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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70)화 (70/129)

70.

뎐트가 캐서린을 찾은 건 다음날 늦은 오후였다. 이른 오전부터 찾을 줄 알았는데, 그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캐서린을 찾았다.

“헬렌의 노을이 아름다운 건 북부에서 유명한 이야기지.”

캐서린은 숄을 덮은 어깨를 더듬거리며 답했다.

“노을 보자고 이 시간에 뵙자고 한 거예요?”

“충분히 몸이 회복되길 기다렸지. 지금이면 미열이 완전히 가셨을 건데, 아닌가?”

뎐트의 말대로였다. 몸이 회복된 건 점심 식사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미열이 모두 가셨다. 사뿐히 내딛는 걸음도 가벼웠고, 미지근한 온기가 몸을 감싸자 얕은 탄식이 터졌다.

뎐트는 다 알고서 찾아온 사람 같았다. 외간 손님을 침실로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침실 옆에 딸린 응접실로 그를 불렀다.

“헬렌 부인은 사랑을 많이 받네.”

“주변에 걱정을 많이 시키는 건 맞아요.”

“확실히 그렇지. 내가 어디 네 약점이라도 팔아 치울까, 나를 지금껏 집에도 못 가게 잡아 둔 것만 봐도 그래.”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아 있길 택한 건 당신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게 독대 요청을 넣었다고 들었는데요?”

“접견 요청을 넣은 건 맞지. 그런데 엄밀히 전후 사정을 따지자면, 헬렌에서 나를 억류한 게 먼저야.”

“그래서 그 기회에 내게 독대를 요청했겠죠.”

제대로 이해했네. 뎐트가 짧게 일축했다. 예정대로라면 데보라나 넨시가 곁을 지키는 게 맞지만, 뎐트는 쓸모없는 귀를 붙여 두지 말라며 밖으로 내보냈다.

“내가 지금부터 재미없는 이야기를 할 건데 이야기 끊지 마.”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하품만 나오지만, 네게 이야기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 해 줄게. 조곤조곤 읊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몸이 독에 중독됐던 건 알 거고.”

“뎐트?”

“그 몸이 독에 중독됐다는 걸 알면, 원래는 죽었어야 할 몸이라는 거도 너는 알 거야.”

뎐트는 곧은 손가락을 뻗어서 캐서린의 가슴을 가리켰다.

“예정대로라면 혈관에 피가 서서히 뭉치고 굳어 가다가, 심장으로 가는 혈관이 막혀서 죽었을 거야. 머리로는 피가 통하지 않으며, 다리와 몸의 감각 또한 사라졌겠지.”

“…….”

“그래. 예정대로라면 네게 닥쳐야 했을 미래야.”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캐서린의 목숨을 위험하던 일이었다. 뎐트는 뻗었던 손가락을 접었다. 캐서린은 그 손짓을 시선으로 따라가며 되물었다.

“내가 죽었어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죽을 몸이었지.”

뎐트는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떨떠름하게 입술을 축였다.

“억지로 붙잡아 둔 의지가 가여워.”

뎐트는 무던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 목숨 줄은 일찍이 단명할 운명인데 너는 그걸 억지로 이어붙였구나.

“그놈이 많이 울겠군.”

“누가요……?”

“글쎄, 누구려나? 잘 들어 둬, 캐서린 헬렌. 가시밭길에 꽃잎을 깔아 둬도 꽃은 지기 마련이고, 발밑의 가시는 또다시 치이기 마련이야. 바닥에 처박혀 울기도 할 거고, 차라리 사라지길 바랄 때도 있겠지. 그래도 잘 버텨 봐.”

바닥에 처박혀 땅속에 파묻히는 짓은 한 번이면 되니까. 뎐트가 나지막하게 뭐라고 덧붙인 것 같지만 제대로 듣지 못했다. 뎐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지루하게 잠겼던 눈에 빛이 감돌았다.

“나중에 네가 울면서 빌면, 네 부탁을 하나쯤은 들어주지.”

나는 너를 바닥에 처박을 수도 있고, 다시 끄집어내 줄 수도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니까. 히죽, 웃는 미소가 음습했다.

“있잖아요.”

그 미래를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 묻는 건 무의미하다. 캐서린이 비극적인 미래를 책으로 엿봤듯, 뎐트에게도 무언가 있다.

‘더, 더 효율적인 물음.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접근해야 해.’

숨을 고르던 캐서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뎐트 칸. 이미 알려 주었는데 잊었나? 안쓰러운 아이야. 네가 나를 다시 찾아올 날을 기다릴게.”

예전에도 그는 캐서린에게 울면서 그를 찾게 될 거라고 그랬다. 그날을 고대하는 사람처럼 흡족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부디 살아남길 바라.”

캐서린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뎐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화를 끝맺었다.

* * *

시간이 몇 주 더 흘렀다. 로렌디스는 집무실 탁자에 발을 걸치고 앉아서 나른하게 고개를 젖혔다. 바쁘게 시간을 보냈더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각하, 브레디입니다.”

브레디가 집무실 문을 두들기며 기척을 냈다. 로렌디스는 발을 내리고 비스듬히 누웠던 자세를 바로 했다.

“들어와.”

“뎐트 칸이 곧 떠난다는군요.”

“드디어 가는군.”

로렌디스가 일단 헬렌에 머무르라고 했지만, 뎐트가 오래 머무르는 게 헬렌으로서도 유쾌할 리 없다.

“그놈은 왜 계속 우리와 엮이는 거야?”

“뎐트 님은 원래 좀……. 독특하잖습니까?”

무던한 제 주군께서 이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마님과의 일에서는 유독 날카로워지는 일이 잦더니, 이번에도 비슷하지 싶었다.

“황후의 움직임은 여전합니다. 둘째 황자를 주변으로 세력을 모으는 중이지만 아직은 잠잠합니다. 소펜가에서도 뚜렷한 움직임은 없고요.”

“둘째 황자가 황위를 잇지 못한다면 황실 따위 알 바 아니지만, 그래도 아들이랍시고 온전히 길을 닦아 주려는 모양이지.”

황실 안위 따위는 관심 없지만, 이후의 황위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까. 황후도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겠지.

브레디가 더 조사해 보겠다며 수첩을 품속에 넣으며 갈무리했다.

“다음 출타는…… 언제로 예상하십니까?”

“곧 가 봐야지. 그리고, 밖에 있는 것 아니까 들어와.”

로렌디스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브레디가 몰랐다며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뎐트의 옷을 살폈다.

“무기 없을 거니까 놔둬.”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라도 나눠야지 싶어서.”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쁜지 좋은지 솔직히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제 주군의 속도 가늠하기 힘들지만, 뎐트 칸도 만만치 않았다.

검은 속내는 이무기처럼 짙고 어둑했다. 뎐트가 그걸 속으로 갈무리했을 뿐이지, 결단코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또 싸우나?”

“나도 썩 유쾌하진 않아. 내 수하들을 전장으로 내모는데 유쾌할 리 없잖아. 그대가 직접 수족들을 이끌 마음은 여전히 없나?”

뎐트는 침묵했다. 지렁이들 거둬서 거름으로 쓸 것도 아니고 거둬서 어디에 쓰라고. 뎐트는 제 수족들을 혐오하면 혐오했지, 거둬서 키울 만큼 포용력이 좋지 않다.

“뎐트 칸, 나는 그대가 누구든 괜찮아. 지배자의 둘째든 아니든 말이야.”

“…….”

“차남이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건 유명한 이야기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게 차남 행세를 한 다른 누군가여도 돼.”

직접 나서서 야만족을 이끌어라. 그래서 이들을 통제하라. 지배자의 혈족이라면 제 수족들을 포용할 줄도 알아야지. 뎐트는 먼 허공을 내다보더니, 선심 쓰듯 답했다.

“우리 지렁이들이 다 죽겠다 싶으면 고민해 보지.”

“다 죽일 거야.”

“헬렌 공작은 너무 거칠어.”

“네놈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야.”

길 가다가 시비 한 번 붙었다고 행인의 손목을 자를 뻔한 놈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닌데. 물론 그 부분을 지적할 만큼 로렌디스와 뎐트가 가까운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뎐트는 홀로 떠났다. 헬렌을 벗어난 뎐트는 설원에 우두커니 서서 헬렌 성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까마득한 후손들과 어울리기엔 나도 많이 늙었어.”

야만족이라 불리지만 그전부터 설원에 살았으며, 설원의 주인으로 군림하며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 온 ‘존재’.

모든 설화의 시작.

제국이 있기도 전부터 존재했으며, 북부에 설원이 생겼을 때부터 이곳을 지켜온 존재가 그이다.

누군가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온다면 직접 나서 줄 수는 있어도, 그 전까지는 조용히 있을 것이다.

세상은 지겹고 따분했다.

* * *

“몸이 회복된 게 맞습니다.”

데니스가 진료를 끝내고 답했다.

“몸에 남아 있는 독 기운을 토해 내며 각혈을 한 듯하지만, 이 또한 회복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캐서린은 멍하니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치료되는 과정에서 피를 쏟았다는 게 맞지. 다시 확인해도 현실감이 영 없었다.

“안색이 안 좋습니다.”

“좋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요. 데니스가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몸은 회복됐다더니, 그럼 이제 가볍게 움직이는 건 괜찮나요?”

데니스의 허락이 떨어지며 거동의 제약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캐서린은 몇 주 만에 드디어 정원을 밟았다.

지금부터 찬찬히 되짚자. 캐서린은 넨시에게 부탁해서 펜과 종이를 얻었다. 데보라가 캐서린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 주고 물러났다.

몸은 치료되고 있다.

시한부 삶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캐서린이 미래를 엿본 건 책을 통해서다.

캐서린은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여기는 책 속이며, 책은 캐서린에게 비극적인 운명을 점지했다.

계모와 의붓언니의 핍박을 받다가 헬렌 공작가로 납치되듯 끌려와 결혼하고, 끝내는 시한부로 죽는 삶.

지금 와서 보면, 결말이 완전히 바뀌었다. 냉혈한이던 남편이 변한 부분에서부터 변화가 차츰차츰 시작됐다.

“좋은 게 좋은 거지만.”

뎐트와 나눴던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다.

‘이번에는 부디 살아남길 바라.’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건 착각이려나? 기분 탓 같아서 그냥 가만히 넘겼다.

그런데 저 말은, 내가 이미 한 번 죽기라도 한 사람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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