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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72)화 (72/129)

72.

그러게요. 당신이 족쇄를 걸었네요.

붕 떴던 삶을 다시 땅 위에 묶어 둔 게 당신이네요.

“몸은 어차피 곧 회복돼요. 아마 반년도 안 돼서 해결될 거예요.”

“데니스는 1년 정도 이야기하던데?”

“완전히 안정을 되찾기까지는 그렇겠죠. 그래도 반년 뒤면 솔직히 살사초 몇 개 더 먹는다더라도 죽지는 않아요.”

진료동에서 지나가듯 이야기를 나눴었다.

‘향이 좋아서 별미로 마님께서는 꽃차로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안심해도 좋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성이 있더라도, 살사초에 이 이상으로 노출됐다간 위험해진다. 그래도 어려운 고비는 넘겼으니 괜찮겠지. 목을 조여 오던 죽음의 기운도 가셨다.

왜 살아 있는지, 처음에는 궁금했는데 이제는 아무렴 상관없다.

무기력하던 삶을 끄집어내서 다시 일으켜 준 당신이 있기에, 이제는 내려놓을 수 없다.

캐서린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떨궜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앞에 앉았다.

“왜 그래?”

“쓸모없어졌으니 버림받을 거라고 믿었어요. 당신이 나를 잊더라도, 당연하다고 여겼거든요.”

스스로 믿고 스스로를 배척했다. 캐서린 밀던을 가장 미워하던 게 캐서린 밀던 본인이었으니까.

그저 너무 미운 마음에 스스로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런데 말이죠. 티끌만 한 미련이 남았었나 봐요.

“그런 말 하지 마.”

“사라지고 싶었어요. 땅으로 꺼지는 게 속이 편할 것 같다고 몇 번이고 빌었어요.”

“캐서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다시 부른다. 그냥 이름이다. 누구나 한 번은 불러 볼 법한 이름인데, 이게 뭐라고 묵직하게 가슴에 내리꽂힌다.

이름 이외의 의미는 없는데, 읊조리는 목소리가 좋다. 나지막하게 들리는 ‘캐서린’ 그 음절이 좋았다. 그래서 홀렸다. 그래, 이건 홀린 거지. 캐서린은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배시시 웃었다.

“살아 숨 쉬는 순간순간이 무기력했어요.”

괜찮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은 적이 많았다.

내가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여야 했다고. 내가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께서 여기에 있어야 했다고. 혼자 살아서 죄송하다고.

“약간 죄책감 같은 것도 있었어요.”

“무슨 죄책감?”

“아버지가 설원에서 실종됐을 때요. 헬렌에서 무장한 기사가 와서 아버지께서 전사하셨다고 하셨거든요. 시신은 거두지 못했으며, 찾지 못할 듯싶다고요.”

있잖아요, 나는 알았어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실종될 거라는 거요.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까지요.

“그때 내가 마지막까지 잡았다면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가진 않았겠지, 하는 상상도 했거든요.”

캐서린은 이야기하다 말고 멈칫했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로렌디스라고 그런 시절이 없던 게 아니잖아. 더 오래 헤맸지, 작위를 급하게 승계받는다고 슬퍼할 시간도 가지지 못했겠지.

“그냥, 그냥 그랬다는 거예요.”

“이야기하고 속 편해졌으면 됐어. 어떤 심정인지는 잘 아니까. 답답해질 수 있지, 나도 잊지 못했으니까.”

캐서린은 목덜미를 더듬거리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고마워요.”

당신이 있었기에 다시 섰다. 바닥에 처박혀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목덜미를 움켜쥐고 앞을 보라며 소리쳤다.

“왜 웃어?”

“그냥,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요.”

“남 걱정시켜 두고 본인은 속 편히 웃는다고? 취향이 좋지 못해.”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인 줄 다 안다. 그래서 캐서린은 웃어 버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왜 울었더라. 왜 울었지.

로렌디스의 표정이 약간이지만 멍해졌다. 마치 제대로 본 게 맞나, 하고 확인하는 것 같았다.

“울렁거려요.”

속이 약간 울렁거린다. 멀미하듯 두근거리는데 눈가가 점점 흐릿해졌다.

바닥에서부터 아등바등 기어 올라왔다. 팔꿈치로 바닥을 기면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버텼다. 잘 버텼어. 캐서린. 너는 잘 버틴 거야.

* * *

“울어 버렸네요.”

“원래도 너는 잘 울었잖아.”

“내가 언제요?”

“혼자 속으로 잘 울었어.”

목 놓고 울어 버린 게 얼마 만이더라.

속이 울렁거리면서도 개운했다. 몸이 느른하게 풀어졌다. 긴장이 풀어진 몸이 침대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다리를 곧게 뻗어서 앉은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읊조렸다.

“어리석었어요.”

“너는 늘 어리석었지.”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라며 얕은 웃음이 터졌다. 이제는 그러지 마.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뭐라고 그게 위안이 됐다.

나도 이제는 알아요. 내가 어리석다는 것 알아요. 그래서 당신이 지금까지 기다려 준 게 솔직히 아직까지도 이해되지 않아요.

차라리 놓았다면 더 편했을 것을.

미련하게 붙잡아 둔 게 당신이었네요.

캐서린은 깔깔대며 웃지는 못해도,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황후께서는 요즘도 자주 부딪치세요?”

“직접 부딪칠 일이야 없지. 설원 너머의 야만족과 결탁한 듯 보여서 그게 거슬리는 거야.”

차라리 다 뒤집어엎자며 덤벼들면 들이박아 버리겠지만, 그저 옆에서 깔짝대며 찌르는 수준이었다.

“어리석네요. 헬렌이 아니면, 제도는 야만족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잖아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왜 했겠나?”

“황후가 황자를 황좌에 앉히려 든다더니, 욕심에 눈이 멀어서 이성이 흐려졌나 봐요.”

처음부터 총명한 여인은 아니었다. 선대 황후가 산욕열로 사망한 게 아니었다면, 현 황후는 지금 자리에 앉지 못했을 여인이었다.

선대 황후가 떠난 건 황후로 책봉된 지 1년 후였다. 그쯤 아이를 낳았고 그쯤 사망했다. 황후의 빈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황제도 다음 혼인을 서둘렀다.

‘그리고 태어난 게 둘째 황자.’

현 황후의 친아들이자, 황실의 외척들이 차기 황제로 추대하는 핏줄이었다.

만약 현 황제 테슬러가 이지가 흐려져 황태자를 내치려고 마음먹었다면, 황태자는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외척 세력은 둘째 황자를 계승권자로 만들기 위해서 물밑 작업을 오래전부터 시작했다.

“황태자께서 잘 견디네요.”

“황제와 내가 그를 지지하니까.”

“당신이 지지한다는 게 의미가 큰가요?”

“북부의 세력이 그를 지지하는 거니까. 무력으로 그를 끌어내리지 못하지. 내가 마지막까지 버티는 한은 말이야.”

북부와 황권이 올곧게 서 있는 한, 황태자의 권위도 안정적이었다.

제국의 황태자는 북부에서 직접 정세를 보고, 직접 나서서 몸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지금은 황태자로 책봉되며 제국의 대소사를 직접 다루고 있다.

제도의 세금 감면 정책이나 주요한 외교 정책 등이 황태자에게 넘어갔다. 북부와 황실이 권위를 잃지 않는다면, 황태자도 그 권위를 지킬 것이다.

“그럼 당신은 누가 지켜요?”

“나를 누가 지키냐니?”

“혹시나 황후께서 당신을 위협하면요. 그때는 어떡해요?”

“내가 위협받을 일은 없어. 위협하더라도 그건 너에게만 위협적이겠지. 너는 여전히 약하잖아. 독 때문에 몸이 무덤에 묻힐 뻔했으니.”

로렌디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표정을 구겼다.

“제도 권세가의 귀족들은 독을 향신료처럼 쓴다던데, 너는 왜 약하지?”

“당신도 향신료처럼 써요?”

“나는 애초에 향신료를 즐기지 않아. 독은 처음부터 통하지도 않았고. 독이 통할 몸이었으면 이미 골백번도 더 죽었어.”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칼끝에 독을 묻혀서 덤벼드는 놈들도 있었고, 전대 공작이 전쟁 중에 실종되면서 작위를 일찍 물려받았다. 당연히 경계하는 사람이 생기며 독살 같은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로렌디스는 추억거리라도 떠올리듯 심드렁했다. 기억 속에 파묻혀서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른다며, 눈살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게 다였다.

“헬렌의 기사들도 보통 독에는 내성이 강해. 칼에 찔리고 베이는 건 일상인 이들이니까. 어떨 때는 칼자국이 저릿저릿한 게 괜찮다며 실없는 소리를 할 때도 많지.”

“용맹하네요.”

“겁이 없달까.”

용맹하기보다는 겁이 없어서 무턱대고 달려드는 거지. 그런 걸 보면, 가만히 앉아서 쉬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는 놈들이었다.

“나도 이제 살사초를 꽃차로 즐길 수 있어요.”

“그 미친 짓 하기만 해 봐.”

실없이 꺼낸 이야기에 로렌디스는 여전히 화가 난 어조로 답했다. 이 이야기를 꺼낼 때면 그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워진다.

“미친 짓이랄 것까지야.”

“하지 마.”

으르렁대는 목소리는 날것 그대로였다. 짐승을 닮아서 목구멍에서부터 목소리가 울렸다. 탁한 기운이 퍼졌다. 짙은 눈동자가 짐승처럼 캐서린을 깨물었다.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 목덜미가 저릿했다. 캐서린은 목덜미를 더듬거렸다. 이빨에 살갗이 깨물린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만.’

그 감각이 선명히 발목을 붙잡았다.

“제임스가 해 준 이야기였는데…….”

“겁먹지 말라고 한 이야기였지. 무모한 짓 하라고 해 준 이야기가 아니잖아.”

눈 매섭게 뜨지 마세요. 당신 그런 눈짓으로 노려보면 무섭단 말이에요. 캐서린이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시선을 피하자, 그의 입에서 나른한 숨이 터졌다.

“있잖아요.”

“응.”

“모리켄 경, 그러니까 찰스 아저씨의 묘에 다녀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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