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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60)화 (60/129)

60.

“감사합니다. 덕분에 빨리 검거할 수 있었습니다!”

로렌디스는 뽑았던 검을 검집에 넣었다. 어수선했던 야시장은 금방 정돈됐다. 강도를 제압해서 경비대에 넘기자, 경비대가 거수경례했다.

“전야제의 경비를 더 강화하거라. 이런 식으로 물을 흐리다간, 무슨 사고든 터지니까.”

“그나저나, 누구십……니까?”

로브로 얼굴을 가려서 경비대에서도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로렌디스가 로브를 벗자, 그제야 경비대에서도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헬렌 공작님을 뵙습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어지러워지는 건 질색이야.”

이들을 겁박하려던 건 아니다. 단지 경고나 한 번 해 주려던 것뿐이다. 야시장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신분을 감추는 게 차라리 낫다. 그래야지 시선도 덜 받고, 움직이는 데 제약도 덜했다.

거리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점점 더 늘어났다. 로렌디스는 다시 발을 내딛다 표정을 야차처럼 구겼다.

“저건 또 뭐야.”

검집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 * *

캐빈 백작가.

계모가 작당하고 캐서린을 팔아 치우려 했던 곳.

캐빈 백작이 노환으로 죽고, 그의 아들이 백작위를 이어받았다. 카를로 놈을 아는 이유는 하나다.

그 아들이 노백작 대신 캐서린의 몸값을 매겼으니까.

‘네가 아버지의 다섯 번째 첩실이 될 여인이로군. 금화 100개로 하지.’

그 이야기를 떠올리던 캐서린은 눈살을 거칠게 찌푸렸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누군가에게 팔릴 뻔했던 기억이니까. 이제는 너무 옛날 일 같아서 잊고 지냈다.

‘이상하지. 뭔 일이든 날 것 같아.’

카를로가 턱을 쓱쓱 만지며 다가왔다. 호위대가 그를 막으려 하기에, 캐서린은 팔을 올려 괜찮다고 했다. 카를로는 비틀거리다가 무릎을 짚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라고 중얼거렸다.

“아가씨는 예전에 잠깐 봐서 그런가? 외모가 눈에 띄게 변해서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

캐서린은 답하는 대신 표정을 단조롭게 가다듬었다.

“그간 잘 지냈나?”

“…….”

“혹시 말을 못 하나? 나 혼자만 말하는 것 같은데 말이지.”

캐서린은 입가를 더듬거리며 손으로 가렸다. 어어? 너무 의외의 만남이라서 마땅히 할 말을 잊었다.

노백작이 죽고 백작위를 이은 장남.

노백작이 죽었으니까 그 장남이 당연히 작위를 이어받았을 거고, 현 캐빈 백작가는 카를로의 소유일 것이다.

‘아, 너무 자연스럽게 잊고 지냈어.’

캐서린도 당혹스러웠다.

“아가씨 숙녀가 되더니 곱상해졌네. 지금은 또 누구의 첩으로 팔려갔나?”

캐서린은 그제야 이 사람의 뻣뻣함을 이해했다. 이 사람은 캐서린이 어디서 누구와 결혼했는지를 모른다.

그걸 모르나? 북부의 소식 자체가 통제돼서 그랬나? 캐서린도 내성 밖으로 잘 안 나왔고.

호위대의 표정도 당연히 어두워졌다. 저 새끼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 거냐며,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마님.”

호위대에서 칼집에 손을 얹더니 캐서린에게 고요히 물었다.

“누구입니까?”

“그러게요. 누구일까요?”

“모르는 사이입니까?”

“네. 모르는 얼굴이네요.”

술 냄새도 나고 몸도 엉거주춤한 걸 보아서는, 술 먹고 이지가 흐려진 모양이네요. 술기운에 앞뒤 분간 못 하고 불구덩이 앞으로 덤벼드는 게, 부나방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위대가 가볍게 결론 냈다.

“그럼 죽이겠습니다.”

“길거리에서요?”

“헬렌의 이름은 의외로 많은 부분을 허용합니다.”

“행인이 술 먹고 실수라도 저지른 것 같은데, 호위 기사님께서 화가 많이 났네요.”

호위대가 허리춤에 엮어 둔 검을 풀었다. 검을 쓰는 거야? 검 써서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너무 가볍게 꺼냈다. 여기서 칼을 뽑으면 모든 이목이 집중된다. 그건 캐서린이 바라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내 앞에서 칼을 휘두르다니요.

‘나는 로렌디스처럼 담력이 좋지 못해요.’

카를로에게서는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캐서린은 놈에게 한걸음 다가서며 되물었다.

“똑바로 한 번 더 봐. 무언가 큰 착오가 생긴 모양인데 확실해?”

“……무, 무슨?”

“술에 이지를 빼앗긴 건 알겠지만, 말실수 한 번으로 그 목숨을 빼앗기면 억울하잖아.”

애석해라. 말실수 한 번으로 목숨까지 빼앗겨버리면 삶이 너무 억울하다만. 당신이 건드린 건 내 역린이다.

“누, 누구요?”

캐서린은 월계수 인장을 보여 주며 싱긋 웃었다. 당신이 지금, 누구를 붙잡고 망언을 지껄였는지 현실을 직시해라.

“헬……렌.”

작은 옷핀이지만 카를로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헬렌의 월계수 문양이 선명하게 들어간 옷핀이었다.

“다시 묻지. 나를 아나?”

“모, 모릅니다!”

“그래. 우리는 모르는 사이야. 모르는 사이일 때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고.”

뒤에서 성큼성큼 인기척이 다가왔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익숙한 체향이 등 뒤에서 풍겼으니까.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로브를 눌러 씌웠다. 캐서린은 눈만 내밀고 로렌디스를 흘끔거렸다. 로렌디스가 커다란 손아귀로 캐서린의 시야를 가렸다. 캐서린은 답답함에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자 단단한 팔이 캐서린의 허리를 옥좼다.

“내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잠시도 혼자 두기 어려워.”

자리를 잠깐 비웠더니 잠깐 사이에 날파리가 꼬였다며, 로렌디스가 홀로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는 캐서린에게만 들릴 만큼 조곤조곤했다. 캐서린은 그의 품에서 몸을 웅크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꼭 내가 자리를 비우면 이런 일이 일어나던데…….”

“미안해요.”

“나는 그대가 언제쯤 내게 죄송하단 이야기를 안 할지 궁금해졌어. 이리 와 봐. 안 놀랐나?”

“조금 놀라긴 했는데 괜찮아요.”

“오랜만의 외출인데 못 볼 꼴을 봤군.”

로렌디스는 서늘한 낯으로 백작을 내려다봤다. 야만족과 싸우며 날카롭게 벼려진 기세가 너울거렸다. 갈무리해서 억누를 시도조차 않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헬렌의 기사는 거칠어서, 그 혀를 뽑아서 성벽에 내걸 수도 있다.”

“허억……!”

“헬렌의 주인을 모함하는 건 북부의 주인을 모함하는 것이며, 그건 그대의 목숨 하나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로렌디스가 고요히 읊조리는 이야기들은 협박에 가까웠다. 카를로도 덜덜 떨며 로렌디스의 이야기를 되짚었다.

헬렌의 기사……. 헬렌의 기사라면 월계수 기사단. 월계수 기사단은 북부의 성을 지키는 이들이고, 헬렌의 주인이라면 현 황제의 조카이다.

“조용히 치우겠습니다.”

“전야제가 한창이다. 조용히 보내거라.”

여기서 일이 커지면, 헬렌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다. 오랜만에 나온 외출인데, 그런 수고를 굳이 할 필요는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조용히 해라. 여기저기 보는 시선이 많다.”

카를로는 비틀대며 서둘러 도망쳤다. 그리고 호위대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갔다.

* * *

전야제가 한창인 밤.

카를로 캐빈 백작은 비틀대며 걷다가 뒤를 흘끔거렸다. 캐서린 밀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제 아버지가 결혼매물로 사들인 상품이었는데…….

“그 여자가 헬렌으로 갔다고?”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의 첩실도 금방 잊혔다. 아버지께서 그런 결혼매물을 사들인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어야지.

그 뒤, 그 여인이 헬렌으로 갔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은 것 같다. 그때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금방 잊었다.

“술 처먹고 뭔 짓을 한 거지?”

웩-속이 울렁거렸다. 백작은 속을 한 번 더 게워 내고 벽을 짚었다. 울렁거리는 속이 다 뒤집혔다.

“아이고! 백작님 뭘 얼마나 마신 겁니까!”

마부가 백작의 몸을 억지로 마차에 태웠다. 오싹한 한기가 뒤따랐다. 낫을 든 사신이 꼭 그의 목을 베어 내러 올 것만 같았다. 백작은 빠릿빠릿하게 머리를 굴렸다.

로렌디스 헬렌.

캐서린 헬렌.

헬렌 공작가.

미친 노인네가 누굴 탐낸 거야!

제 아버지는 늙어서도 욕심이 많았고, 집안에 데려다 둔 새어머니만 하더라도 수십이었다.

캐빈 백작은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똑같은 부자지간이지만, 그래도 현 백작은 현실적인 편이었다.

‘도, 도망가야…….’

백작은 허둥지둥 마부를 독촉하려다 멈칫했다. 헬렌 부인이 모른 척하는 거면……. 이 일을 조용히 묻겠다는 건데, 그럼 그 대가로 금전을 요구해도 됐으려나?

이 일을 숨기는 건 헬렌이다. 그럼 묻어 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해도 됐을 일이잖아. 어리석었어.

“마부! 멈춰 보아라! 광장으로 다시 간다!”

마차가 멈춰 섰다. 밖에서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덜컹대던 바퀴 소리도 잠잠해지고, 밖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부! 마부 밖에 있나! 있으면 대답해라!”

“…….”

“네 이놈! 지금 뭣 하기에 대답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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