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66)화 (66/129)

66.

로렌디스에게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 전대 헬렌 공작이 실종되고 처음 오른 전장이었으니까. 전장귀라고 불리며 명성을 얻기 전이었고, 주변에는 경계할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다고 여길 때…….

‘땅 밑을 파고드는 건 본능인가?’

뎐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왜 죄다 땅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사람을 번거롭게 만드냐며 끌끌댔다. 그때 뎐트는 어린아이 같은 외모였지만, 말투는 조숙했다. 은발 머리가 길게 흘러내리고, 발치에 쓸렸다. 로렌디스는 그 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꺼져.’

뎐트는 로렌디스를 보며 물었다.

‘살려 줄까?’

‘…….’

‘빌어 봐. 그 손가락 하나를 내게 주면 살려 줄게.’

미친놈.

그게 첫인상이었다. 야만족의 핏줄은 죄다 미친놈이라지만, 이놈은 그 궤도가 달랐다. 조금의 미련도 조금의 사감도 없다.

‘네가 날뛰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적당히 날뛰거라. 그러다가 네 숨통이 먼저 끊길 테니까.’

이 어린 것아. 나는 여기서 네 또래의 애들이 죽는 건 싫어. 옛날 생각 나서 마음 짠하다고. 뎐트는 주절주절대며 로렌디스의 뺨을 쿡쿡 찔렀다.

뎐트는 혼잣말을 하고, 로렌디스는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헬렌의 성문 앞에 홀로 누워 있었다.

“수하가 나를 발견하고 헬렌으로 다시 데려갔지.”

“고생이 많으셨네요.”

“속을 알아보기가 힘들어. 그래서 우군인지 적인지조차도 구분하지 못하지. 단지, 직접 전장에서는 본 적 없어서 다른 야만족과는 다르다고 어렴풋이 짐작하는 정도야.”

로렌디스가 말을 끝맺자 마치 뎐트 칸이 지켜보기라도 하듯,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우리는 설명하기 힘든 관계 아래서 적정 거리를 유지 중이었다. 그 기이한 관계는 아슬아슬했으며, 분쟁 중인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상했다.

* * *

“공작이 내 이야기했어?”

뎐트와 멀리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 하루가 지났다. 굳이 멀리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까이할 생각 또한 없었다. 위험해 보이는 건 맞으니까.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나갈지도 모르니까 조심하는 게 맞지.

“내성 안에서는 움직임을 조심해 달라 보좌관 측에서 부탁을 드렸을 텐데요.”

“그대는 사람이 각박해.”

후원 테라스에 앉아 있는데, 뎐트가 책을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검은색 가죽 표지였다. 화려하고 두꺼웠지만, 매끄럽게 책장을 넘기자 손끝이 소리 없이 종이를 훑었다. 그가 읽는 책은 설화였다.

‘동화책이라고?’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겁을 줄 때나,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들려줄 때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걸 알았던 건 처음에 뭣 모르고 들어간 서재에서 우연히 책을 한 번 봤었기 때문이다. 책 표지가 비싸고 화려한데, 그 안에 든 이야기가 설화라서 뭔가 했었지.

“이 설화가 어디서 전해진지 아나?”

“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잖아요.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알기 힘들죠.”

그저 옛날이야기다. 누가 지어 낸지도 모를,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며 조금씩 변형된 동화랄까. 뎐트는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그렇긴 하지.”

식상하게 끝맺는 이야기에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렌의 설화는 설원에서 시작된다. 눈 덮인 설원에서 아이 하나가 실종되고, 부모가 아이를 찾아 나선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지만, 부모는 아이를 찾지 못했다.

눈보라가 치는 밤, 부모는 살기를 포기했고 삶을 놓았다. 그리고 설인이 나타나서 묻는다.

‘무엇을 잃었소?’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잃었다 했고, 설인은 아이를 데려다 놓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지 물었다.

아이의 부모는 목숨을 내놓았고, 그 대가로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게 주 내용이었다.

“나름 행복하게 끝난 거로 아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전해질 이야기니까 미화됐겠지.”

뎐트는 책을 덮고 고요히 읊었다.

“부모는 죽어. 아이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그리고 아이는 홀로 남아서 마을로 내려오지. 그런데 아이에게 남은 게 뭐가 있을까? 부모는 죽고 없지, 아이를 돌봐 줄 사람도 없고, 남은 가족도 없지.”

“그래서요?”

“부모를 따라가지.”

캐서린은 더듬거리며 목덜미를 긁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비극이지. 죽은 부모 따라서 죽어 버린 아이 이야기니까.”

제목은 설인이다. 설원에서 사는 전설 속 인물.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라서 마지막 결말이 미화됐을 뿐이지 비극 동화다.

“시시하다고 덮은 모양인데.”

뎐트는 어린 조카를 타이르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꺼림칙한 목소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캐서린은 얼빠진 그대로 눈만 끔뻑거렸다.

“나중에 읽어 봐.”

뎐트는 책을 캐서린에게 밀어 줬다. 캐서린은 가죽 표지만 흘끔거리다가 멈칫했다. 표지가 이질적이었다.

“헬렌이 아니라 북부의 설화인가요?”

북부에 헬렌만 있는 건 아니니까. 헬렌이 아니더라도, 이 설화는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도 전해질 수 있다.

설화란 사람이 사는 곳마다 조금씩 다르고, 조금씩 변형되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동화로 적당히 꾸며서 미화하는 것도 지역에 따라서 다르다.

“당신…… 수족들은요. 이런 설화를 알아요?”

“칸에서는 유명하지.”

뎐트는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아이는 부모를 찾아서 다시 설원으로 돌아와.”

“그리고요?”

“설인에게 잡아먹히지.”

그리고 끝이야. 어깨를 으쓱이던 뎐트가 지루하다며 책을 건성으로 밀어냈다. 캐서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게 결말이에요?”

“응.”

“그 뒤로, 그 설인은요?”

그 설화에는 아이가 죽는다는 이야기만 나오고, 그 아이를 먹어 치운 식인 설인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뎐트가 탄식하듯 숨을 고르더니 약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 설인은 이지를 빼앗기지. 사람의 피를 갈취한 죄로 말이다. 멍청하게도. 그래서 피와 살을 탐하는 야만인이 돼.”

“음…….”

“그리고 저주로 죽어 버린 뒤 그 자리에 ‘칸’의 초대 우두머리가 나와. 그게 그 설화의 결말이야.”

뎐트는 턱을 괴고 책의 표지만 뒤적거리며 이야기했다.

“밤늦게 다니지 마.”

“네?”

“설화는 어디까지나 밤늦게 다니면 길 잃으니까, 집에 일찍 다니라는 의미에서 시작됐거든.”

여러 방식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바뀌고 뒤틀려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핵심만 꼬집는다면, 공통적으로 엮이는 부분을 찾는 건 쉽다.

“이야기해 줬으니 네게 보답 좀 받을까.”

뎐트는 지겨우니 일어난다며 뒷짐을 지고 일어났다. 테라스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오늘은 전체적으로 선선한 날씨였다. 공기가 차갑긴 해도,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밖에서 공기를 쐬기 좋은 날이었다.

“밤에 길 안내 좀 부탁하지.”

“……네?”

“밤거리를 안 다녀 본 지 좀 오래 됐어야지. 헬렌에 와도 낮에만 거동하니까, 조명이라는 게 켜진 길거리가 궁금해. 가로등이랬나?”

캐서린은 그의 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되물었다.

“방금 전까지 제게 밤늦게 다니지 말라며…….”

“내 이야기는 아니었어.”

뎐트는 대수롭지 않게 캐서린을 지나쳤다. 캐서린은 찻잔을 든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나가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것도 아니고, 느릿하게 보폭을 뗐는데도 그는 이미 멀리 있었다.

“책은 놓고 갔네요.”

데보라가 기가 차다며 중얼거렸다. 탁자에는 뎐트가 놓고 간 책이 놓여 있었다. 캐서린은 책을 펼쳐서 목차만 보고 덮었다. 흰 피부에 은발. 창백한 설인……. 짧은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걸 또 로렌디스에게 무슨 수로 설명하니…….”

데보라가 난처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죄송합니다,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죄책감이 묻어났다.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닌데도 사과하게 만드는 저도 죄송하네요. 캐서린도 울고 싶어졌다.

* * *

“내가 이미 말했지 않나?”

로렌디스는 자기가 잊고 말하지 않았냐며 보좌관에게 한 번 더 확인했다. 뎐트 칸과는 거리를 둬라 꾸준히 이야기해 줬는데, 내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다고.

보좌관은 송구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만 피했다. 각하께서 제게 분함을 토로하셔도,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각하 그런 건 제게 말씀하실 게 아니라 마님께…….”

“지금 내게 저 말간 표정을 보며 쓴소리라도 하라는 거냐?”

평소에는 잘하지 않았습니까? 브레디는 혼잣말로 되물었지만, 로렌디스의 귀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송구합니다, 각하.”

“애를 물 앞에 데려다 놓았으면 제대로 봐야 할 것 아니냐.”

캐서린은 저기서 말하는 아이가 본인을 뜻하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머리가 멍해서 가만히 있는데, 로렌디스가 손을 내저으며 보좌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봐.”

브레디가 나가고 캐서린은 우두커니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죄인은 아니지만 죄인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캐서린이 그를 흘긋거리는데, 로렌디스가 머리를 헝클였다. 그러더니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본인도 벌떡 일어났다.

“앉아.”

집무실 책상에서 한창 업무를 보던 로렌디스는 서류를 죄다 덮어 두고 다가왔다.

“제발 겁먹은 표정 좀 짓지 마. 네가 이럴 때마다 내가 뭔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그는 언성을 높이다가 뭔가 겸연쩍다는 표정으로 턱을 괬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캐서린을 주시하다가 별일 아니라며 답했다.

“뎐트 놈이 또 억지로 요구했겠지. 야행을 도와 달라 이야기했댔나?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어.”

캐서린은 마음을 놓았다. 뎐트는 포로 신분이었고, 외출 건은 캐서린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부분이 아니었다. 로렌디스는 잠잠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한숨을 내쉬는 것도 같다.

“야행이라…….”

그놈이 어디 안 된다고 억지로 붙어 있을 놈도 아니고. 로렌디스는 불평 가득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어디 놀러 나온 줄 알겠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괜찮겠어요?”

“네게 화낼 일이 아니잖아. 그렇게 겁먹은 표정 할 것 없어.”

굳었던 어깨가 움찔했다. 로렌디스는 네가 왜 겁을 먹냐며,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살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