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74)화 (74/129)

74.

“마님, 이 책은 어떻게 할까요?”

“웬 책이야?”

넨시가 캐서린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익숙한 표지였다.

“설화 모음집이네요. 마님께서 읽은 거예요?”

거의 새 책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표지가 빳빳한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가죽에 자수로 ‘설화 모음집’이라고 글자를 새겨 놓았다.

“나는 아니고, 손님이 두고 간 듯하구나.”

“최근에 다녀간 손님이면 뎐트 님인가요? 그래서 표지가 이국적이었군요. 가죽에 놓은 자수가 제국에서 볼 법한 자수는 아니거든요.”

뎐트 칸이 읽던 책이다.

‘고대 설화 이야기였지?’

검은색 가죽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표지에 흰색 실로 자수를 놓았는데, 언뜻 보기엔 사람 같았다.

“거기에도 책이란 게 있었군요.”

“넨시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네. 칸, 그 땅도 사람이 사는 곳이야.”

캐서린은 찻잔을 내려 두고 은은한 차향을 음미했다. 넨시가 처분 곤란한 책을 보며 고민하기에, 캐서린은 은은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 한번 읽어 볼게. 나한테 줘.”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에 놔둘게요. 따로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캐서린은 후원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홍차만 새로 한 잔 더 부탁해.”

“비스킷도 더 챙겨 드릴게요. 접시가 비었네요.”

뎐트가 놓고 간 책은 다시 캐서린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캐서린은 표지만 톡톡 두들기며 묘한 기시감을 지워 냈다.

“설화라…….”

북부는 눈으로 뒤덮인 설원 위에 자리했다. 설원의 눈은 녹지 않으며, 그 자체로도 신비로운 전설을 만들어 냈다. 설화 속 설인도 마찬가지다. 설화는 누가 전하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한다.

넨시가 책을 흘끔 눈여겨보더니 웃으며 이야기했다.

“설인 이야기인가요? 신기하죠? 여러 전설이 나오는데, 그 전설이 극과 극입니다. 우는 아이를 산 채로 씹어 먹는 짐승이라고도 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탐내는 악귀라고도 하고, 또…… 길 잃은 사람들의 길잡이로도 불리기도 하고요.”

캐서린은 설화의 표지만 슬쩍 들춰 보고 다시 덮었다. 서재에 도로 가져다 놓아야지. 캐서린이 막 책을 덮어서 따로 챙기는데, 익숙한 인기척이 났다.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로렌디스가 하인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저는 다과를 다시 내올게요.”

넨시는 트레이를 끌고 나갔다.

막상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찾아와 두고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괜히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한테 할 말 있어요?”

“뭐 하고 있나 보러 왔어. 왜 밖에 있어?”

“날씨가 좋더라고요. 산책해도 좋다는 주치의 허락받고 나왔어요.”

로렌디스는 그럼에도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바람도 차가운데 왜 밖에 있냐로 시작해서, 옷은 왜 또 얇게 입었냐며 꾸짖었다.

“으으. 잔소리 진짜. 그만해요.”

“너무 듣기 싫어하는 것 아니야?”

로렌디스는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곧 있으면 당신 생일이잖아.”

“그랬어요?”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떡해?”

“아아, 저도 잊고 지내서요. 다음 달이네요.”

곰곰이 되짚어 보니까 탄생일이 점점 더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로렌디스가 찾아온 이유도 그제야 이해됐다.

“혹시 탄생일 때문이에요?”

“연회 준비해야 하니까.”

“그냥, 우리 같이 잊어버리면 안 돼요?”

“당신이 재밌는 이야기를 다 하네. 나를 웃기려던 거면 충분했어.”

이럴 줄 알았지. 내가 딱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고. 로렌디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캐서린은 큼큼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예전에는 따로 챙겨 주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그간의 시간을 모두 더해서 크게 치르는구나. 로렌디스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더니 캐서린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충분해. 너무 걱정 말고.”

“위로하는 거예요?”

“위로해 달라는 표정이었거든. 생일을 맞이하는 분께서 너무 낙담하니까, 아랫것들도 기뻐하지 못하잖아.”

캐서린은 귓불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며, 그가 만졌던 쪽을 따라서 온기를 덧그렸다.

“식사는 했나?”

“점심 식사는 이미 했어요.”

“그럼 저녁 식사를 같이하면 되지. 같이 할 시간 되지?”

바쁘기로는 캐서린보다 로렌디스가 더 바빴다.

“당신이 바쁘지 않다면 좋아요.”

“그럼 하인에게 이야기해 둘게.”

캐서린은 푸스스 웃었다. 미안해하는 것 같다. 왜 미안해하지? 지나간 것도 아니다. 설령 지나갔어도 그런 일로 그를 타박할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로렌디스가 마음을 써 준다는 게, 캐서린에게는 더 낯간지럽고 생소한 일이었다.

“바깥에서 늦게까지 있지 마.”

“당신은 나를 침실에 두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 같아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랬을 사람이다.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놔두고 봐주지만, 조금이라도 여유가 없어진다면 꺾어 누르고도 남았다.

“나는 네가 눈앞에 있어도 신경 쓰여.”

무던한 표정으로 꺼내는 이야기라기엔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 짙었다.

“앞으로도 신경 쓸 거야. 그게 불편하다면 지금부터라도 적응해.”

* * *

“만찬장이 마련됐습니다.”

만찬장에서 식사를 할 때부터, 그는 캐서린에게 이것저것 먹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둘이서만 먹는데 음식이 많네요.”

“내 취미를 매도하지 마. 너를 살찌우는 취미를 새로 만들어 보려니까.”

음식은 입에 잘 맞았다. 요리는 담백했고, 금색 접시도 화려하게 장식해서 미적으로도 풍요로웠다. 고기 요리도 살이 야들야들해서 부드럽게 음미할 수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로렌디스가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물었다.

“받고 싶은 건 없어?”

“어떤 거요?”

“생일선물 말이야. 땅이나 부동산도 괜찮고 상단이나 이런 쪽도 괜찮아. 내 소유 재산 중에서 일부 떼어 주는 건 어렵지도 않고.”

지금까지는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였다는 듯, 로렌디스는 본격적으로 캐서린에게 재산을 떼어 줄 작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소유한 땅이나 부동산을 직접 넘겨준다는 건, 그만큼 캐서린에게 힘을 실어 준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처분해서 개인 자금으로 써도 돼.”

“아아, 저기 있잖아요. 우리 침착해져요.”

“그래. 내가 생각을 잘못했지. 네게 맡길 게 아니라 내가 알아서 떼어 내서 줘야 했는데. 간이 작아서 욕심도 부릴 줄 몰라.”

로렌디스가 알아서 재산 하나를 통째로 떼어 주기로 결론이 났다. 캐서린은 입 한 번 제대로 끔뻑거리지 못했다.

그는 캐서린을 아주 잘 알았다. 선택권을 줘도 써먹지 못할 게 뻔히 보인다며, 일단은 필요한 쪽으로 하나 떼어 주기로 했다. 일단 하나 통째로 떼어 주고 난 뒤에, 더 필요하면 더 떼어 주면 되지, 그게 그의 입장이었다.

“당신 나한테 계속 퍼 주려고만 하는데, 나 진짜 배앓이 한다니까요? 식사도 연회 앞두고는 몸 관리해야 하는데…….”

“살쪘다고 혓바닥을 놀리는 놈들이 있으면 그들의 혀를 자르면 될 일이야.”

식사가 끝날 무렵 다과가 나왔다. 우리는 과일 타르트를 먹으며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캐서린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로렌디스와 눈을 맞췄다.

“저 저녁에 서재에 다녀와 보려는데, 괜찮아요?”

“서재는 갑자기 왜?”

“설화에 관심이 생겨서요. 서재에서 관련 책을 더 찾을 수 있을까요?”

캐서린은 따로 챙겨 왔던 양장본을 꺼냈다. 로렌디스가 의외라며 눈을 깜빡였다.

“이런 설화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어.”

“뎐트 칸이 놔두고 갔어요.”

“칸에서는 설화에 가지는 애착이 크지. 관심 있으면 서재에 가서 더 찾아봐도 돼. 이것도 어차피 이야기책이라서 소설에 더 가깝거든.”

그 뒤로도 로렌디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칸’은 헬렌처럼 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설원 위에서 사는 만큼 전설이나 설화에 관심이 컸다. 야만족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제 뿌리를 고대에서부터 존재해 온 설원에서 찾았다.

“갑자기 여기에는 왜 관심 가지는지 물어봐도 돼?”

다른 목적은 없다. 이유 또한 없고. 그저 우연히 책을 얻으면서 호기심을 품은 게 다였다.

“저도 이제 헬렌에서 지낼 거니까요. 관심이 갔어요. 당신은 헬렌에서 태어났으니까 잘 알겠네요?”

“어린 애들 겁줄 때 쓰는 이야기라서.”

“당신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게 놀라워요.”

캐서린이 처음 본 로렌디스는 헬렌의 주인이자 월계수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니까. 그 기운이 유난히 거칠고 예리했다. 검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로렌디스는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유순한 편은 아니었다.

“어린아이 같아. 이게 동심이라는 건가?”

“누가요?”

“당신.”

캐서린은 그의 품에서 책을 뺏어서 품에 안았다.

“예전에는 곧 떠날 생각이었어요.”

곧 떠날 사람이 괜히 이곳저곳 발을 딛다간 어디서든 발목 잡히기 쉬우니까요. 캐서린이 덧붙이는 이야기에 로렌디스가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네. 지금은 그럴 마음 없어요. 당신이 내가 떠나길 두고 볼 리도 없고요. 근본적으로는요, 여기가 좋아졌어요.”

캐서린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저기, 충분한 답이 됐나요?”

“충분해.”

“그럼 서재에 다녀와도 돼요?”

로렌디스가 포크를 다시 들며 답했다.

“그런 건 내게 허락받을 일이 아니래도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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