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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71)화 (71/129)

71.

기우일까?

‘이번에도’라고 이야기한 건 ‘저번’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런데 캐서린에게는 그런 게 없다.

캐서린은 기껏해야 미래를 약간 엿본 게 다였다. 너무 허무맹랑하다. 책 속에서 미래를 엿봤다는 것도, 과거가 있었다는 것도, 모두 억측이었다.

‘달리 증명할 길이 없잖아?’

눈앞에 책을 꺼내 놓고 이게 네 삶이다, 라고 말해 주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서 왔다며 미래의 삶을 훤히 꿴 것도 아니다.

진짜 그랬어도 싫다. 짜증 나잖아. 온갖 고생 다 하다가 독살로 죽었더니, 다시 살려 놨어. 그것도 내 의지가 아니야.

“마님. 고민이 깊어 보이세요.”

데니스 교수가 캐서린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시답지 않은 가정을 해 봤거든요.”

“무슨 가정이요?”

“제게 다른 삶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요?”

허황한 가정이라는 건 안다. 그래서 이야기하면서도 캐서린은 가볍게 웃었다. 다른 삶이 있었어. 그런데 그 삶 또한 조각조각 박살 나서 단명했다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기우예요.”

찻잔을 내려놨다.

오늘따라 해가 긴 것 같다.

* * *

캐서린은 다시 침실로 왔다.

‘그간 나는 어떤 삶을 살았더라.’

다 놓고 싶었다. 그래서 다 놓았고 스스로 포기했다.

캐서린의 지난 삶은 포기의 연속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만큼 스스로 미련이고 뭐고 다 버렸으니까.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 캐서린은 체념했다.

내가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화도 났다. 그런데 그 뒤에는 모두 수용했다.

‘어쩌겠어. 내 삶이 이렇다는데.’

계모와 의붓언니는 짜증 났지만 거기까지다. 귀찮은 인간들이 요즘 더 성가시다는 정도로만 여겼지.

로렌디스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캐서린도 가까워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생기를 잃은 삶이었으니까.

더 이상은 힘들어. 이제는 안 돼. 캐서린은 스스로를 놓았지만, 로렌디스는 그 속에 이질적인 바람을 불어 넣었다. 이것 또한 로렌디스가 한 일이었다.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

미련을 가져서 희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더 삶을 고달프게 할 거니까.

그 결과, 여기저기 치이지는 않더라도 가까이에 사람을 두는 법을 잊었다.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게 어떤 거였더라.

“무슨 생각 중이야?”

캐서린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해가 벌써 저물었다. 뻐근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자, 로렌디스의 손이 뺨에 닿았다.

“넋이 나가 있어.”

“잠깐 뭐 좀 고민하고 있었어요.”

“무슨 고민?”

예상과 다른 삶이고, 죽을 거로 예정된 몸이었다.

‘죽게 될 시기는 1년 하고 조금 더 뒤지만.’

그래도 위험한 시기는 넘겼다고 봐도 좋다. 지금껏 죽음이란 캐서린에게 아주 가까운 영역이었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았고, 그래서 더더욱 삶에 무기력했다.

“내가 살아 있어도 될까. 하는 그런 원초적인 고민이요.”

“너, 또…….”

“혹시 잔소리하려면 말아요. 당신이 물어서 답한 거지, 나도 무의미한 고민이라는 건 알거든요.”

모든 불행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건 그랬다. 어차피 안 될 거니까 포기하자. 그런 마음이 더 컸으니까.

“캐서린.”

캐서린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너는 꼭 혼자 생각에 잠겨 있으면 몹쓸 마음을 먹는 것 같아. 그만둬. 지금 그 표정만 봐도 괜한 마음을 품은 게 보여.”

“당신은 눈치가 너무 빨라요.”

“눈치가 느려도 그런 눈을 본다면 알 수밖에 없지.”

이마를 손끝으로 툭-밀쳤다. 그 반동에 머리가 작게 흔들렸다. 캐서린이 이마를 짚고 그를 흘겼다.

이제 그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지는 않는다. 그 태도에 의구심을 가지며 의심하기엔 같이 보낸 시간이 만만치 않다.

“하나만 물어도 돼요?”

로렌디스가 회중시계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해.”

“그때 왜 그런 표정을 지었어요?”

왜 그런 다급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냐고. 쓰러지던 그 순간에 왜 그렇게 사람을 절박하게 붙잡았냐고.

누군가 나를 그런 눈빛으로 봐 준 적이 있었나? 아버지께서 실종되고 가족의 애정은 기대도 못 했다.

캐서린을 봐 주던 건 로렌디스가 유일했다. 그 시선이 캐서린에게 닿을 때, 유일무이한 우군이 생겼다.

쓰러지던 마지막 순간에,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급하게 일그러지던 표정까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째서? 너는 이미 알잖아.”

“처음이었거든요. 그런 표정. 그래서 약간 의외였어요.”

그간 나에게 그럴 표정을 지어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혼자 걷는 게 아니다. 외딴길 옆에 길동무가 있다. 그 하나로 그전과는 달라진다. 이제 캐서린과 같이 걷는 사람도 그전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그걸 체감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네가 내 사람이잖아.”

“네?”

“너는 곧 완쾌할 사람이었어. 그런 네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어. 내가 그 자리에서 데니스 교수와 제임스의 목을 베지 않은 게 마지막 인내심이었어. 그들을 죽였다간 진료동 전체가 술렁거리니까.”

캐서린은 눈을 끔뻑거렸다.

“당신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왜 모르는 척이야? 이미 데니스든 제임스든 앓는 소리 잔뜩 해 뒀을 것 아니야.”

그저 앓는 소리라고만 여겼지. 당신이 진심으로 누구 한 사람의 목을 베어 버릴 고민을 했을 거라곤 짐작도 못 했으니까.

“조금 놀랍네요.”

“너는 너를 너무 과소평가해. 그리고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 들지 마. 감정에 이유가 합당하면 그게 감정이야?”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입술을 몇 번이고 여닫길 반복했다.

“계산적으로 따지지 마. 너는 그쪽과 어울리지 않아.”

“으음. 이해했어요.”

사람을 너무 복잡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대로 놓고 보면 될 걸 한 번 더 꼬아서 고민하는 괜한 수고는 그만두어라. 작은 머리로 고민하면 그 머릿속은 더 복잡해질 뿐이야.

캐서린은 그의 경고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네게 미리 이야기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로렌디스는 내키지 않지만 일단은 이야기한다며 운을 뗐다. 괜찮다고 이야기하라며 고개를 끄덕여도,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말해도 돼요.”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린 사람 같았다. 누군가의 허락을 구할 위치가 아닌데, 이만큼 시간을 끈다면 결코 꺼내기 쉬운 주제가 아니란 뜻이다.

“황후가 냄새를 맡았어.”

“무슨 냄새요?”

“당신 몸이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거. 물론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지만, 그 전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건 당신도 알 거야.”

로렌디스는 후회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대외활동을 미뤘다면, 천천히 회복됐을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회복되고 있고, 1년이면 다 된다고 진료동에서도 이야기했다.

“당신 결정은 옳았어요.”

하지만 캐서린은 로렌디스에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당신의 결정은 옳았다. 그때 당신이 나를 밖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떠날 마음을 버리지 못했을 거니까.

‘그 결정 덕분에 내가 당신을 선택했으니까요.’

캐서린을 눌러 앉힌 게 로렌디스다.

이번 생은 스스로 놓았다. 포기가 아니라 그냥 놓았다. 그녀의 손을 떠났다고, 요양지나 알아보며 적당히 쉴 생각이었다.

로렌디스는 생사를 찬탈한 게 아니다. 남은 생을 모조리 긁어 가서 네 몫 아니고 내 몫이니까 챙겨 두라고 협박했다.

“당신은 다 알았죠?”

당신은 아니길 바랐겠지만 스스로 다른 가정을 버리지는 못했을 거야. 요양지로 가서 쉬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걸 알았잖아요?”

“…….”

“당신이 고려하지 못했을 리 없어요. 주치의의 회복됐다는 소견에도 왜 살려 냈냐고 따지던 저예요.”

“그랬지.”

“그런 제 반응을 미리 예감이라도 한 듯, 당신도 확실해지기 전까지 숨겼잖아요.”

로렌디스는 제대로 읽었다. 그가 입을 다문 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수를 계산해서였다. 배려심이 아니다.

‘진짜 죽길 바란 것처럼 보였을 거니까.’

로렌디스와의 첫 만남에서였다. 그가 캐서린에게 해 준 이야기가 있다.

‘너는 곧 죽을 사람 같거든.’

자작저를 떠나서 헬렌으로 가던 길이었다. 자작저 문을 뜯어내며 들이닥쳐서 납치하듯 데려왔지. 그는 첫 만남부터 읽어냈다. 아주 예리하면서도 예민한 직감이다.

그걸 처음부터 알아차릴 사람이었다면, 솔직히 반년까지 갈 것도 아니었다. 로렌디스도 전쟁만 아니었다면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조사를 해 봤을 거다.

“그래. 그때 너는 묘지를 찾는 것 같았거든. 아늑하게 잠들 곳 말이야.”

“으음.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에둘러서 이야기하면, 너는 또 그 작은 머리로 온갖 고민을 하며 해석하겠지. 별다른 뜻도 없는데 말이지. 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그래.”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이마를 툭-밀쳤다.

“이마 밀치지 마세요.”

“이제 투덜댈 줄도 알아?”

캐서린은 기가 차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당신은 말장난이 늘었네요. 그런 대답을 했다간 그가 함박웃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당신 웃으면 기분 이상해져요.

“웃지 마요.”

“뭐?”

“입꼬리 내리라고요.”

캐서린이 작게 투덜거리자 로렌디스가 머리를 대충 헝클였다.

“맞아요. 당신이 옳았어요.”

나는 아마 당신이 생각했던 그대로 움직였을 거예요. 캐서린이 확인시켜 주듯 읊조리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옳았다는데도 기분은 별로야.”

“이제는 그런 짓 안 해요. 마음 놓으세요.”

“그런 짓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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