다. 로렌디스는 별 시답지 않은 일까지 허락을 받는다며 타박했다.
“제도 놈들은 쓸모없는 곳에 힘을 쏟지. 그딴 권한 내세워서 권리를 세울 거면, 없어도 될 권한이야.”
“화났어요?”
“화난 거 아니야.”
화난 표정인데. 캐서린이 되묻자 그가 으르렁대며 답했다.
“화낸 거 아니래도 그런다. 나는 생겨 먹은 게 이런 거야.”
뒷말에 힘이 실렸지만 모른 척했다. 로렌디스가 책장 앞에 서더니 잊을 뻔했다며 물어왔다.
“보고 싶은 거 있어?”
“설화 모음집을 몇 권 더 찾아보고 싶어요.”
“금서 중에 꺼내 줄까?”
거절하려던 캐서린은 ‘그냥 적당히’라고 답하며 로렌디스에게 결정을 맡겼다. 로렌디스가 책장을 살피더니 적절한 책을 몇 권 꺼냈다. 로렌디스는 맞은편 탁자에 책을 꺼내 두고, 캐서린이 따로 챙겨 둔 책을 턱짓했다.
“그건?”
“이건 뎐트에게 받은 거예요. 칸에서 가져온 책 같더라고요.”
로렌디스는 잠깐 의아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려니 넘겼다.
“그가 책을 가져왔었나? 하긴 나름 고상한 성정이라서, 의외로 책이나 글을 가까이하는 편이지.”
“그 사람이요?”
고상한 성정이라기엔 말투나 몸짓이 괴리감이 있는데. 캐서린이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렌디스가 픽 웃었다.
“학식에 조예가 깊거든. 다른 이들도 비슷한가 물었더니, 그는 자기가 예외적이라 이야기했었지.”
그도 그럴 게, 뎐트는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조용한 편이었다. 거칠게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 사이에 엉켜 지낼 그릇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그런데 가까이하지 말랬더니 왜 계속 가까이해?”
“계속 얽혀요. 저도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예감은 드는데요, 섣불리 거리를 두기도 어렵더라고요.”
캐서린은 설화를 몇 권 꺼내서 비교했다. 애초에 설화란 이야기를 묶은 거고, 허상을 글자로 옮겨 둔 이야기책이었다.
“뭐가 궁금한 거야?”
“그냥요. 설원에서 시작된 설화라니까 궁금하더라고요. 이야기가 조금씩 다 다르기도 하고요. 직접 읽어 보고 싶었어요.”
“길어서 며칠은 족히 읽어야 할 거야. 서재 문 열어 둘 테니까 시간 날 때마다 와서 봐도 좋아.”
그리고 다음 날, 그는 그 결정을 후회했다.
* * *
“없어?”
로렌디스는 침의 차림으로 침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 시간 때면 아내가 늘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빈 침실이 그를 반겼다. 그는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하인을 불렀다.
“아내는?”
“아직 서재에 계십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서재에 있다는 거야?”
로렌디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해하자 하인이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하인은 억울했지만 죄송하다며 납작 엎드리는 게 최선이었다.
“언제 온댔지?”
“늦는다고 먼저 주무시라는 말씀 있으셨습니다.”
“왜?”
“아니면 사람을 보낼까요?”
차라리 하인을 보내는 게 더 빠를 거다. 하인이 곧장 서재로 뛰어가려고 들자 로렌디스는 팔을 들어서 제지했다.
“그냥 놔둬.”
* * *
“여기서 잠든 거야?”
“으음…….”
늦게까지 서재를 지키던 캐서린은 거기서 잠들었다. 새벽까지 탁자에 엎드려서 자는데, 서재 문이 열렸다.
캐서린도 그 기척에 잠에서 깼다. 눈을 깜빡거리는데, 로렌디스가 문간에 기대서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밤을 지낸 거야? 여기서?”
로렌디스가 기가 차다며 되물었다.
“너는 왜 중간이 없어?”
“내가, 요?”
“적당히 쉬엄쉬엄해도 좋잖아. 삶에 미련이라곤 없는 듯 굴더니, 지금은 또 왜 서재에서만 지내는 거야?”
사람이 적당히 중간이랄 게 있어야지. 오늘 하루만 살기로 작정한 거야 뭐야. 그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적당히 침묵하는 쪽으로 택했다. 캐서린이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는 모습에, 뭐라고 더 꾸짖지도 못했다.
“그래. 네가 좋다면 됐지.”
해가 막 뜨고 있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가 보다. 날이 새도록 여기서 잤다고? 캐서린은 책을 덮어 두고 그의 시선을 살며시 피했다.
“나름 재미있더라고요. 먼저 자라고 이야기해 뒀는데, 혹시 늦게까지 기다렸어요?”
로렌디스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도 처음에는 기다렸다. 아내가 처음으로 가진 취미인 듯 보여서 적당히 어울려 주는 게 맞지 싶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보니까, 시간은 어느덧 새벽녘을 지나고 있었다.
“잠은 침실에서 자야 할 것 아니야.”
“당신은 아침훈련에 갈 시간 아니에요? 왜 여기 있어요?”
로렌디스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브레디를 찾았다. 브레디는 가주의 최측근 보좌관이라서 서재 출입이 가능했다.
“내 아내가 나더러 지금 왜 여기 있느냐고 따져 묻는데, 브레디 네 생각에는 어때?”
“마, 마님께서 기운을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브레디는 본인도 확신하지 못해서 말끝을 올리며 되물었다. 이게 맞습니까?
로렌디스는 됐다며 팔을 휘저으며 일축했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처박혀 홀로 앓는 것보다야 지금 이 모습이 낫다.
“식사는?”
“입맛이…….”
“이 을씨년스러운 곳에서 잤으니 입맛이 없을 수밖에 없지. 불을 켜 두든가, 그것도 아니면 스탠드 불이라도 좀 밝게 해 두든가. 표정이 왜 그래? 아니야! 화내는 거 아니야.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무슨 말을 못 해.”
로렌디스는 아니라며 말끝을 흐리며, 식사 자리를 지시했다. 캐서린은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야 다시 서재를 찾았다. 그 이야기에 로렌디스가 기함한 건 얼마 뒤의 일이었다.
* * *
“요즘 마님께서 눈 뜨자마자 어딜 나가시던데, 어디 가는 겁니까?”
하인들이 속닥대며 귓속말을 나눴다. 그중 사정을 아는 하인 하나가 답했다.
“요즘 서재에만 지낸다고 하더라고요.”
“마님께서 저렇게 적극적인 모습은 처음이시네요.”
하인들은 내심 기쁘면서도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마님께서 기운을 차린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하루의 절반을 서재에서 보내는 건…….
“중간이 없으시군.”
캐서린은 이들의 귓속말을 엿듣고 뺨을 만지작거렸다.
캐서린은 거의 우울감에 젖어 있었고, 거기서 스스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간 사람들과 거리를 뒀고, 지금껏 거리감을 유지했다.
이번처럼 삶에 큰 흥미를 느낀 적이 있었나? 무기력한 몸에서 기운이 생길 리 없지.
‘처음이었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진다는 게 처음이었다.
가족을 끊어 내고 인연을 끊어 낼 때만 움직이던 몸이었는데, 삶에 기운이 돈다는 게 아직은 낯설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후원에서 산책을 한다는 게, 캐서린에게는 아직까지도 심오한 일이었다.
“마님?”
“응, 응?”
“오늘도 서재에 가시는 거예요?”
넨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요즘 서재에서만 하루 종일 지냈더니, 침실을 나서면 꼭 저 말을 물어왔다.
“아직 다 못 읽어서. 오늘 읽으면 다 읽을 것 같아.”
“마님께서 무언가에 끈기를 보인다는 게 정말 기쁩니다. 뺨에도 생기가 돌아서 보기 좋거든요.”
넨시는 정말 기쁘다며 두 손을 맞잡고 이야기했다.
“마님께서 직접 나서서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게 처음이었잖아요.”
캐서린은 넨시의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그 말이 맞다. 캐서린이 스스로 직접 하고 싶다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던 건,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해야 해서였지. 그리고 제 무덤을 준비하던 몸과 마음이 건강할 리 없다.
“그래도요. 쉬엄쉬엄하세요. 아무래도 서재는 환기나 채광에 취약하잖아요?”
“책 냄새가 좋아서.”
“그래도요. 바깥 공기도 좀 쐬고요. 산책을 하신다지만 하루의 절반을 서재에서 보내는 건, 저로서도 걱정이 되네요.”
캐서린은 서재로 가려던 발길을 돌렸다. 요즘 로렌디스를 닮아 가는지, 그녀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기 시작한다.
“아니면 주인님께 다녀오는 건 어떠세요?”
캐서린은 그만 푸스스 웃어 버렸다.
“로렌디스가 시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