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대리석 묘비에 ‘찰프 모리켄’이라는 이름이 크게 박혀 있었다. 생전 모리켄 경의 유언인지, ‘용맹하게 싸우다 떠납니다.’라며 글귀도 적혀 있었다. 캐서린이 묘비를 손으로 슥슥 쓸자, 모리켄 부인께서 고요히 읊조렸다.
“남편이 기뻐하겠습니다. 마님께서 잊지 않고 또 찾아주시다니요.”
“그럴까요? 아저씨라면 뭘 또 왔느냐고 타박하지 않을까요?”
모리켄 부인이 싱그럽게 대꾸했다.
“제 남편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죠.”
묘비 앞에는 하얀 국화꽃이 한 송이 놓여 있었다. 모리켄 부인이 가져다 둔 꽃이었다. 부인께서는 따뜻한 남쪽에 다녀오신다더니, 예상외로 일찍 헬렌을 찾았다.
“말씀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갑자기 혼절하셨다 들었습니다. 세상에, 괜찮은 겁니까? 저도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 이야기가 모리켄 부인의 귀에까지 들어갔구나. 가급적 숨기고 싶었건만, 역시 성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막는데도 한계가 있지 싶다.
“그래도 금방 깨어났어요.”
“금방 깨어나더라도요. 혼절이라니요. 자작께서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캐서린은 대리석 묘비를 손으로 쓸어서 닦아 냈다.
“잘 견뎌 낼게요.”
이제 마음 다잡을게요. 약해지지도 않아요. 꿋꿋이 서서 다 견뎌 낼게요. 다들 그걸 바랄 거니까요. 나도 그래요.
묘지를 다녀오고 바깥에서 썼던 장갑을 벗었다. 머리를 올려 묶었던 머리끈도 풀고 고개를 가만히 들었다.
저는 살아남을게요. 아버지 몫까지 해서 살아남아서 비로소 웃어 볼게요.
* * *
“폐하, 폐하 계십니까! 시녀장입니다!”
세이렌은 꺾은 꽃을 화분에 넣으며 웃었다. 가시를 다듬은 장미꽃을 만지작거리자, 흰 레이스 장갑에 붉은 꽃물이 들었다. 황후의 화원은 출입객이 극히 제한된 영역이었다. 고요하기 짝이 없던 곳에 시녀장의 발걸음이 울렸다.
“숨 좀 고르렴. 왜 그리 호들갑이야?”
“그놈들이 접촉해 왔습니다.”
세이렌의 손이 멈칫했다. 선뜻 반갑게 맞이하지 못할 소식이었다. 어리석은 야만인들이 어디 제도의 땅을 밟는단 말이냐.
“직접 왔다니?”
“아, 아닙니다. 심부름꾼을 보내서 서찰을 보냈습니다.”
“내게 먼저 접촉하지 말라 이야기 안 해 줬었나?”
“급했는가 봅니다.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서신 가져와.”
세이렌의 흰 드레스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시녀 하나가 편지를 가져오더니, 시녀장에게 내밀었다. 시녀장이 편지를 받아서 은접시에 올려 세이렌에게 전했다. 세이렌은 장갑을 벗고 편지지를 뜯었다.
“독과 무기를 더 지원해 줘라. 살상력 높은 독으로 은밀히 전해야 해. 남부에서 나는 독초가 독하다던데, 압축해서 가공하면 되겠지.”
“꼬리가 길면 잡힙니다, 폐하.”
“북부에서는 이미 알 거야. 그런데 증거도 없이, 황실의 두 번째 주인인 나를 핍박이라도 할까?”
이들은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지. 그 세력만 무너트리면 될 일이다. 북부가 건재하는 한, 둘째 황자에게 기회가 돌아올 리 없으니. 차라리 북부가 무너지길 기다리는 게 낫지. 그 이후는 칸에서 북부를 해치우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다.
“그리고 찾았니?”
“가족과의 사이가 나빴던 모양입니다. 유일한 가족·친지가 계모와 언니입니다. 그들도 수도원에서 마지막 추적이 끊겼답니다. 그 너머로는 접촉하기가 힘듭니다. 폐하께서 직접 권력을 행사한다면 될지라도…….”
“내 신분이 노출될 필요는 없지. 흐으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그 가족 간에 무언가 있는 모양인데 조사해 봐.”
그 외에도 북부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혼절을 했다더라.”
“누가 말입니까?”
“헬렌 부인 말이다.”
헬렌 공작가의 안주인, 캐서린 헬렌. 아주 잠깐 봤지만 인상이 흐릿해서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
“북부는 험난한 곳입니다.”
험난한 곳이지. 남서부 시골에서 살던 여인이 살기에는 척박하기도 할 거고. 세이렌은 잘 안다. 적응하지 못한 생명체는 도태된다.
“약해.”
그리고 헬렌 부인은 약하다. 헬렌은 강인하지만 헬렌 부인은 약하다. 그게 이들의 약점이다.
사람이 쓰러져서 혼절해 버릴 수 있지. 그런데 태생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면, 가볍게 끝날 일이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지병이 있나?”
“북부에 지병 있는 여인을 들인다고요?”
“혹시 모르지. 애초에 급하게 치른 혼인이었어.”
세이렌은 고요히 읊조렸다.
“무언가 있다. 북부에서 지내기엔 유독 약해 보이긴 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닐 거야.”
여인은 꽃을 닮았다. 모가지를 꺾어 버리면 당장이라도 시들어 버릴 것 같은 꽃이랄까.
헬렌 부인이 야행 중에 쓰러진 소식이 세이렌에게 들려온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북부의 혹독한 환경에 잠깐 적응하는 일이라기엔 석연치 않다. 더군다나, 잘만 하면 이대로 치워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세이렌은 싱그럽게 웃으며 꽃꽂이 꽃을 다듬었다.
“그럼 독초와 무기를 밀매하면서, 가족들 뒷조사도 시도하겠습니다.”
“너도 서두를 것 없어. 우리에게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서두르다간 일을 또 그르칠지도 모를 일이니 천천히 하자.”
급할 것 없다. 시간이 없다고 급하게 서두르다간, 일이 더 어그러질지도 모른다.
깨트려 무너트리는 건, 가지지 못할 때다.
길들여 품어도 된다면 품는 게 낫지. 뭐가 됐든 본래 목적만 이루면 된다. 두 가지 길을 모두 열어 두고 차츰차츰 갉아먹듯 파고들면 된다.
고요히 읊조리던 세이렌은 편지지를 촛불에 가져다 태웠다. 검게 그을리는 종이에 불길이 일었고, 검은 글씨가 타올랐다.
“헬렌 부인이 변수가 된다면 변수가 되겠지.”
* * *
내성 집무실 문이 빠르게 열렸다. 성큼성큼 걸어온 브레디는 집무실 탁자에 보고서를 올려두고 뒷짐을 지고 섰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수습 보좌관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눈사태입니다.”
“각하, 국경선에 닿아 있는 기사단의 주둔지가 눈사태로 무너졌습니다! 그 빌어먹을 야만족 놈들이 그 틈을 노려서 주둔지를 파고들었습니다!”
설원에서 눈사태야 흔한 일이다. 쓸려 내려오는 눈사태는 바다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폭풍우와 비슷했다. 대신, 폭풍우를 기상정보관에서 예측하듯, 눈사태도 예측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헬렌가의 주인에게만 한정된 능력이었지만 말이다.
로렌디스는 그 보고에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시기에 눈사태라고?”
“이맘때쯤 꼭 한 번씩은 쏟아져 내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하필이면 주둔지 옆이라서, 병사들의 동요가 심해졌습니다.”
주둔지야 다시 재건축하면 될 일이지만, 그 틈에 야만족까지 내려와서 한바탕 전투를 치러야 했다.
“사상자는?”
“우리 쪽 사상자는 다섯 명입니다.”
“적은?”
“전원 해치웠습니다.”
보고서에 피해 현황이 다 적혀 있었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할 일은?”
“당장은 없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일대를 휩쓸어 줄 필요는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주둔지만 재건축하면 됩니다.”
“신경 쓸 일이 여기저기서 터지는군.”
“통과의례처럼 늘 있는 일이잖습니까? 수하들을 믿으십시오. 어차피 곧, 장기적으로 토벌을 해야 합니다.”
직접 전장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브레디는 주둔지는 상황을 간략하게 읊었다.
야만족이 주둔지까지 내려온 것도 로렌디스의 부재가 길어져서였다. 장시간 자리를 비웠으니, 이들이 주둔지까지 내려왔겠지. 그러면, 차라리 정식적인 토벌 일정을 짜서 움직이는 게 낫다.
“그리고 주둔지의 기사들도 교대해야 합니다. 잊고 계신 듯해서 말씀드립니다.”
주둔지의 기사들은 시기 별로 교대하며, 조별로 움직인다. 그 체류 시간이 길어지면 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기 때문에 내린 조치였다.
“다른 특이사항은?”
“이게 어어,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걸지도 모르지만요.”
브레디는 왜 그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안 나온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해했다. 로렌디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뭘 잊었나? 잊은 건 없는데 왜 저런 찜찜한 표정이지. 로렌디스가 눈짓으로 재촉하자 브레디가 달력을 손짓하며 이야기했다.
“한 달 뒤면 마님…… 탄생일입니다.”
로렌디스는 달력을 건네받아서 날짜를 확인했다.
“벌써 그렇게 됐네.”
“탄생일 기념연회를 열어야지 않겠습니까? 저희부터가 전장만 떠돌다 보니까 이런 쪽으로 소홀했잖습니까? 이거, 잘못 넘겼다간 마님의 입지에 영향이 옵니다.”
전장만 떠돌던 기사들이 뭘 알겠나. 혼인도 서둘렀고 결혼식 다음 날 전장에 오른 이들이다. 안주인이 오래도록 비어 있던 헬렌에 새 안주인이 왔으니, 기념연회 또한 거창하게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캐서린의 반응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념연회요? 어째서요? 어째서?’
권력에서 초탈한 아내께서는 기진맥진해서 탄생일 따위 없던 일로 하자며 이야기할 확률이 높았다.
* * *
그 시각 캐서린은 후원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햇살이 났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더니 바람도 선선하니 좋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오늘은 나른한 게 좋아.”
“마님, 낮잠을 자면 밤에 잠을 설칩니다. 피곤할지라도 밤에 더 주무십시오.”
캐서린이 벤치에 기대서 눈을 지그시 감자, 넨시가 자리를 비켰다.
모리켄 부인은 자택에서 며칠 머물기로 택했다. 캐서린은 어제저녁 모리켄 부인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됐습니다, 마님.’
‘이들은 처음부터 이랬어요.’
푸스스 웃으며 하는 이야기에 깊은 안도가 묻어났다.
꾸벅꾸벅 졸길 얼마간, 캐서린이 막 선잠에서 깨어나는데 넨시가 모호한 표정으로 캐서린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