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그걸 지금 보고만 있었다고? 로렌디스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으르렁거렸다.
“그 와중에 곁에서 보고만 있어? 곁에서 구경이나 하라고 곁에 붙여 둔 줄 알아?”
뎐트 칸이 말하는 중간에 끼어드는 건 로렌디스가 아니면 힘들다. 비인간적인 기운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다. 로렌디스는 그걸 아는데도 혈압이 올랐다. 그 새끼가 지금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거야.
“그래. 그게 너희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 그걸 아는데도……. 쯧쯧, 데보라 경! 내가 그대를 왜 아내 옆에 붙여 뒀다고 생각해?”
“마님을 곁에서 보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임무를 이미 한 번 실패한 사람이다. 그런 데보라를 곁에 붙여 둔 건, 그만큼 더 주의 깊게 살피라는 의도가 컸다.
“뎐트 님께서도 딱히 진심으로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 일차원적인 놈이 의도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리 없지. 자극하려고 그랬다면 모를까.”
인생이 따분하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풍기는 놈이었다. 제 수족들이 죽든 말든, 이 지겨운 다툼이 길게 이어지든 말든, 뎐트는 꼭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거리를 뒀다. 귀찮다는 기색은 다분했지만, 거기서 분노나 노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아무런 감상도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따로 만날 자리를 마련할까요?”
로렌디스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 필요는 없다.”
로렌디스가 고개를 들자, 브레디가 난처하게 문을 두들겼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서늘한 바람이 고요히 불어닥쳤다. 인위적인 바람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브레디가 바깥을 흘끔거리더니 입술을 뻐끔거렸다.
“들여라.”
문밖의 손님은 굳이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고요하게 이어지는 발걸음이 집무실 앞에서 멈췄다.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뎐트는 끌끌대며 턱을 긁었다.
“나머지는 나가 봐.”
“네. 각하. 데보라 경, 얼른 나오시오.”
데보라는 뎐트를 뚫어지라 바라보다 집무실을 나갔다. 뎐트는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방금 나갔던 여인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헬렌의 개는 말도 빠르고 발도 빠르구나.”
그 집 주인마님과 헤어진 지 몇 시진 되지도 않았건만 여기로 쪼르르 달려왔어.
뎐트가 데보라를 눈 속에서 꺼내 온 게 벌써 5년이다. 죽었을 아이를 데려다 놓았는데,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게 쯧쯧. 주인을 닮아서 심보가 아주 고약했다. 눈앞의 주인께서도 심보가 단단히 뒤틀리셨고.
“화났나? 헬렌 공작이 내게 감정적으로 구는 건 오랜만이네.”
“요즘 많이 심심한가? 왜 계속 가만히 있는 사람을 들쑤시려고 들어? 내가 그쯤 해 두라고 이야기한 것 같은데.”
로렌디스는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포로로 잡혀 온 놈이 집무실 소파에 몸을 묻더니 느긋하게 소파에 눕는다. 그런데 위화감이 없다. 윽박질러서 바로 잡을 생각도 안 들었다. 뎐트는 히죽대며 턱을 괬다.
“저 욕심 어린 눈 좀 봐라. 나를 아주 잡아먹겠어.”
뎐트는 권태롭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보상금은 두둑하게 준비해 뒀겠지.”
“친우끼리 너무하군.”
“그러니까, 이런 지겨운 싸움 좀 그만 걸으라니까. 차라리, 그대의 아버지나 형님께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뎐트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말을 고르고 고르던 뎐트는 장난스럽게 답했다.
“공작은 사람이 너무 각박해.”
뎐트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덧붙였다.
“서운해.”
“징그러운 이야기는 그만해.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그 사람 건드리지 마.”
뎐트는 그가 뭘 지적하는지 깨달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기에 바람을 이뤄 준다고 했는데, 왜 여기서는 대역 죄인이 되어 버린 기분일까. 뎐트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헬렌의 정략결혼은 다 이런가?”
“갑자기?”
“결혼이라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이해관계로군. 공작은 왜 결혼했지?”
로렌디스는 저 물음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고민했다. 뭘 묻는 거지. 서류를 덮은 로렌디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 일족은 그래도 단순무식해서 그 속을 읽어 내는 게 쉬운데, 여기는 어려워.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속을 하나씩 품어서는. 너만 봐도 겉으로는 신사인 척 굴면서, 속으로는 속이 시꺼먼 짐승이잖아.”
뎐트는 배상금은 공작이 알아서 정하고 통보하라며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뎐트는 이들 일족과 달랐다. 그는 대체적으로 무던한 편이었다. 심하게 게으르고 심하게 권태로울 뿐. 그는 다른 일족들과 달랐다. 그래서 그 망나니 같은 첫째 아들보다야, 그가 ‘칸’을 통솔했으면 했다.
“아직도 마음이 없나? 그대가 칸을 이어받는다면, 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은데 말이지.”
“나는 그런 지렁이들을 품을 심성이 못돼.”
내 손으로 다 죽였으면 죽였지. 그들을 품을 성품은 못 된다. 그 지겨운 놈들을 치워 버리지 못한 게 한이었지. 뎐트의 눈이 으슥해졌다.
긴 전쟁이 이어져 온 게 벌써 100여 년이다. 몰락한 왕가까지 되짚어 보면 더 오래됐다. 헬렌이 자리 잡은 고대 왕국이 있을 때부터, 이 다툼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국경선을 맞댄 이들이 서로 싸우는 거야 당연하지만, 이 관계는 비정상적이었다.
“너는 뭐지?”
로렌디스가 뎐트에게 물었다. 뎐트는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
스스로를 야만족이라 부르지만 그들에게 섞이지 않으며, 동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이방인이라.
“지배자의 둘째는 심약하고 약한 성정으로 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해지는 이야기가 그렇다는 거고. 내가 직접 본 기억은 없지만…….”
“그게 왜?”
“생판 남 같아서 하는 이야기야.”
야만족이라 일컫는 이들에게도 가족이 있다. 일족을 이끄는 지배자가 있었으며, 그 지배자에게는 자식도 있었다. 첫째 자식은 당연히 후계자로 내세웠고, 다른 아들들은 전쟁을 위한 용병으로 키웠다.
지배자의 둘째 아들 이야기가 헬렌에까지 전해진 건 우연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심약하고 조용했으며, 몸이 약했다. 그리고 몸이 약한 용병은 필요하지 않은 칸에서는 제 아들이라도 폐기했다.
“뎐트 칸. 그게 내 이름이야.”
“나는 네 이름을 물은 게 아닌데.”
“내게 뭐냐고 물었나?”
로렌디스는 맞은편의 사내를 빤히 바라봤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칸이야.”
“…….”
“그저, 칸이지.”
때때로 스스로를 야만족이라 일컫고, 이 따분한 삶이 지겹고 지루하면서도 흥미를 좇으며, 때로는 그저 숨을 쉬고 있다.
“그리고, 그냥 여기에 있어.”
그 무엇도 아니다. 그저 여기에 있는 거다.
* * *
늦은 밤.
로렌디스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복도의 하인을 다 물리더니, 침실 문을 닫았다. 그는 삐딱하게 캐서린을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헝클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음마다 거친 기운이 넘실거렸다.
“로렌디스?”
캐서린은 침대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넨시가 침의를 입혀 주고 나가서 옷차림이 가벼웠다. 어색한 마음에 머리끝을 쓸어내리는데, 로렌디스가 통보하듯 이야기했다.
“나는 너를 밖에 내보낼 마음이 없어.”
“……갑자기요?”
“그 부분 정확하게 해 두라는 거야.”
당신이 그 이야기를 꺼낸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요. 떠나겠다는 사람을 붙잡은 게 어디 오늘내일 일인가요. 캐서린이 당혹스럽게 머리를 긁적거리는데, 로렌디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꽂혔다. 빠져나갈 마음이었다면 접어 두라는 태도가 고압적이었다.
“어디서 쉬고 싶으면 헬렌 소속 휴양지를 소개해 주겠지만, 어디 혼자 떠날 마음은 먹지 마.”
“으음.”
“네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내가 과격해질 수 있다는 부분까지. 네가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어.”
이해하지 못할 대화를 더듬거리며 되짚던 캐서린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뎐트 칸과 나눈 이야기가 흘러 들어갔나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떠날래?’라고 묻던 뎐트다. 그 이야기는 여기저기 퍼졌을 게 당연하다. 더군다나, 기사단과 보좌진은 로렌디스의 사람이니까.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 흘러 들어갈 거라고는 예상했다.
“안 가요.”
“뭐?”
“안 간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보니까 뎐트는 사람의 속을 읽어 내는 사람처럼 예리했다. 그 사람의 역린이나 작은 틈을 찾아내듯, 그 속을 읽어내서 뒤집어 버리니까. 캐서린은 아버지의 실종 소식에 민감했고,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시한부였던 시절에 민감했으니까.
“그자를 가까이하지 마. 음습한 놈이야. 속이 음험하고 약아 빠졌어.”
이건 깎아 내리는 게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올곧았다.
“몇 년이에요?”
“뭐가?”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요.”
로렌디스는 거기까지는 고민해 보지 못했다며 침묵했다. 로렌디스가 처음 전장에 오를 때 한 번 보고, 그 뒤로도 자주 마주쳤다.
공작위를 이을 때, 아무런 위험이 없던 건 아니었다. 로렌디스는 젊은 나이에 공작위를 이어받았다. 가주였던 아버지가 실종되고 막 공작위를 이어받았을 때, 젊은 공작은 전장에 적응하기도 급급했다.
그리고 그 즈음, 뎐트 칸을 만났다.
“좀 됐지.”
“있잖아요. 로렌디스도 혹시…….”
로렌디스가 뭘 물으려는지 알겠다는 듯 먼저 답했다.
“눈밭에 파묻혀 있었어. 그때는 나도 어렸고 그놈도 어렸지.”
젊은 게 아니라 어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나이에 공작위를 이어받고 전장으로 내몰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