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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62)화 (62/129)

62.

테슬러가 세이렌을 혼자 놔두고, 로렌디스에게로 먼저 다가와 섰다.

“네놈 얼굴 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구나.”

로렌디스가 황궁을 찾는 건 테슬러가 그를 찾을 때만이었다.

“저번에는 꾸역꾸역 빠져나가더니, 이번에는 용케 참석했어.”

“폐하께서 찾을 때는 언제나 왔습니다.”

작년 건국제까지만 해도 꾸역꾸역 빈틈을 찾아서 빠져나가던 놈이 말은 잘한다. 테슬러가 로렌디스를 찾는 게 1년에 열댓 번이라면, 로렌디스가 그를 찾아 주는 건 그중 두어 번이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쯧쯧.”

테슬러는 네놈 사정 따위 모르니까 한 번만 좀 와라 이야기해도, 로렌디스는 번거롭다며 거절했다. 세이렌은 흰 부채를 펼쳐서 입가를 가렸다. 세이렌과 잘 어울리는 흰 드레스가 부채를 따라서 나부꼈다.

황실 연회에서 흰 옷을 입는 건 황후와 황녀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오랜만이로군요, 헬렌 공작. 이전에 황궁을 한 번 찾았다더니, 이 황후를 보지도 않고 갔나요?”

“그동안 공사다망했습니다.”

“가족끼리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드네요.”

세이렌은 가늘게 눈을 찌푸렸다. 질책하는 이야기임에도 조곤조곤한 어조와 편안한 표정을 보면,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헬렌 부인은 처음인가요? 이런 연약한 아가씨였네……. 거친 북부에서 살아남기에는 목이 가느다란데, 꽃 같은 여인을 데려다 놓았어요.”

세이렌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가시가 돋아 있었다. 거친 북부에서 살아남기 힘드니 목숨 줄 꽉 붙잡으라는 뜻이려나.

세이렌은 말 몇 마디를 한 게 다였는데, 그 말에는 뼈가 느껴졌다. 꼭, 목덜미를 사냥당한 기분이었다.

“북부의 안녕을 기원하지요.”

“감사드립니다, 폐하.”

세이렌은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상석으로 갔다. 황제가 연회를 알리는 축하문을 읊고,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다. 세이렌의 입술이 고요히 읊조렸다.

‘그 목이 붙어 있기를 바라요.’

너무 고요해서 아주 잠깐이나마 스쳐 간 허상 같았다. 그 읊조림을 깨달았을 때는 세이렌은 이미 테슬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간담이 서늘했다. 목덜미를 깨물기 전에, 그 아래서 벗어난 기분이랄까.

* * *

캐서린이 목덜미를 더듬거리는데, 온갖 이목이 쏠렸다.

‘옷을 보나?’

연하늘색 드레스는 레이스를 겹겹이 감싼 식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레이스가 나풀대며 꽃송이처럼 벌어졌다. 섬세한 레이스는 헬렌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실로 짜냈다. 그래서인지 은빛 눈송이가 은은히 날리는 듯 반짝거렸다.

“춤은 출 줄 아나?”

“조금 서툴지도 몰라요.”

“너는 뭐든 서툴러서 딱히 놀랍지도 않아.”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허리에 감긴 손이 단단했다. 캐서린은 한쪽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 부드럽게 다리를 움직였다. 음악은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물결처럼 흘러 다니며 몸을 적시는 것 같았다.

“어?”

캐서린의 입술에서 얕은 탄식이 터졌다. 구두로 그의 발을 밟았다. 로렌디스가 보라며 놀랍지도 않다며 웃었다. 캐서린은 울상이 돼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사람들 사이에 놓여서 여러 시선이 닿았지만, 어쩐지 그 시선이 거북하지만은 않았다.

그 춤이 끝났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뺨이 상기됐어.”

“네?”

“이런 얼굴, 빛 아래서 보는 건 처음 같아서.”

캐서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로렌디스는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머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머리 장식을 잔뜩 해 둔 걸 보고 조용히 손을 내렸다. 대신 머리를 툭툭, 가볍게 토닥였다.

“황후와 황자께서 오시는군.”

로렌디스는 춤이 끝났는데도 캐서린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캐서린이 몸을 약간 비틀자, 로렌디스도 마지못해서 놓았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공작.”

“오랜만이오, 헬렌 공작.”

세이렌이 캐서린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 곁에서 붉은 제복을 입은 황자가 서 있었다.

‘둘째 황자라.’

둘째 황자는 현 황후의 태생이었지만, 황위 계승권에서는 밀려났다.

산욕열로 사망한 전대 황후의 아들. 첫째 황자가 제1계승권자로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무게중심이 태자에게 쏠렸다.

황후가 둘째 황자를 밀어주는 게 가능하지만, 로렌디스와 황제가 황태자에게 무게를 실어 줬다. 큰일이 없으면 첫째 황자가 황위를 이어받겠지만, 이변이 생긴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헬렌 부부가 같이 황실을 찾은 건 처음이던가요, 어머니?”

“그렇지? 금실 좋은 부부로 소문이 났던데, 공작께서 유난히 아끼는 게 보여. 곧 후계 소식도 들려오겠군.”

세이렌이 부드럽게 캐서린을 끌어안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포옹이라서 캐서린이 그대로 굳어 버리자,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끌어당겼다.

“아내가 놀랍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세이렌이 사과하듯 읊조리는 이야기에, 로렌디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래도 금방 갈무리해서 감정을 지워 냈다. 세이렌은 아쉽다며 혀를 차더니,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헬렌으로는 언제 떠나나요? 떠나기 전에 황궁에서 식사나 한 번 하면 좋을걸.”

“오래 머물지는 못합니다.”

“저런. 폐하께서 서운해하겠어요. 가족끼리 얼굴 좀 더 자주 뵙고 하면 좋은데, 헬렌 부인도 곧 떠나겠군요.”

세이렌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캐서린에게 닿았다. 아주 가볍게 닿았던 시선은 금방 떨어졌다.

“자주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남편이 북부를 지키는데, 저도 마땅히 그 자리를 지켜야죠.”

“공작께서 너무 감싸는 모양이네요.”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미심장한 어조……. 이건 호의일까 적의일까. 아니면 그저 무관심일까.

“이 예쁜 모습 오래도록 본다면 좋을 것을. 안 그런가요, 황자?”

“네. 폐하. 오래 본다면 좋겠군요.”

둘째 황자의 목소리는 무던했다. 적색 제복을 입은 그는 캐서린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 눈은 건조했고, 캐서린은 거기서 어떤 감정도 읽어 내지 못했다. 그 눈으로 캐서린을 내려다보다가 세이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이렌은 가볍게 인사 정도만 나누고 물러났다.

“조심해서 가요.”

그 목소리만 아지랑이처럼 울려 퍼졌다.

“너무 조용히 끝났군.”

저들이 조용할 리 없는데 말이지. 로렌디스가 고요히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의 시선이 낮게 침잠됐다.

* * *

건국제까지는 타운하우스에 머물려던 계획을 변경했다. 타운하우스의 하인들이 마중 나왔고, 마차에 서둘러 짐을 실었다. 타운하우스에 머물렀던 시간이 짧았던지라 특별히 더 챙길 것도 없었다.

“언제 또 오십니까?”

“빠른 시일 내로 다시 볼 것 같군.”

기사단이 말을 챙겨 나왔다. 로렌디스가 흑마의 고삐를 매끄럽게 잡더니, 안장에 올라탔다. 캐서린은 마차 창밖을 흘끔거리며 내다보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폐하께 말씀을 안 드리고 곧장 떠나도 돼요?”

“연회홀에서 나오기 전에 따로 인사드렸어.”

테슬러는 바쁘다면 가 보라며 흔쾌히 보내 줬다. 애초에 테슬러가 눌러 앉힌다고 눌러앉을 로렌디스도 아니었다. 테슬러도 그걸 알기에 로렌디스와는 감정적으로 부딪치지 않는 편이었다.

건국제가 한창인 거리는 분주했다. 광장을 빠져나온 마차가 대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덜컹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게 기이해서 창문을 열자, 로렌디스가 흑마를 끌고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제도는 어땠어?”

“뭐가요?”

“오기 전에 낯설다고 이야기했었잖아.”

캐서린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걸 기억했어요?”

“별로였는가 해서.”

캐서린은 눈을 깜빡였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왠지 알 것도 같다.

“좋았어요.”

“뭐가?”

“야시장이요. 좋았다고요.”

로렌디스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실없다며 웃었다. 그날 거기서 혹시 감정이라도 상했는지 확인하는 거구나. 캐서린은 그에게 안심하라며 이야기해 줬다.

“당신이 나 때문에 화내 준 것도 좋았고, 솔직히 고마웠어요.”

카를로 백작에게 찾아가서 해결해 준 일까지. 고마운 일이 많았다. 그날은 마냥 기분 나쁘기보다는 유쾌했던 날로 기억됐고, 로렌디스가 발찌를 채워 주며 차라리 족쇄로 채워 버리고 싶다는 이야기에 지난 일은 모두 잊혔다.

“헬렌에 도착했네요.”

헬렌의 절벽 길을 따라서 마차가 쉼 없이 달렸다. 비탈길을 지나서 내려오자,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그곳에 헬렌 외성의 성문이 굳건히 서 있었다.

“쯧.”

“저거, 뭐예요?”

“창문 닫아.”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내려다보며 되뇌었다.

“마차 창문 닫고 가만히 있어.”

캐서린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저, 사람들 뭐예요?”

“야만족. 칸의 민족이라고들 부르지.”

적색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모포를 걸친 사내들이 도끼를 들고 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은 경건하기보다는 우악스럽고 거칠었다. 야만적인 호통 소리가 들리고, 캐서린은 창틀을 움켜쥐었다.

‘칸’의 민족.

다른 말로는 야만족.

로브를 덮어쓴 야만인들이 헬렌의 기사들과 부딪쳤다. 캉캉, 대는 거친 쇳소리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저놈들이 왜 외성을……?”

“누군가 우리가 자리를 비운다고, 야만인들에게 알려 주기라도 한 모양이지.”

야만인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희번덕 웃던 놈들이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로렌디스가 유연하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게 끝이었다. 마차 창문이 닫히고 캐서린은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나가면 방해야.’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도움이 되어 주진 못해도 방해가 되면 안 된다. 덜컹덜컹하며 마차가 흔들렸다.

고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누군가 죽어 나가는 것 같다. 커튼을 젖히자 야만인 여럿이 우후죽순 썰려 나갔다. 그들은 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흥분에 취해 흉기를 휘둘렀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조심해서 가요.’

그제야 세이렌이 한 이야기가 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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