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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61)화 (61/129)

61.

어리석은 이들은 제 앞길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외딴 길을 걷다가 꼭 변을 당하곤 한다.

캐빈 백작은 낭패라는 표정을 지워 내지 못했다. 마차의 문이 뜯겨 나가고 웬 사내들이 그를 꿇렸다.

“이게 무슨…….”

진흙 바닥에서 몸을 구르면서도 캐빈 백작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왜 구르지? 웬 사내들이 지금 나를 끌어낸 거야? 로브를 쓴 사내들의 기세는 날카롭다 못해 거칠었다. 칼바람이 몸을 할퀸 것처럼, 살갗이 너덜너덜 찢기는 기분이었다.

“무슨 짓이오! 내게 왜 이러는 거요?”

“쓸모없는 짓을 할까 걱정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였군. 사람이 적당히 속을 감출 줄도 알아야지. 너무 무능하잖아.”

백작은 때아닌 손님의 등장에 급하게 머리부터 조아렸다. 전야제에 있을 분께서 왜 여기, 아니, 그보다도 자신은 왜 여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가?

로렌디스는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풍겼다.

“무식하면 눈치라도 빠르면 좋을 것을.”

“…….”

“거기서 마차를 돌리라는 이야기는 왜 꺼냈는지.”

캐빈 백작은 그제야 상황 파악을 끝냈다. 뒤를 밟혔다. 숙련된 기사가 그의 뒤를 쫓아서, 그를 덮쳤다. 여기서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 그런 예감이 든다. 이들에게 목덜미를 보였다간, 그대로 물어뜯겨 죽는다.

“헬렌, 헬렌 공작! 무슨 오해가 생긴 모양입니다! 방금 전 일은 실수여서 사과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캐빈 백작은 납작 엎드려서 빌었다.

“죄송합니다. 술기운에 제가 미쳤습니다.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각하, 각하!”

이 늑대들을 협박할 생각을 하다니 미쳤다. 이들은 목덜미를 물어뜯으면 물어뜯었지, 협상할 이들이 아니다. 불순한 의도가 보인다면, 죽여서 그 입을 막아 버리면 막아 버리지……. 로렌디스는 고요히 백작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라.”

“네, 네 각하!”

“그 목소리가 헬렌에 전해지는 날에는, 여러 사람의 목을 받아 갈 거다. 그 무게를 알아 두었으면 좋겠어.”

캐빈 백작은 되는 대로 고개부터 끄덕였다.

“이, 이해했습니다. 절대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겠습니다!”

로렌디스는 시큰둥하게 턱을 쓸다가 호위대원에게 턱짓하며 이야기했다.

“입은 이미 함부로 놀렸잖아.”

호위대원 하나가 칼을 뽑았다.

긴 비명이 이어지고, 헬렌의 기사들은 그 길을 유유히 떠났다.

전야제가 한창인 광장은 시끌벅적했다. 캐서린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로렌디스는 야시장에서 발찌를 하나 샀다. 전문점에서 산 발찌보다야 조악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한 외출이었으니까 기념품쯤은 될 것이다.

* * *

제도의 타운하우스는 헬렌에 비해서 따뜻했다. 헬렌에서 아무리 난방을 꼼꼼하게 돌리더라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외풍을 모조리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밤만 되면 벽이나 복도는 차가운 편이었다.

‘따뜻하네.’

침실에는 보드라운 융단을 깔아 두었다. 하녀가 잠자리를 봐 주고 나갔고, 로렌디스는 야시장의 치안도 확인할 겸 광장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일찍 왔네요?”

“당신 혼자 오래 두기엔 마음이 쓰여서.”

“내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도 아니고.”

“아이는 아니지만 혼자 두면 꼭 이상한 일에 휘말리잖아. 혼자 놔뒀더니 울면서 오질 않나, 이번에는 웬 날파리가……. 이 이야기는 됐으니 그만해.”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발목을 가져가더니 재킷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리본을 엮어 만든 발찌였다.

“기념품이라고 살 게 없어서.”

“그런데 왜 발찌예요?”

“여기에 족쇄라도 묶어 두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농담이죠?”

로렌디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그 시선이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던 사이였는지 묻고 있었다.

로렌디스가 발목에 발찌를 채웠다. 금색 리본과 흑색 리본을 엮어 만들었는데, 단조로우면서도 단아했다.

‘족쇄라.’

차라리 족쇄를 걸어 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어딘가에 발을 딛고 몸을 담았다는 게 오늘만큼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자작저에서 지낼 때는 언제라도 쫓겨날 것 같았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계모와는 더 지낼 수 없었다. 헬렌에서도 곧 떠날 처지라고 얹혀 지냈고.

“캐빈 백작가는 매매혼으로 얽힐 뻔했던 집안이에요. 어맨다…… 새어머니께서 헐값에 저를 팔아 치우려 했었거든요.”

“그 노인네는 노환으로 죽었잖아.”

“네. 노환으로 죽었어요. 그래도 그 집안 식구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니까요. 억지로 들춰서 좋을 일은 아니라서 결혼 초기에 묻어 두었지만요.”

캐서린은 침대에 앉아서 로렌디스를 올려다봤다. 로렌디스는 여전히 로브 차림이었다. 외출했다가 막 돌아온 거 같은데, 로브도 안 벗고 침실로 왔구나.

로렌디스는 로브와 외출복을 벗으며 답했다.

“그 집안은 입 다물고 지낼 거니까 걱정 마.”

“네?”

“입 다물고 지낼 거라고.”

로렌디스라고 캐빈 백작가를 모를 리 없다. 그때 그 집안에서 캐서린을 꺼내 온 게 로렌디스였다.

“떠났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언제요?”

“때아닌 밤중에.”

때아닌 밤중에, 왜? 건국제 때문에 제도까지 와두고 갑자기 떠났다니요? 그다음 설명은 요약됐다.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부가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그게 끝이에요? 로렌디스는 그게 끝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더 궁금한 게 남았어?”

“궁금한 거까지는 아니지만.”

그럼 호기심 보이지 말라며, 로렌디스는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 부분만 들어도 알 만했다. 헬렌의 기사가 움직여서 입막음했구나. 그걸 확인하는 길은 간단했다.

캐서린은 날이 밝자마자 호위대원을 찾았다. 어젯밤에 캐빈 백작의 뒤를 따라갔던 호위대원이었다.

“간밤에 외출 다녀오셨어요?”

호위대원은 타운하우스 밖을 떠돌다 말고 멈칫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마님?”

“아닌가? 아니, 오늘 아침에요. 하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이른 아침부터 타운하우스가 소란스러웠다. 어제 야시장 인근 산에서 마차 하나가 습격받았단다.

핏자국이 남아 있어서 조사했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다였다. 그래서 캐서린은 지난밤 외출했던 로렌디스를 떠올렸다.

그는 야시장을 조금 더 둘러본다며 나가서 밤늦게야 돌아왔다. 그런데, 그전에 호위대 하나가 카를로의 뒤를 밟았다.

그 뒤 카를로가 떠났다. 그 세 가지의 연관 관계를 잇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위대에서 카를로의 뒤를 쫓아서 위치를 파악했고, 로렌디스가 거기서 합류했으며, 마차를 습격해서 지금 저런 기사가 난 거다.

‘떠났다니까 신경 쓰지 마.’

‘언제요?’

‘때아닌 밤중에.’

호위대원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다며 매끄럽게 답했다.

“헬렌의 기사는 모두 타운하우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지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헬렌의 이름이 거기서 나올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묻혔다는 뜻 같다. 호위대원은 별일 아니라고 대꾸하며 거수경례했다.

“네. 오해였네요. 잘 해결됐어요.”

호위대원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 * *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걸음 한 번 내딛는 거로도 헬렌은 할 도리는 다하는 거니까요.”

캐서린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치장을 서둘렀다. 건국제 첫날이 밝고, 귀족들이 대거 참석하는 연회가 오늘 밤에 열릴 예정이었다.

연하늘색 드레스에 레이스를 덧대고, 거기에 헬렌을 상징하는 숄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손에 레이스를 수놓은 장갑을 끼자, 하녀들이 손을 놓았다.

“머리는 가급적 만지지 마십시오.”

“고생했어. 로렌디스는?”

“각하께서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밖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하녀 하나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캐서린의 발길을 이끌었다. 높은 구두도 이제 익숙해졌다. 결혼식을 치를 때는 발목이 뻐근해서 시큰거렸고, 헬렌에서 첫 연회를 치를 때는 어색해서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졌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마차 앞에서 팔을 뻗었다. 수습 보좌관이 그의 옷차림을 봐 주며 이야기했다.

“각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답답하다고 크라바트나 재킷을 벗어젖히면 안 됩니다.”

“그대는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혹시나 헬렌에서처럼 자유로운 모습을 보일까 했습니다.”

황궁으로 가는 마차가 매끄럽게 굴러갔다. 성문 앞에 마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번 연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귀족들이 타고 온 마차라고, 마차도 화려했다. 화려한 문양이 마차 벽면을 수놓았는데, 가문의 상징을 마차에 박아 두었다.

캐서린이 익히 아는 가문부터 모르는 가문까지 다양했다. 헬렌의 마차는 별다른 대기 없이 곧장 들어섰다. 헬렌의 권한 중 하나였다.

“허리 꼿꼿하게 펴고.”

마차가 멈춰 섰다. 로렌디스가 먼저 내려서 팔을 뻗었다. 캐서린은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홀에 입장했다. 시종장이 둘의 방문을 알리자, 이목이 집중됐다.

허리를 펴라.

턱을 세우고.

발을 내딛자, 드레스 자락이 살랑거리며 발목을 감쌌다. 발목에서는 리본 발찌가 사부작거렸다.

“헬렌 부부 들었습니다.”

참석자의 면면을 고요히 훑었다. 보좌관을 통해서 미리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고, 가문과 정황 또한 미리 알아 두었다.

황실의 외척과 긴밀하게 밀접한 가문들과, 현 황태자와 태자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 중인 가문까지.

제도를 이끄는 주요 권세가들이 모두 모였다. 로렌디스는 갑갑한지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인들이 절대 느슨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신신당부한 거로 기억하는데…….

‘모르겠다.’

로렌디스가 느긋하게 주변을 훑자, 곁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귀족들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다가와서 말을 걸고 싶어 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어깨를 당겨서 길을 옆으로 비켰다. 붉은 융단 위를 걷던 테슬러가 로렌디스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황제 테슬러 곁으로 황후 세이렌도 다가왔다.

황후를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딛는 걸음이 가벼우면서도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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